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있는 세계 홀로코스트 기억 센터, 야드 바셈(Yad Vashem)을 둘러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결국에는 감정에 지쳐버릴 것이다. 고통. 괴로움. 아직 채 백 년도 지나지 않은 과거에 무려 600만의 유대인이 살해된 공포. 아이. 할머니. 젊은이. 노인. 임산부. 불임여성을 가리지 않았다. 현대의 효율성을 상징하는 가스로 살해되어 화장된 사람들. 야드 바셈에서 당신은 그들의 얼굴을 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름. 기억. 당신의 가슴은 결국 찢어질 것이다.
그곳을 떠나기 직전에 아마도 당신 눈에는 부헨발트 수용소를 찍은 큰 사진을 만날 것이다. 1945년 4월 16일에 찍은 사진인데, 세 명의 수감자가 침대 하나에 배당되었고, 침대는 4층 높이로 쌓여 있다. 거기 찍힌 건 사람이라기보다는 해골 위에 붙어 있는 살갗에 불과하다.
사진 속 침대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일곱 번째에 여섯 살 남자의 얼굴이 있다. 나는 제대로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1986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의 얼굴이다. 그의 책 나이트(Night)는 쇼아(Shoah[히브리어로 ‘재앙’ ‘말살’을 뜻하며,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하는 말]), 곧 ‘재앙’을 겪은 그의 체험을 담고 있다.
나이트는 위젤이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경험과 함께 왜 그가 다시는 깊은 잠을 들 수 없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했을 때, 그가 본 것은 불타는 도랑에 던져진 아기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남자, 여자, 아이들이 불에 타서 죽는데도, 어떻게 세상은 이토록 조용할 수 있을까? 위젤은 나치친위대원들이 그의 아버지를 때려죽이는 동안 살려달라는 아버지의 비명을 들었다. 하지만 위젤은 움직일 수 없었고, 그는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했다.
위젤은 이렇게 썼다.
나는 그 밤, 캠프에서의 첫 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밤은 내 인생을 일곱 번 저주받고 일곱 번 봉인된 긴 밤으로 바꿔 놓았다.
나는 그 연기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작은 얼굴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몸은 고요하고 푸르른 하늘 아래에서 화환 모양의 연기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내 신앙을 영원히 태워 없애버린 그 불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과 나의 영혼을 살해하고 나의 꿈을 먼지로 만든 그 순간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런 일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비록 내가 하나님만큼 오래 살도록 저주받았다 하더라도.
결코.
부헨발트에서 어린 소년을 포함한 유대인 수감자 3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을 때, 위젤은 뒤에서 한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자비로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 거야?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침묵. 그날 그들이 목격한 자세한 사항을 여기에 쓰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하다. 그 남자는 다시 물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있냐고요?” 그때 위젤의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고? 바로 여기야. 저 교수대에 같이 매달려 있다.” 그건 위젤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였다. 위젤은 고발자가 되었고, 하나님은 피고인이 되었다.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속에서조차 침묵하는 하나님을 설명할 길이 있을까? 하나님은 죽었을까? 우리가 그를 죽인 걸까? 우리가 그를 재판에 세우고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내린 걸까?
홀로코스트는 서구 문명에 도덕적 혁명을 불러왔다. 역사가 알렉산더 라이리(Alexander Gray Ryrie)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기독교의 잘못된 우선순위가 폭로되었다고 말했다. “진짜 악한 건 음행, 신성모독, 불경함이 아니라 잔혹함, 차별, 살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위젤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의 믿음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홀로코스트는 우리가 가진 악에 대한 기준을 바꾸어 놓았다. 라이리에 따르면, 전쟁 전에까지만 해도 서양 문화에서 가장 강력한 도덕적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이 정한 사랑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판단했다. 하지만 전쟁의 엄청난 비극은 선과 악의 고정된 기준점으로서의 예수를 끌어내렸다.
그럼 예수를 대신해서 새로운 도덕기준으로 등장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돌프 히틀러이다.
라이리는 그가 쓴 Unbelievers: An Emotional History of Doubt(불신자들: 의심의 감정사)에서 “예수를 폄하하는 것만큼이나 히틀러를 칭찬하는 것은 흉악한 짓이 되었다”라고 썼다. “우리 문화에서 십자가와 십자가상 같은 기독교적 이미지가 가졌던 커다란 힘은 거의 다 사라졌다. 한편 나치를 상징하는 갈고리십자가(하켄크로이츠)만큼 강렬한 감정적 충격을 주는 이미지는 없다.”
십자가를 따라서 거리를 행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본다면, 당신은 그냥 별 괴짜들이 다 있네 하면서 어깨를 으쓱할 것이다. 하지만 갈고리십자가를 앞세워 거리를 행진하는 나치를 본다면, 당신은 그들의 존재를 자신, 가족, 그리고 전체 공공질서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분명하게 느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한 말과 행동에 대해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은 자신이 완벽하다고 가장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확실하게 아는 게 하나 있다. 당신은 결코 히틀러를 참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소리 내어 항의할 것이다.
편자 이론
[Horseshoe Theory, 편자의 양쪽 끝처럼, 극좌파와 극우파가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서로 밀접하게 유사하다는 이론_편주]
위젤은 내가 읽은 것 중에서 가장 끔찍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하지만 바실리 그로스만의 서사 소설 Life and Fate(삶과 운명)을 만나기 전까지였다. 2차 세계대전 중 소련에서 유대인 언론인으로 일했던 그로스만은 동부 폴란드의 트레블린카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를 관찰한 최초의 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 책은 한 장면에서 트레블린카 가스실로 갈 사람들 선별 작업 중에 부모와 헤어진 한 아이의 모습을 묘사한다. 나는 그 장면에서 깊은 감정에 휩싸였다. 지금도 눈물 없이는 이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 의사라는 직업상 즉각적인 죽음을 피하는 게 가능했던 한 여자 의사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자신이 의사라고 말하고 죽음을 면하는 대신에 공포에 질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죽음의 순간까지 이어지는 그 끔찍한 모든 과정을 함께했다. 자식이 없었던 그 여자 의사가 죽기 전에 했던 생각은 딱 하나였다: 내가 엄마가 되었구나.
Life and Fate가 묘사하는 나치즘의 사악함은 다른 작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가스실을 짓고 운영하는 그들의 사악함이 얼마나 평범한지,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하는 글을 나는 만난 적이 없다. 또한 그로스만은 소련이 단지 나치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미덕의 모범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작가이자 전쟁 목격자로서 그로스만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Life and Fate는 소련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할 뻔했다. 그로스만은 히틀러와 싸운 스탈린을 칭찬하는 걸 거부했다. 소련은 국가가 명령한 무신론을 통해 하나님을 침묵시키려 했던 것처럼 그로스만의 입도 막고 싶어 했다.
그로스만은 양쪽을 다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악의 기준을 유지했다. 그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단지 좌우 스펙트럼의 양 끝이 아니라 전체주의라는 동일한 악을 반영하는 거울 이미지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들은 이념과 전쟁이라는 차원에서는 불멸의 원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그들은 범죄의 공범이었다. 그들이 공유했던 목표는 자신들의 세계 정복이라는 꿈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것이었다.
그로스만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소련 국가의 사악함을 폭로한 수용소군도의 출간 약 10년 전인 1964년에 사망했다. 소련 수용소에 대한 솔제니친의 충격적인 설명은 왜 단지 “나치가 되지 말라”는 수준의 도덕으로는 악을 멈추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반-나치(Anti-Nazi) 도덕은 우리 내면에 있는 악을 우리 외부의 적들에게로 옮길 뿐이기에 그 실패는 예정된 것이다. 반-나치 도덕성은 나 자신은 성화하고 적은 악마화한다. 단지 히틀러 사후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의롭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내 자리를 피고인에서 판사로 옮겨버린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솔제니친은 사악함을 “외부”에서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보았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선은 국가도 통과하지 않고, 계급이나 정당도 통과하지 않는다. 오로지 모든 인간의 마음 어딘가를 통과할 뿐이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솔제니친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라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허세에 결코 속지 않을 것이다. 푸틴은 그로스만과 그의 어머니의 고향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서는 그 침공을 “탈나치화”라며 정당화했다. 그로스만과 그의 어머니는 나치가 1941년 오크라이나의 베르디치우 수용소에서 자행한 유대인 학살 때 사망했다. 외부 집단을 향해 악을 외재화하는 순간, 우리는 독선에 빠져 스스로를 속인다. 우크라이나 전역의 아파트 단지에 쏟아지는, 푸틴이 날린 로켓이 상기시키는 사실은 이것이다: 모든 종류의 악은 인간의 자기기만 성향을 과소평가할 때 시작된다.
피고석의 하나님
인간이 하나님을 피고로 삼고, 우리 자신을 성화하고 적을 악마화할 때 발생하는 결과를 예상했던 또 한 명의 러시아 작가가 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이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판단할 때 단지 하나님을 우월한 도덕성으로 대체하는 게 아니라고 경고했다. 하나님 대신이 되는 건 무엇이든 가능하다. 우리가 규칙을 만든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는 동생 알료샤와 하나님에 대한 논쟁을 벌인다. 위젤처럼 이반은 무고한 아이들의 고통에서 공포를 느낀다. 위젤처럼 이반은 불의를 허용하는 하나님에게 항의한다.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한다.
그리고 말이야. 진실을 사는 데 필요한 고통의 합계를 메우는 데 아이들의 고통까지 사용되어야 한다면, 나는 진실이라는 것 전체가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가치가 없다고 미리 단언해야겠어.... 자, 네가 피날레에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또 모두에게 평화와 휴식을 주겠다는 목표로 인간의 운명이라는 건물을 짓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자고. 그런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너는 불가피하게, 정말 불가피하게 한 명의 작은 생명체를 고문해야만 해. 그 작은 주먹이 가슴을 칠수록, 네가 짓는 건물은 그 아이의 대답 없는 눈물을 기초로 해서 올라가고 있다고. 그런 상황에서도 너는 그런 건물을 짓는 건축가가 되겠냐고?
도스토옙스키는 이 장을 “반역”이라고 부른다. 당연하다. 이반은 이렇게 말한다. “알료샤, 내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나는 단지 그에게 정중하게 티켓을 돌려줄 뿐이야.” 이건 유명한 대사이다. 그리고 다음 대사만큼 하나님을 반대하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된 적은 없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게 아니야. 난 단지 그가 미울 뿐이야.”
다음 장에서는 이반의 시 “대심문관”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예수를 문자 그대로 증인석에 세운다. 하지만 재판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난다.
대심문관이 침묵하자, 그는 죄수가 대답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대심문관의 침묵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대심문관의 말을 주의 깊게 또 침착하게 듣고 또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죄수를 보았다. 죄수는 분명히 아무것도 반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노인은 죄수가 무언가, 심지어 쓰라리고 끔찍한 말이라도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갑자기 죄수가 침묵 속에서 노인에게 다가가더니 90세 노인의 핏기 없고 마른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것이 그가 했던 대답의 전부였다. 노인은 몸을 떨었다.
침묵, 그리고 키스.
이게 예수님이 할 수 있는 최선인가? 키스하는 거?
왜 하나님은 소리 높여 자신을 변론하지 않는가?
아니, 그는 지금 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그를 비난하며 정의를 요구하는 수많은 외침을 통해서 말이다.
고통 받는 종
창조의 새벽 이전까지 오로지 침묵만이 있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어둠 속에서 말씀하시자, 빛이 있었다(창 1:1-3). 하나님은 밤과 낮을 만드시고, 독수리와 돌고래와 가젤을 만드시고, 그리고 가장 위대한 걸작을 창조하셨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 외에 다른 것은 창조하지 않으셨다(창 1:26). 자신의 형상을 닮은 것은 사람뿐이다. 오직 남자와 여자만 창조하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돌고래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독수리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묻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젤은 용서해야 할지 여부를 고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남자, 여자, 어린이는 예수님을 믿든 창조주로 인정하든 상관없이 모두가 다 그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정의를 요구한다. 자비를 구한다. 우리가 자비로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아기가 불에 타고, 아이들이 홀로 가스실로 들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묻는다. 우리는 엘리 위젤, 바실리 그로스만, 그리고 어둠의 공허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논쟁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짜증 난 십 대들처럼 우리는 “이건 공평하지 않아!” 소리친다.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정의가 항상 이기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건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을 거부했다. 우리 인류는 우리만의 길을 갔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부모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하와는 창조주의 약속이 아니라 뱀의 거짓말을 들었다. 아담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와의 말을 들었다(창 3:17). 이 재앙의 여파로 악이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이제 인간의 이야기는 단조롭게 전개된다. 아담과 하와의 의로운 아들이 질투하는 형에게 살해당했을 때, 즉시 온 땅을 엄습한 건 슬픔이었다. 에덴동산에 어딘가에 소련 굴라그의 씨앗이 심어졌다. 뱀의 거짓말은 쇼아를 예고했다. 인류는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대신에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욥기는 무고한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들려준다. 물론 그 대답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다. 욥은 자신이 견뎌낸 악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한다. 그러나 회오리바람에서 대답하는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는다. 창조주가 그의 창조물에 의해 심판받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욥기 38:2-4)
하지만 욥이 히브리 성경에서 만나는 무고한 고통에 대한 유일한 답은 아니다. 이사야는 가장 위대한 유대인 예언자 중 한 명이었다. 이사야 53:7-9에서 그는 고통 받는 종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 어린양은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 비젤과 도스토옙스키가, 그리고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아는 모든 사람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서, 히브리 성경은 복잡한 대답을 들려준다.
첫째, 우리는 정의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반대할 수 있다.
둘째, 우리에게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목적을 가진 창조주를 비난할 권리가 없다.
셋째, 무고한 종의 고통은 어떻게든 하나님의 백성이 저지른 죄악을 용서한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사 53:5).
구원의 소리
구원의 첫 소리는 예루살렘 외곽 골고다라는 언덕에서 울려 퍼졌다. 여섯 시간에 걸쳐서 우주의 창조주이자 유지자가 로마 십자가에 매달려 천천히 죽어갔다. 창조주와 연대한 땅은 밤의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막 15:33). 그러자 예수님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이 보다 더 깊은 밤은 있을 수 없었다. 이보다 더 깊은 고요는 있을 수 없었다.
예수님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숨을 거뒀다.
아들은 모든 사람에게 우정을 베푸셨지만, 하나님을 위해 말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원수로 삼으셨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었다(마 23:15). 아들의 모든 선행, 모든 치유의 기적에 독선적인 자들은 격노했다. 그들은 예비 재판에서 예수님에게서 단 하나의 범죄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무죄함에 위협을 느낀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은 그의 예언적 음성을 아예 침묵시켰다.
그러고 셋째 날, 다시 해가 떴다. 예루살렘에 빛이 비쳤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인들이 그의 무덤으로 갔다.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귀가 터질 듯했다. 그가 무덤에서 돌을 굴리는 동안 땅이 흔들렸다. 빛은 눈부셨다. “그의 모습은 번개 같았고 그의 옷은 눈처럼 희었습니다”(마 28:2-3). 그가 가지고 온 것은 새로운 창조에 대한 소식이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갔다.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다(고후 5:19).
고린도후서 5:21은 이렇게 증언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대교환(great exchange)”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그는 우리에게 죄 없는 삶의 의를 주신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마 25:23) 하시는 말씀을 듣게 하신다.
하나님은 아들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 학살 소리가 들린다. “다시는(Never again)”이라는 말과는 달리, 친숙한 우크라이나 도시에서는 전쟁 범죄가 이어지고 유럽에서는 또 다른 내전이 벌어진다. [1차 세계전쟁 후에 미래의 전쟁을 막기 위해 창설된_편자 덧붙임] 국제연맹은 마지막 대전[2차 세계대전_편자 덧붙임]을 막을 수 없었다. 국제연합도 이런 전쟁을 막을 수 없다. 긴급 뉴스의 요란한 징소리 위로 우리는 악의 종말을 알리는 나팔의 첫 음표를 듣는다(마 24:31). 그런 다음 부헨발트와 베르디히프의 도살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모든 악한 말이 처벌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모든 아이의 울음소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있다.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아들이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고통은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주었다. 그때의 어린 양은 침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희생은 원래 고발자였던 사탄을 침묵시켰다. 첫 번째 적은 격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그가 마지막 승리자가 될 수는 없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다시 보낼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질 새로운 창조가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기신다(롬 12:21 참조). 그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계 21:5).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모든 믿는 자는 배신당한 입술에 입 맞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더 이상 죽음은 없을 것이다!
애도도 없고, 울음도 없고, 고통도 없다.
또 나는 큰 무리의 음성과 같기도 하고, 큰 물소리와 같기도 하고, 우렁찬 천둥소리와 같기도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분께서 왕권을 잡으셨다”(계 19:6).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요 10:27). 이 사악한 시대의 소음 속에서 그들은 가장 안심시키는 약속을 듣는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 10:28).
그는 당신의 울음소리를 듣고 계신다. 그는 당신의 눈물을 보고 계신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에게 꼭 대답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가 당신에게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었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