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도 내가 만들지 않은 하늘을 보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 하늘은 원하지 않는 소식에 아파했던 어제도, 불안과 방황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철학적 담론을 읽었던 지난 주도, 삶의 답을 찾기는 어렵다는 거장들의 마지막 결론에 위안을 얻었던 지난 날들도, 가뿐하게 비웃는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우리는 그 단 한 번의 내용과 결과를 가지고 영원을 산다. 이 기독교 진리가 생생한 사실로 믿어진다면 삶에 진심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제나 불안하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아 보이며, 거대한 운명의 힘에 떠밀려 흘러가는 인생 속에서 그저 ‘정신적 승리’만이 최선의 삶인 것처럼 느낄 때가 많다. 누구나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지만 실제로는 갖가지 삶의 장벽들에 그저 버텨 내기만 해도 다행이다 싶은 게 현실이다.
오늘날엔 ‘평범함 속에 즐거움 찾기’가 유행이다. 비교문학자 마리나 반 주일렌은 그의 평범하여 찬란한 삶을 향한 찬사에서 이 거대한 시대적 메시지를 체계적으로 연구한다. 그녀는 ‘뛰어난 사람(초인)’을 높게 평가하는 니체 학파의 사상을 비판하며, 쇼펜하우어나 프루스트, 체호프, 톨스토이, 레비나스 들처럼 ‘평범한 삶’을 가치 높게 평가했던 인물들의 사상과 철학을 꼼꼼히 정리했다. 역사 속 좋은 멘토들의 말을 빌려 "사소하고 평범해도, 심지어 하찮아도 당신의 인생은 이미 완전하며 충분히 완벽하다"며 우리를 안심시킨다.
반면 시대를 불문하고 영웅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 전세계의 주목을 받은 <중증외상센터>는 K의학드라마다. 외과 전문의 백강혁이라는 천재적 인물이 존폐 위기에 놓인 중증외상팀에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담았다. 주인공은 자신의 영역에서 효율성의 원리대로 일하는 수많은 전문의들 속에서, 전체를 리드라고 수행할 수 있는 특별한 의료기술자로 그려진다. 모두 회피하는 최전선에서 생명을 살리는 의사, 같은 비전을 품은 최고의 의료진으로 팀을 구성해서 최고의 결과를 보이는 의사, 모두가 포기하고 환자의 사망을 전제로 대책 회의를 하고 있을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단 한 명의 의사, 그게 돈이든 자기위안이든 세상이 떠받치는 효율의 가치가 아니라 비전의 사명 하나로 달리는 천재 의사의 이야기다.
삶은 저마다 소중하다. 그러나 당신은 한계를 인정하고 평범함을 추구하며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 버티는 오늘을 살 것인지, 아니면 쓰러지고 무너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비전을 품은 비범한 인생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갈 것인지 고민한 적이 있는가? 이 두 삶의 가치는 서로 양립하며 함께하는 순간이 어쩌다 있겠지만, 대부분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자리에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 드라마는 그 두 가지 인생의 좁힐 수 없는 격차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쉬지 않고 뛰는 주연들의 모습에 수많은 질문을 하게 되었다.
해와 같이 밝은 얼굴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명력을 뿜어내며 역동적으로 사는 일보다 가치 있는 삶이 있을까? 보이는 모든 일상에 구원의 감격으로 감탄하며 감사하는 것보다 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있을까? 그리고 내가 쓰임 받는 자리에서 행복하게 순종하며 나를 내어놓은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그래서 맡겨 주신 일에 생명을 걸고 몸과 마음을 다하는 일보다 영원에 더 가까운 삶이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러한 최상의 삶에 변명하지 않고 피하지 않는 자가 몇이나 될까? 왜 드라마 속 수많은 의사들 속에서 진짜 사람을 살리려고 결단한 의사는 그토록 적을까? 위험하기 때문에, 생명을 죽이는 실패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만한 대가 없이 몸과 마음이 고단해지는 일이기 때문에, 감당할 만한 건강이 안 되어서, 내 스펙과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 학력과 출신이 최고가 아니기 때문에, 혹은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아니면 너무 많거나 해서, 나의 뇌는 타고난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감이 부족해서, 실패의 경험 때문에, 더 편한 길로 가고자 변명하면서, 우리는 거절을 호소한다.
겸손한 거절은 교만과 허세일 때가 많다. ‘개인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 최고의 악’이라 믿으며, ‘최선이 아닌 차악을 택하는 것이 우리네 불완정한 본성이기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것이 본심인지도 모르겠다. 드라마 속 대부분의 의사들은 현대의 우리 신자들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저 천국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인 사람처럼, 구원의 확신에 대한 고백이 사후 인생의 보험인 것처럼, 매의 눈으로 저울질하며 편의와 선을 행하는 것 사이에서 절대로 손해보지 않게 적당히 타협하는 모습을 잘 그려냈다.
문화의 힘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강력하다. 숨쉬는 존재만으로 충분하고 무위의 삶에도 전혀 죄책감 없는 삶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심리학적 가르침은 어느새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촘촘히 짜여 있다. 대화를 줄이고 홀로 있어야 실수가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은 잠언의 격언을 대체했고, 이성적 사고로 세련되고 도시적인 삶의 방식을 살아야 선교에 유리하다고 믿게 되었다. 개개인의 전문 분야의 학식에 있어서는 성경의 진리도 뚫을 수 없는 철옹성을 세웠고, 논리와 과학으로 무장한 지성인이 교회에서 환영 받게 되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 사상 위에 쌓아 올린 견고한 현대 문화의 숨을 들이키며 태어난 우리 세대는 하나님과 유행하는 사상을 함께 섬겼던 이스라엘 왕국과 다를 바가 없다.
위의 섬세한 비판은 경험자로서 하는 반성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실 때가 있다. 얼마 안 가서 후회할 것이 뻔한 일을 맡기시고 그 안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고 반복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시는 것 같을 때 말이다. 수많은 실패 끝에 얻은 결론은 주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의 엄청난 간격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돌아보니 보잘것없었던 반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늘 더 원대한 계획 속에 있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사명은, 상황이나 환경과는 상관없이 포기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보상도 없는 일에 왜 이렇게까지 수고를 해야 되는가”를 가장 많이 고민했다는 주인공의 대사에 격하게 공감했고, “개같이 구르고 엿같이 깨져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단 하나의 이유”를 찾으라는 그의 조언이 가슴에 박혔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해 본 적이 없으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살후 3:13). 훈계와 징계를 받지 않았던 인생은 하나님 자녀의 인생이라 할 수 없다(히 12:6). 실패만 반복했던 인생도, 유난히 고통 많은 삶도, 가장 아름다운 영원과 맞닿을 수 있다. 단지, ‘계속해서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변하지 않을 한 마디의 진리가 당신 가슴에 박혀 있는가?’의 문제다.
선한 삶의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시 111:10,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기본적인 모양을 만들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과정과 성장의 본질이자 핵심이다. 사실 드라마의 주인공과 같은 실력적 탁월함은 평생에 갖지 못할 확률이 더 크다. 그러나 어두운 그림도 명작이 될 수 있고, 난해한 선율도 훌륭한 완성작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우리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사람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하고 관계하는 삶보다 더 성공적인 인생이 있을까? 죽어 가는 중증환자의 수술을 제자에게 맡기며, “널 믿는 날 믿어!” 외쳤던 스승님의 믿음직한 한마디가 마지막까지 남는다. 하나님이 부족한 나에게 일을 맡겨 주시며 ‘널 믿는 나를 믿어!’ 말씀하신다면 가장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 꿈꾸게 되었다. 어쩌면 어느날 함께 달리고 있는 생명력 넘치는 우리를 그려 보며, Soli Deo glor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