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per at Emmaus (Milan), 1606. Brera, Milan/ Public Domain
Supper at Emmaus (Milan), 1606. Brera, Milan/ Public Domain

그리스도인 가운데 영적 삶을 인간의 영이나 성령과만 관계된 것으로 이해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마치 식사 때 주 메뉴와 샐러드가 별도로 나오는 것처럼 영적 삶을 몸과 마음과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체화된(육화된) 몸과 마음과 관계가 없는 영적 삶은 허공을 더듬게 마련이고, 영이 몸과 마음과 상호 작용하지 않을 때, 이 차원들이 지닌 한계와 불완전성을 넘어설 수 없다. 인간의 영적 삶은 체화된 몸을 통해 형성적 상황에 이르며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영만을 이상화하고 몸의 인격은 이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몸과 마음과 영의 상호 작용을 통해 온전한 삶을 형성해 가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따라서 온전한 영적 삶은 체화된 몸의 성숙한 육체성 또는 물질성과 상호 작용 없이 형성할 수 없다. 따라서 탈체화된 영적 삶의 배경에 대한 이해는 건강한 영적 삶을 위해 중요하다.

먼저 탈체화된 영적 삶의 추구는 플라톤 이원론의 영향을 통해 형성된 측면이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몸은 영혼보다 단지 열등한 정도가 아니라 영혼은 진리와 덕을 향해 정진할 때 몸은 실재적으로 방해가 된다. 그에게 인간의 몸은 인간됨에 있어서 부수적이다. 플라톤은 영혼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육체적 욕망이 아니라 몸의 가치를 거부하는 이데아론까지 주장했다. 그는 몸을 어두움의 근원으로 보았고, 영혼 자체를 빛으로 보았다. 그는 몸과 영혼을 반비례 관계로 정식화하였다. 그는 영혼을 빛으로, 몸을 어두움으로 인간 존재를 양극화시켜 놓았다. 그에게는 영혼은 진리의 빛을 비추는 근원이지만 몸은 어두움, 즉 거짓과 기만과 악의 근원이다. 따라서 구원은 영혼이 몸으로부터 자유 또는 탈출하는 것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플라톤이원론의 영향을 받아 영이 진짜 사람이며, 몸은 단지 영을 담은 그릇에 불과하며 감옥이라고 생각했다(피터 모레아, 기독교 인격론, 38-39).

플라톤에게 진리는 ‘알다’와 ‘살다’가 유리된 진리이다. 그에게 진리란 영혼, 즉 이성으로 인식한 개념적 진리이다. 따라서 그에게 체화된 진리 또는 육화된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이나 믿음은 단순한 사고방식이 아닌 삶의 방식이 되게 하는 것이다(Ludwig 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73).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 진리는 바른 개념적 진리를 넘어 육화된 삶을 형성하는 데 있다. 플라톤적 진리의 관점은 예수의 성육신 진리에 부정적이다. 플라톤적 진리는 탈체화된 것이지만, 기독교의 진리는 체화된 또는 육화된 진리이다.

둘째, 탈체화된 영적 삶의 이해, 특히 몸에 대한 부정적 관점은 과학 문명이 발달 되지 않았던 고대 사회 환경 속에서 몸의 부정적 경험과도 관계되어 형성된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활공간과 환경이 매우 취약하였다. 현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하였다. 그들은 온 식구가 한 공간을 사용하면서 가축과 동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하여 그들은 신체적 질병에 많이 노출되었다. 그들은 치명적인 질병을 날마다 목격하였다. 고대 사람들은 신체 부위를 잃은 경우가 많아서 공적인 기록에서 기형의 신체 모습과 상처로 개인의 신분을 확인할 정도였다. 게다가 고대인들은 현대인들처럼 치아를 관리할 수 없어 치아가 빠져 음식물을 씹을 수 없었고, 이는 영양실조와 조기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 고대인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오는 고통과 사망의 원인은 몸의 연약성과 취약성 때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었다.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수명이 훨씬 더 짧았을 뿐 아니라 질병과 사고에 더욱 취약했다. 고대 로마 세계에서 인간의 평균 수명은 30세 이하였다(로드니 클랩, 사람을 위한 영성, 36-37). 인간 몸의 연약성이 아주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인간의 몸은 삶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실체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고대의 종교와 철학은 몸에 대한 긍정적 사유보다는 부정적 사유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인들의 이런 환경에서 형성된 몸에 대한 부정적 사유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초대 기독교 사상은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현대 그리스도인들보다 취약한 신체를 날마다 생생하게 목격하였다. 따라서 몸에 대한 부정적 사유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셋째, 탈체화된 영적 삶의 추구는 물질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발생한 요인도 있다. 이러한 왜곡된 이해는 물질성(materiality)을 물질주의(materialism)와 혼동해서 발생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영적 삶은 몸의 성숙한 물질성과 분리되어 형성될 수 없다. 월터 브루그만은 기독교의 신앙과 물질성의 관계를 두 가지 요인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하나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세상에 성육신하셔서 지극히 물질적인 종류의 선한 일을 행하셨다. 예를 들어, 병자를 치유하고, 눈먼 자를 치유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했다. 따라서 성숙한 물질성은 인간 몸에 대한 성숙한 시각을 지닌다. 그는 몸의 성숙한 물질성을 배척한 영성, 즉 영적 삶은 공공 영역에서 지속되고 잔인한 육체적 현실을 올바로 판단할 능력을 기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는 성숙한 물질성이 적용되는 인생의 다섯 가지 큰 영역, 즉 돈, 음식, 몸, 시간, 장소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몸의 성숙한 물질성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그는 미국의 역사 속에서 흑인들의 몸이 흠집을 당한 몸으로 전락했고, 그런 흠집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파괴와 피조물이 품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몸에 대한 이런 잔인한 강탈은 노예 해방령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이런 강탈은 경찰의 무자비한 행위, 금융 조작, 투표자 억압을 통해 계속되고 있다”(월터 브루그만, 완전한 풍요, 9, 63). 이런 맥락에서 건강한 영적 삶은 몸의 성숙한 물질성에 대한 이해 없이 형성할 수 없다.

넷째, 탈체화된 영적 삶의 이해는 성경의 나오는 육, 육신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 사르크(sarx)의 비의적(esoteric) 표현의 왜곡된 이해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신약 성경에서만 150곳 넘게 등장하는 사르크는 잘못된 욕구와 탐욕, 그리고 죄성을 지닌 인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르크가 육, 육신 등과 같은 비의적 용어로 표현되고 있으므로 육, 육신을 몸이나 육체와 같은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육, 육신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 사르크는 몸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영으로 형성된 인간과 삶,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지 않은 인간, 성숙함이 없는 삶, 잘못된 인간의 욕구와 탐욕 등과 관계된다. 사르크는 몸과만 관련된 표징이 아니라 고발, 정죄, 분노, 율법주의, 자기 정당화, 독선 등을 표징한다.

나아가 탈체화된 영적 삶의 이해는 로마서 등에서 몸에 대한 비의적 표현 때문에 발생한 원인도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롬 8:10)이라고 말한 비의적 표현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이 표현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바울은 우리 몸이 죄로 인해 죽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영은 의로 인하여 산 바로 그때조차도 몸은 죄로 죽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바울은 로마서에서 몸(soma)을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그는 육체적 존재에 대해 말할 때 이 단어를 쓰고 있다. 예를 들어, 로마서에서 바울은 동성애로 몸을 더럽히는 사람들(롬 1:24-27)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리고 우리 몸이 얼마나 많은 지체로 되어 있는지를 말하면서 몸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롬 12:4). 다음은 바울은 몸을 공동체적 실체(corporate entity)로 사용한다.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 두 가지 방식과는 다른 제3의 방식으로 몸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바로 로마서 6:6에서 사용하는 몸이다. 여기서 바울은 죄와 몸의 죽음과의 관계를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도 죄와 죽음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로마서 6:6의 죄와 몸의 죽음의 관계가 로마서 8:10의 ‘죽음의 몸’ 또는 ‘죽은 몸’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로버트 멀홀랜드, 예수를 닮아가는 영성 여행 길라잡이, 158-59). 따라서 바울이 표현한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 즉 ‘죽은 몸’은 몸 자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해한 옛 습관, 깊이 배어든 폐쇄적인 태도, 말썽을 일으키고 피해를 주는 관점, 파괴적인 대인관계, 세상에 대응하고 반응하는 불건전한 방식을 의미한다.

바울 서신의 육, 육신 등과 같은 비의적 표현 때문에 바울에게 플라톤의 이원론이 나타난다는 견해는 자주 제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든 클락은 바울이 사용한 육신이라는 용어를 육체라는 의미로 부주의하게 읽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는 바울이 사용한 육신이란 용어는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그가 육체를 의미하지 않고,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죄 본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고 하였다(Gordon Maddon Clark, Thales to Dewey, 192). 어떠한 경우라도 물질 자체에 내재하는 악에 관한 교리가 바울에게는 없다. 따라서 바울이 사용한 육신이란 용어는 몸 자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몸은 소중한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인격적 특성과 삶을 지시하는 몸과 마음과 영과 같은 용어는 분리될 수 있는 실체나 부분(part)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양상(aspect)을 의미한다. 즉, 인간 삶의 형태와 차원의 특성을 묘사하는 용어들이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과 육체’를 통해서도 하나님과 교제하였다(시 84:1). 인간의 영만 하나님과의 관계된 인격이 아니다. 몸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인격이다.

교회 역사에서 몸의 부정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왜곡하는 영적 실천, 즉 극단적 금욕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일부 사막의 교부들은 몸이 영혼에 방해가 되므로 몸을 죽여야 한다는 믿음에서 몸을 괴롭히는 극단적 금욕을 실천했다. 기둥 위의 성자로 알려진 시므온(Simeon of Stylites)은 죽을 때까지 30년 동안 약 1.8 미터 높이의 기둥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몸을 괴롭히는 극단적 금욕은 몸만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도 병들게 한다. 장 피에르 드 코사드는 악착같이 자아를 죽이려고 하는 영혼일수록 “그 금욕의 행위 속에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Jean-Pierre de Caussade, The Sacrament of the Present Moment, xvii). 따라서 몸을 무시하는 영적 삶의 추구는 오히려 영의 성숙한 영성까지 무너지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