[사진 설명]
이 사진은 깨진 유리 사진입니다.
유리판 전체에 걸쳐 불규칙하고 조밀한 균열이 퍼져 있으며, 각 조각은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유리 너머에는 흐릿한 검은색 실루엣이 보이지만 구체적인 형태는 식별되지 않습니다.
빛이 유리 조각의 경계에 반사되어 금속성 광택처럼 보이며, 전체적으로 어두운 회색과 검은색 톤이 강조되어 차분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줍니다.
[사진 끝]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부재는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 목소리를 피해 숨어든 순간부터다. 그들은 지혜자의 탈을 쓴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이끌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헛된 욕망을 품는다. 사탄은 그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 꾀었다(창 3:5).
사탄이 인간을 유혹한 그 장면은 우리에게 세상의 지혜가 어떤 방향을 지향하는지를 묻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삶의 방향과 정반대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묻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고백은 인간의 위로와 평안이 오직 하나님께 모든 주권을 돌리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은 그 위로에서 등을 돌리고 불안과 공포 속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그 유혹은 바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세상의 지혜였다.
세상의 지혜는 결국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내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 3:9-10)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들이 숨은 것은, 참된 절대자의 등장 앞에서 자신이 가짜였음이 드러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바로 그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다. 지금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 C. S. 루이스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이러한 인간의 실존을 지옥이라는 상징으로 그려낸다.
그 사람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이사를 다니고 있어요. 서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젠 너무 까마득하게 멀어져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오겠다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입니다. 거기에서 여기까지는 천문학적으로 먼 거리거든요. 제가 사는 곳 근처에 구릉이 하나 있는데, 거기 사는 사람 하나가 망원경을 갖고 있어요. 그 망원경으로 보면 수백만 마일 떨어진 곳에 옛날에 왔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도 수백만 마일 떨어져 있지만, 자기들끼리도 수백만 마일씩 떨어져 있어요. 지금도 계속 서로에게서 더 멀리 옮겨 가고 있는 중이구요.(24쪽)
루이스의 묘사 속 지옥은 유황불과 비명이 가득한 곳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서로로부터 멀어진 채 각자의 고립 속에 빠져든 인간들의 자가당착의 공간이다. 각자가 자기만의 선을 세우고, 스스로 주인이 되려 하며,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한 곳, 그곳이 곧 지옥이다. 그러므로 지옥은 죽은 후에만 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인간은 지옥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배제된 곳, 참된 기독교 윤리가 실종된 곳, 바로 그곳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창세기 3장과 루이스의 해석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윤리’라는 이름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상생, 공존, 자비, 공정, 정의—이 모든 말들이 그럴듯해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의 의를 앞세우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행위라면, 그것은 결국 악한 기획일 뿐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끝없는 오만의 역사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