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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번역한 책_믿음이란 무엇인가

번역가가 직접 꺼내 놓는 책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독서에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보태는 길잡이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돌이켜보니 벌써 30년이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번역의 길로 들어선 지가. 회사를 다니면서 첫 단행본을 번역했다.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에 의미 부여하기를 좋아하는 진지한 성격의 내게 회사 생활은 잘 맞지 않았고, 입사 1년차 말 무렵에 제안 받은 번역 일은 잠자는 시간을 쪼개야 했음에도 오히려 활력이 되었다. 그 책은 기독교 세계관 책이었다. 제법 두툼했는데, 마무리는 결국 퇴사를 하고 나서야 할 수 있었다.

그후로 유학을 갈 때까지 거의 20년간 꾸준히 기독교 서적을 번역했고, 그것은 내게 하나의 공부였다. 잘 알아야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잘 아는 것 자체가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앎에는 끝이 없어 보였다.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신학, 기독교 영성…. 내가 번역하고 있는 이런 책들을 쓱쓱 써 내는 그들만큼 알 때까지 나의 믿음도 자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와 반대로 오히려 지식이 믿음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있었다.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오히려 주변에 민폐가 되는 것을 볼 때면, 행동도 아무 행동이어서는 안 되고, 역시 바른 지식에 기반해야 한다고, 그래서 역시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또 반대로, 주변에서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것은 그것 대로 실망이 될 때가 있었다. 지식 자랑 너머의 무엇을 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 탓을 할 수 있는 것도2, 30대의 특권이고, 그 후로는 자신이 탓한 그만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책임이 주어지는 것이 나이 듦의 과제이다.

맞춤하게도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며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번역한 책들의 저자들이 지나갔을 법한 무한 공부의 시기였다. 박사 과정 수업은 지식 자랑의 장이다. 얼마나 활발하게 토론에 참여하는지도 평가 점수에 들어가기 때문에, 뭐라도 한마디 해야 했다. 박사 시험의 과정은 자신이 택한 전문 분야에서 그동안 어떤 식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는지를 섭렵하는 시기로서, 자신의 연구가 그 안에서 의미 있는 발언으로 자리잡게 하는 중요한 기초 작업이다. 그 단계까지 무사히 통과해야 비로소 논문을 쓸 자격이 주어진다. 그래서 논문 자격 시험이라고도 하는데, 말하자면, 우리들 사이에서 너에게도 한마디 할 자격을 주겠다는 표시이다.

나보다 앞서서 논문을 쓰고 있던 다른 학과의 한국인 유학생은, 박사 시험을 볼 때는 산을 오르는 것 같았는데, 논문을 쓰면서는 끝도 없는 사막을 혼자 걷는 기분이라고 했다. 사막이란 어떤 곳인가. 지도도 별 의미 없는, 방향을 잘못 잡았다가는 살아서 나오지 못할 수도 있는 곳이다. 실제로 박사 논문의 사막에서 낙오한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박사 시험까지는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열심히 공부하다가, 논문을 쓰면서는 갑자기 홀로 뚝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길을 내야 하는 이 방식이 좀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학계의 법칙은 어떤 식으로든 기존 연구에 새로운 발견이나 관점으로 자신의 숟가락을 얹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이 과정을 거쳐 마침내 박사 학위를 받고 나면, 그는 최신 연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야말로 자기 분야에서 학계의 업 투 데이트한 동향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도 교수로부터 특이한 말을 들었다. 보통은 이렇게 갓 학위를 받은 반짝반짝한 신진들은 학부 강의부터 시작하고 어느 정도 경력이 주어져야 대학원 수업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그리고 한국에서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박사 학위를 받고 바로 독일로 간 지도 교수는 그곳에서 대학원 강의를 했고, 오히려 기초를 가르쳐야 하는 학부 강의를 경력 있는 나이든 교수들이 한다는 것이었다. 기초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기 분야를 다 섭렵했다고 할 정도의 지식과 경륜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내게 상식을 뒤집는 말로 들렸는데, 실제로 박사 학위를 받고 책도 쓰고 논문도 쓰면서 그 말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박사 공부를 한 사람에게 자기 전공의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는 사실 가장 하기 쉬운 이야기이다. 그것을 기초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개론 수준의 말로 하라고 할 때 오히려 그들은 헤맨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시작해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을 수 있다. 핀 머리에서 천사 몇 명이 춤출 수 있는지를 논하는 데는 능하지만, 애초에 왜 천사들이 그 위에 올라가게 되었는지, 그래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부터 이야기하려면 다시 사막으로 들어간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전에 들어간 사막이 학문의 세계에서 자기 주장의 길 하나를 내기 위해서였다면, 이제 들어선 사막은 자신이 대변하는 전문 분야의 지도를 제대로 그려서 사람들이 보고 그 지형을 파악하게 해줄 수 있느냐를 시험하는 사막이다.

서론이 좀 길었는데, 이렇게 길게 끌고 온 이유는 맥그래스가 믿음을 설명하면서 쓰는 중요한 비유가 바로 지도이기 때문이다. 맥그래스는 이 지도의 비유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C. S. 루이스의 영향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신학의 쓸모에 대해서 쓴 신학이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이들에게(영문판 2022년 출간)에서 맥그래스는 C. S. 루이스를 인용하면서 이 비유를 또 한번 사용했다.

믿음이 어떻게 지도에 비유가 되는가? 정확히 말하면, 그가 지도에 비유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무엇 무엇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할 때의 신조(creed), 혹은 우리에게 더 익숙한 말로는 사도신경을 일컫는다. 그는 “신조는 기독교에서 믿는 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게 도와주는 지도다. 마을과 도시들이 어떻게 도로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 주는 지도와 같다”고 설명한다(57쪽). 그리고 이 신조는, 맥그래스에 의하면, 대략 2세기 말부터 기독교 신앙의 지도 역할을 해오는 중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맥그래스의 믿음이란 무엇인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독교“, 좀 더 직역하자면,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독교 신앙 (Christian Belief for Everyone)”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총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를 유학 생활 중에 번역하였다. (중책자 정도의 크기라서 방학 때에 한권 씩 번역하기 좋았고, 덕분에 생활에도 보탬이 되었다.) 이 시리즈 이전에는 N. T. 라이트의 에브리원 주석 시리즈 몇 권을 번역하였는데, 매우 어려운 공부들을 한 것으로 알려진 대가들이 이렇게 ‘모든 사람’ 혹은 ‘에브리원’을 위해서 책을 쓴 것은 학문뿐만 아니라 신앙 면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학문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위에서 쓴 내용으로 어느 정도 갈음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들이 이렇게 기초적인 책을 쓸 수 있다는 이유는 그만큼 전문 지식도 뛰어나다는 말이다. 하지만 학문의 영역에서는 전문가가 되었다고 누구나 개론서를 쓰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취향이고 적성이라, 계속해서 핀 머리의 천사 수와 같은 전문 영역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도 있고, 그간의 지식을 토대로 이 학문의 지형을 그려보겠노라고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신앙의 영역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히브리어, 헬라어에, 성경 고고학에, 머리카락 한 가닥마저 더 잘게 나누는 치밀하고 복잡한 신학적 개념에 능통한 학자도 결국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지도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으며, 그 지도에 박사 학위 몇 개를 더 얹는다 해도 대학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신조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고백하는 신조이고, 더 많이 공부한다고 이 신조를 더 잘 안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도전은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 세월이 길면 길수록,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능력은 떨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핀 머리의 천사 수 레벨의 기독교 전문 용어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학자와 같아지는 것이다. 맥그래스가 루이스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두 사람 모두 무신론자였다가 기독교 신조라는 지도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각기 자신의 전문 분야인 과학과 문학에서 전문성을 쌓은 학자들이었다. 이는 신조가 어느 가방끈의 길이에서든 지도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맥그래스와 루이스 모두 내가 한번은 번역했던 저자들이다. 아직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공부는 지금도 필요하다. 하지만 나이 탓인지 연륜 탓인지, 분석하고 쪼개고 따지는 공부보다, 이 지도를 들고 한번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동안 걸어온 길도 이 지도를 쫓아온 길이기는 했지만, 풍경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여기가 맞는지 아닌지 지도랑 길을 놓고 대조하고 확인하기에만 바빴던 것 같다. 하지만 맥그래스가 말하듯, “지도는 탐험하고 발견하고,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길을 찾게 도와줄 뿐”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결코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 애초부터 지도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56쪽).

어쩌면 지도는 지도에서 눈을 떼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지도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가 어느 길을 가는 것인지 잘 모른다. 내가 서 있는 주변 환경을 잘 보아야 지도도 잘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길을 잃을까 두려워 지도만 보고 있으면 되려 길을 잘 익히지 못하게 된다. 지도가 믿음직하다면, 가다가 샛길로 빠져볼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골목길이 보이면 그리로 들어가 볼 수도 있고, 심지어 길을 잃어볼 수도 있다. 이 정도의 자유를 과연 나는 알았던가. 기독교를 알고자 해 온 30여년의 번역 세월에 새삼 되묻게 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