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리더는 드물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아예 멸종한 거 같다. 조 리그니가 최근에 낸 Leadership and Emotional Sabotage(리더십과 감정적 자기 파괴)는 리더십 실종이라는 전염병의 영적인 이유를 파헤치고 치료법을 추천한다.
리그니는 에드윈 프리드먼의 책 A Failure of Nerve(‘결단력의 붕괴)를 요약하며 논지를 시작한다. 프리드먼의 이론에 따르면 잠재적 리더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군중의 압력에 맞서려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리더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고 특정 집단의 방향을 설정해야 할 사람이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감정적 변화에 너무 얽매이다보면 결국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마비상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인기 없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에도 지지자들이 화를 낼까봐 전전긍긍하기 일쑤이다. 결국 집단 전체가 사소한 싸움의 장으로 전락한다. 효과적인 리더십 발휘를 원하는 리더라면 프리드먼이 “차별화”라고 부른 자질을 키워야 한다. 프리드먼이 “제대로 차별화된 리더”라고 부르는 사람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말하는 리더는 분리되어서도 여전히 연결되어 있기에 변화하고, 불안하지 않으며, 때로는 도전적인 존재감까지 유지할 수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자동적인 반응에 대한 흔들리지 않게 자신의 반응성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 따라서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할 수 있는 사람이다.[1]
다시 말해, 감정이 고조될 때에도 제대로 차별화된 리더는 자신의 주장을 고수한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측면에서 공격을 받을 수 있지만,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무조건 반응하는 대신에 행동한다. 데이비 크로켓[미국의 군인, 정치가로서 미합중국 텍사스 독립을 지지했고 알라모 전투에서 전사했다_역자]처럼 그는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알기에 계속 나아간다.
리그니의 책은 프리드먼의 생각을 성경적 용어를 전환해서 확장한다. 예를 들어, 그는 “차별화”를 “절제된 마음”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리더를 향해서 책임을 지고, 명확하게 생각하고, 감정적 혼란과 방해를 피하라고 촉구한다. 이것이 지금 세상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리더가 되는 방법이다.
나는 리그니의 주장 대부분에 동의하지만, 그는 우리 시대에 차별화, 다른 말로 리더십을 어렵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에 관해서 애매하게 말한다. 물론 내가 말하는 건 트위터이다.[2] 리그니가 책에서 묘사한 방식의 리더가 되려면 트위터 사용을 중단해야 한다.[3]
책 초반에서 소셜 미디어를 언급하며 리그니는 그런 기술이 “인간의 영적, 사회적 병을 증폭시키고 강화한다”고 인정한다.[4] 하지만 그는 문제가 단지 “트위터, 페이스북, 케이블 뉴스보다 더 깊다”라고 말한다. 소셜 미디어가 우리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는 그의 말은 맞다. 소셜 미디어 계정을 삭제해도 우리는 여전히 죄와 씨름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트위터와 다른 소셜 미디어의 사용은 사람을 훌륭한 리더로 만드는 자질을 갉아먹는다. 트위터에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사람은 냉정하기 힘들어지고 점점 더 차별화된 인간이 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리그니는 프리드만이 정의한 차별화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 차별화는 단지 존재의 상태보다는 삶의 방향을 의미한다.
• 차별화는 강렬한 감정 상태에서도 명확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 차별화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주장할 때 “나”를 말하는 것이다.
• 차별화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자동적으로 나오는 자신의 반응을 억제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양극화를 피하는 능력이 포함된다.
• 차별화는 불안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불안하지 않은 존재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 차별화는 하나가 끝나고 다른 하나가 시작되는 곳을 아는 것이다.
• 차별화는 시스템이 자동적으로 유발하는 감정적 도미노의 하나가 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다.
• 차별화는 자신의 개인적 가치와 목표에 대해서 명확히 하는 것이다.
• 차별화는 타인 또는 상황을 비난하기보다는 감정적 존재로서의 자신과 또한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 최대한의 책임을 지는 것이다.[5]
트위터를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트위터가 뭔지 설명하고 싶다면, 이 목록을 뒤집어서 “차별화”를 “트위터”로 바꾸는 것보다 더 명확하게 알려주는 길도 없다. “트위터를 사용한다는 것은 삶의 방향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를 의미한다.” “트위터를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가 끝나고 다른 하나가 시작되는 곳을 알 수 없는 것이다.” “트위터를 사용한다는 것은 감정적 존재로서의 자신과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지는 대신에 타인이나 상황을 비난하는 것이다.” 트위터보다 더 끔찍하게 사람의 명확한 사고 능력을 직접적으로 방해하는 활동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신은 어쩌면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을 수도 있다. 트위터에서 기분 좋게 스크롤하다가 갑자기 짜증나는 트윗을 발견했다. 뭔가 한마디 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지만, 다행히 안 그러기로 했다(어차피 그 트윗에는 ‘좋아요’가 세 개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는 계속 스크롤했다. 다른 트윗을 계속 보면서 조금 전 트윗의 내용은 점차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런데도 그로 인한 짜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식의 과정이 몇 번 반복하면, 여러 번의 짜증이 결국에는 분노의 매듭으로 합쳐져서 분출된다. 그리고 왜 그런 분노가 터지는지 정확한 이유나 대상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내 마음속 어딘가에 그 감정은 자리 잡는다. 스크롤을 많이 할수록 분노의 매듭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마침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진술(“2024년은 허리케인이라는 측면에서 나쁜 해였다”)조차도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느껴지면서, “이거 문제가 있는데? 당장에라도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잖아?” 하는 식으로 생각한다.
이런 식의 경험은 트위터의 디자인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짧은 게시물과 끝없는 타임라인의 조합은 발표, 진술, 불만, 비판, 순수한 분노의 회오리를 만들어내도록 한다. 문제는 거기에 그 속에는 아무런 맥락이 없다는 사실이다. 트윗의 양이 너무 많아서 각각의 진술을 신중하게 고려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시간을 들여서 잘 보더라도, 이미 토론이 진행된 상태에서는 뒤처지기 마련이다. 어떻게든 트윗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사용자는 게속해서 “좋아요”를 누르거나 리트윗한다. 또는 동의하지 않는 진술은 무시하고 지나가거나 화가 나서 답글을 남긴다. 대화는 주제에서 주제로 쉼 없이 옮겨가며 오로지 감정(보통 분노)만이 유일하게 불변하는 것으로 남는다.
다른 소셜 미디어와 마찬가지로 트위터는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사용자를 속인다. 단어, 이미지, 비디오 및 하이퍼링크가 사용자의 시야를 가린다. 마치 웅덩이에 반사된 도시 불빛처럼 세상 자체가 눈앞에 있는 것 같은 환상을 준다. 이야기의 흐름이 끝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모든 게 기본적으로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장 활동적인 트위터 사용자는 모두 다 놀라울 정도로 비슷비슷하며 사회적 논평과 정치에 관심이 많다. 그들은 서로를 팔로우하고 서로를 위해 게시하며 나머지 삶은 거의 무시된다. 로빈 슬로안은 “트위터가 생략하는 양은 놀랍다. 다른 어떤 소셜 플랫폼보다도 인간의 경험과 노력의 방대한 영역에 무관심하다” 말한다.[6] 여기서 핵심 단어는 “무관심”이다. 트위터에도 요리 영상, 미술품, 고양이 사진, 시, 재치 있는 말장난 등등 다양한 내용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논쟁이 불가능하기에 금방 사라진다.[7]
타임라인에 있는 모두가 같은 주제를 이야기할 때,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는 압력은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거기에 따른 보상은 사람을 취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바이럴이 될 만한 재치 있는 트윗을 하나 날린 날이면,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을 수도 있다(중학생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웃음을 유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조롱한 것을 다시 조롱하는 것이다.) “오늘의 분노”에 참여하는 대신에 고양이 사진을 게시한다고 생각해보자. 그 순간 트위터에 대한 당신의 기여는 무시되거나 그 자체로 단지 사회적 댓글의 하나로만 간주된다. “아니, 어떻게 지금 같은 시점에 해피 뉴이어 같은 사진을 공유하는 거지? 이 여자는 지금 뉴올리언스에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모르는 거야?”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분노에 휘말리지 않아. 나는 결코 시스템이 일으키는 감정적 도미노 중 하나가 아니야. 사실 나는 트위터에서 일종의 오피니언 리더니까. 내 팔로워들은 불안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불안하지 않은 모습을 유지하기를 바라거든.” 하지만 나는 당신이 이미 사기에 걸렸다고, 유감스럽지만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은 최악의 종류의 바보이다. 왜 최악이냐? 자신이 무엇을 상대하는지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 매체가 발명되었을 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쇠렌 키르케고르가 “언론”과 “대중”이라고 부른, 바로 그것이었다. 언론은 정보를 멀리 퍼뜨리고 대중은 앉아서 그것을 받아들인다. 대중은 자신들이 정보를 안다고 믿지만, 자신들이 들은 사건과는 그 어떤 실제적이거나 의미 있는 관계가 없는, 단지 실제 사건에서부터 떨어진 관중에 불과하다.[8] 지금과 같은 “뉴미디어” 시대에, 관중들은 정보에 참여하고, 그것을 반복하고, 해석하고, 심지어 기여하기도 한다. 문제는 참여하는 데에 너무 정신이 없는 바람에 여전히 사건으로부터 떨어진, 초연한 상태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트위터에서는 단순한 리트윗조차 마치 용감한 행동, 또는 특정 입장의 표명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모두 공허한 몸짓일 뿐이다. 당신의 용기는 SNS라는 플랫폼의 다른 모든 것과 섞여서 삼켜진다. 이미 멀리 또 널리 퍼져나가 이미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그리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혹평을 받을 뿐이다. 결국 당신의 용기는 맥락을 완전히 잃은 채 누군가가 자신의 의견을 입증하는 데 사용되는, 또 하나의 디지털 바이트로 전락한다. 더그 윌슨은 목사들이 트위터를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는 건 폭도에 맞서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트위터에서는 당신도 폭도이다. 무엇을 말하든, 어떻게 말하든 당신의 말은 불을 더 지피는 연료일 뿐이다.
지금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내가 트위터 계정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트위터에 접속했을 거다. 인정한다. 나도 계정이 있다. 나는 주로 읽기만 하는 사람으로서 10년 동안 트위터를 사용했다. 2020년에 나는 아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팔로우를 취소했는데, 이건 마치 정신 건강과 관련해서 살 빼려는 사람이 뚱보 캠프(Fat Camp)에 가입하는 것과 똑같은 문제였다. 지금은 오로지 두 가지 목적으로만 트위터를 사용한다. 1) 지역 기상 캐스터와 같은 특정 사용자의 타임라인 확인, 2) 뻔뻔한 자기 홍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에 게시되지 않는 한 공지를 보지 못한다. 그래도 그런 추세가 역전될 때까지는 내가 살아있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내가 만든 잡지 좀 보세요!)
주류 미디어가 자유 낙하 상태에 들어간 건 이미 오래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다 도대체 우물이 바닥이 어디인지를 궁금해 한다. 긴급 뉴스가 트위터에 가장 먼저 올라온다고 자랑하는 새 미디어 옹호자의 말은 옳다. 많은 뉴스 매체가 온라인 정보를 그저 앵무새처럼 따라한다. 그래서 나는 리더들이라면 소셜 미디어를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도무지 그럴 수 없다. 대신에 리더라면 소셜 미디어에서 모든 사람을 언팔로우하고 절대 그 어떤 토론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을 공식 정책으로 삼기를 권장한다. 특정 출처에서 수집하는 정보라는 측면에서만 소셜 미디어를 사용해야 한다. 가다라 해안의 악마를 믿는 수준으로만 소셜 미디어를 신뢰해야 한다. 트위터를 꼭 사용해야 한다면, 프리드먼의 용어를 빌릴 때,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은 열 배 더 노력해야 한다.
리그니는 정확하게 옳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죄이다. 선한 사람이 홍등가를 떠나거나 부정직한 회사를 그만두는 건 자신의 죄악 본성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리더를 어지럽게 하는 죄가 소셜 미디어로 인해서 악화된다. 리더가 되고자 하는 이에게 소셜 미디어는 최악의 훈련장이다.
1. Edwin Friedman, quoted in Joe Rigney, Leadership and Emotional Sabotage (Canon Press, Kindle Edition), 9.
2.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 이름을 X로 바꾼 건 알지만, 그 이름은 멍청하다. 지금 이 글에 사용하면 더 혼란만 줄 것이다.
3. 정말로, 이건 모든 소셜 미디어에 해당한다. 트위터는 내가 가장 많은 경험을 한 곳이다. 약 4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트위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인터넷의 변이 속도를 감안하면,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으리라고 본다.
4. Rigney, 12.
5. Rigney, 10.
6. Robin Sloan, “The Lost Thread”
7. 이를 입증하는 게 바로 그 유명한 드레스 색 논쟁이다.
8. See L. M. Sacasas, “To Act, or Not to Act on Social Media,” in The Frailest Thing: Sacasas가 키르케고르의 용어들을 이 글에서 잘 정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