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이 사진은 좁은 골목길 사이를 위로 올려다본 도시 건축 사진입니다.
사진은 네 채의 중층 건물 사이에서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촬영되었으며,
건물들의 외벽과 발코니가 프레임을 감싸듯 대각선으로 배치되어 있어 중심부에 푸른 하늘이 십자 형태로 드러납니다.
각 건물은 발코니와 철제 난간, 식물 화분, 빨래줄 등 일상적인 도시 요소들을 갖추고 있으며, 밀집된 도시 구조의 밀도감과 제한된 개방감을 강조합니다.
자연광이 건물 외벽을 비스듬히 비추며 그림자와 명암 대비를 형성하고 있어, 시각적으로 깊이감과 공간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사진 끝]
2020년 여름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억에 남는다. 그 중 어느 것도 특별히 긍정적이지 않다. 코로나19,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그리고 여러 서구 국가에서 벌어진 사회적 혼란—특히 유럽과 미국의 식민주의 과거에 대한 재조명이 그것이다. 이러한 혼란 한가운데 ‘비판 이론(Critical Theory), 특히 ‘비판적 인종 이론(Critical Race Theory)’이라는 용어가 대중적 어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원래는 인문학 대학원 세미나에서나 다뤄지던 전문적인 주제였지만, 갑자기 트위터 계정과 개인 블로그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문가가 되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 논의에 열성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판이론은 주류 담론으로 들어왔고, 지역 및 교단 차원의 학교 이사회, 고등교육 기관, 교회에서 갈등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이젠 비판이론은 단순히 ‘찬성이냐 반대냐’라는 질문으로 정통성을 가늠하는 잣대(shibboleth)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의 문제는 분명하다. 비판 이론은 통일된 개념이 아니며, 그 문헌은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비판이론은 헤겔에서, 다른 비판 이론은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post-structuralism)에서 뿌리를 두며, 복잡한 문장과 불투명한 논증, 모호한 결론이 난무한다. 더군다나, 비판 이론이 오늘날의 문화적 논의에서 극도로 정치화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이 문제를 신뢰할 수 있게 안내해 줄 사람, 특히 기독교적 대안과 응답을 제시해 줄 사람이 절실해졌다. 크리스토퍼 왓킨은 그의 대표작 성경적 비판 이론(Biblical Critical Theory)에서 이러한 공백을 채우려 시도한다.
비판 이론은 두 가지 기본 목적을 가진다. 하나는 인간 주체로서 우리가 경험하고 참여하는 현실이 ‘우연적(contingent)’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통해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고 관계 맺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미셸 푸코로 대표되는 두 가지 흐름 모두 비판 이론의 핵심에는 권력과 조작이 우리가 사는 사회적 구성 세계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전제가 있다. 이런 점에서 비판 이론은 기독교와 일정한 유사성을 가진다. 기독교는 인간의 죄로 인해 세계와 그 인식이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며, 인간은 거짓을 따라 살고 모든 인간관계는 어느 정도 이기심으로 물들어 있다고 본다. 왓킨은 이러한 유사점을 바탕으로 비판 이론에 대해 단순히 “야유”하거나 “환호”하는 접근을 넘어서 보다 성찰적이고 건설적인 길을 모색한다.
왓킨의 작업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는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다. 그의 신국론은 기독교적 비판 이론이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최초이자 최고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신화를 해체하며, 후기 비판이론가들이 “내재적 비판(immanent critique)”이라 부를 방식—로마의 내적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을 활용했다. 그는 성경의 서사를 통해 로마를 상대화하고 복음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거대 해석 틀을 제시했는데, 현대 신학자 존 밀뱅크는 이를 “더 큰 이야기로 덮어쓰기(out-narrating)”라 부른다.
왓킨은 성경적 비판 이론에서도 이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는 성경의 거대한 메타 내러티브를 분석의 틀로 삼아 기독교 교리에서 오늘날 가장 시급한 문제들에 대한 비판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이 책의 많은 내용은 독자들에게 친숙할 수 있다. 창조, 타락, 구속, 완성에 대한 논의는 익숙한 구조를 따르며, 예언서나 지혜서 같은 성경의 장르에 대한 논의도 그러하다. 특히, 왓킨이 예언자들을 성경적 비판 이론의 전범으로 다루는 부분은 탁월하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말하듯,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예언적 상상력은 분명 비판적이다.
그렇다면, 왓킨의 작업이 단지 기존의 성경신학을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비판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핵심은 그가 사용하는 개념인 대각선화(diagonalization)에 있다. 언약적 서사가 이야기의 뼈대를 제공한다면, 대각선화는 분석을 주도하는 원리다. 인간이 종종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개념들을, 성경의 시각에서는 인간이 만든 이분법을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시각으로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이것은 고대부터 내려오는 철학적 문제의 재포장이다. ‘일자와 다자’ ‘존재와 생성’ ‘자유와 결정론’ ‘자율성과 의존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어 왔다. 왓킨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 안에서는 우리가 대립으로 여기는 것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예: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반면 현대 문화는 둘 중 하나를 택하거나, 양자를 불만족스럽게 절충한 ‘제3항(tertium quid, “물고기도 새도 아닌”)’을 만들어낸다. 왓킨은 이러한 절충 대신 복음 안에서 이 대립들이 예상 밖의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십자가다. 타락한 인간은 자비와 정의를 반대 개념으로 보거나 어설프게 절충하려 하지만, 십자가는 양자를 모두 성취한다. 그러나 이는 헬라인과 유대인이 당황해한 것처럼, 믿음의 맥락이 아니고서는 이해 불가능한 방식이다. 성경 전반에서도 이러한 예는 많다. 왓킨은 책의 마지막에서 문화에 대한 태도를 논한다. 서구는 자문화를 보편 규범으로 삼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일부는 모든 문화를 동등하게 본다. 복음은 이 이분법을 거부하며, 인간이 만든 어떤 문화도 절대화하지 않는 초문화적(transcultural) 메시지를 제시한다.
이 책은 복잡한 주제를 다룬 풍성한 저작이며, ‘이 주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식의 비판은 사족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성찰할 만한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책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점은 다소 이상하다. 이는 아마 저자가 프랑스 사상 전공자로서 프랑스 비판 이론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흐름 사이에 유사성이 있으므로 이것이 치명적인 결함은 아니다. 그러나 헤겔-마르크스 계열의 비판 이론은 ‘역사의 변증법적 전개’를 강조하며, 문화의 변화와 왓킨이 말하는 이분법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왓킨이 테리 이글턴이나 발터 벤야민을 자주 인용하는 점에서 이 흐름과의 교류는 분명 있지만, 보다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없다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둘째, 대각선화는 도덕적으로 동등하고 개념적으로 안정된 두 개념 간에서 가장 잘 작동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왓킨은 ‘보수적/점진적 변화’와 ‘진보적/혁명적 변화’를 서로 대응시키지만, 후자는 전자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고통과 피를 초래했음을 감안할 때 두 개념의 도덕적 등가성은 의문스럽다. 또한, ‘정의’나 ‘인종차별’ 같은 개념은 의미에 대한 합의가 없고 논쟁이 격렬하기에, 대각선화를 실제 전략으로 사용하기 어렵다.
셋째, 인간은 복잡하고 일관되지 않은 존재다. 우리는 순수한 개인도, 완전히 공동체에 속한 존재도 아니다. 가족, 직장, 지역사회, 온라인 등 여러 정체성이 중첩되고 때로는 충돌한다. 삶은 단순한 대립쌍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이론적 틀이 유용한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현실의 복잡성을 삭제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왓킨이 브렉시트를 ‘지역주의 대 보편주의’로 나눈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해석이다. 지리적 요인(런던 대 지방), 경제적 조건(세계화의 수혜자 대 피해자), 직업 환경(노마드 노동자 대 정주 노동자), 정치 선호(테크노크라시 대 민주주의) 등 수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슈를 단순화된 범주에 맞추는 것은 오히려 ‘비판적’이지 않다.
또한, 혹자는 왓킨의 대각선화 자체가 결국 그가 주장하지 않으려는 ‘제3의 길’, 즉 자신의 복음주의를 강화하려는 온건한 절충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pp. 19–21 참고).
이 모든 비판은 왓킨의 탁월한 작업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학문적으로 깊이가 있으며, 지적 자극이 넘친다. 이러한 비판은 치명적인 결함을 지적하기보다는, 왓킨 자신이 말하듯 비판 이론에 대한 기독교 내 대화가 계속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책 말미에서 이렇게 밝힌다. “이 작업이 나를 뒤따르는 사람들이 성경적 인물들을 활용하여 복잡한 사회 문제를 치밀하게 분석해 나갈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쉽게 만들어 주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p. 605). 이러한 중요한 작업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라며, 우리는 왓킨의 우아한 저작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출처: Biblical Critical Theory: How the Bible’s Unfolding Story Makes Sense of Modern Life and Cultu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