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by Dorothée QUENNESSO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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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한국 상황은 한마디로 ‘혼란’이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의료 등 전 분야에서 갈등과 분열이 극심해지고 있다. 요동치는 파도 속에서 배가 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복원력이 있기 때문이다. 복원력이란 배가 중심을 잃어도 오뚝이처럼 다시 중심을 잡고 일어나는 능력을 말한다. 2025년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한국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국 교회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거대한 배가 중심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복원력을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총 7번에 걸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며, 한국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본질적인 대안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_필자 이인호

로마에 갔더니 사람들이 건널목에서 신호등을 무시하고 무단횡단을 했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냥 사람들을 따라서 신호등을 무시하고 건넜다. 그러다가 독일에 갔는데 거기선 모든 사람들이 신호등을 지키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했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다. 우리는 공기처럼 문화를 숨 쉬며, 그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사는 곳이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네가 어디 사는지를 안다”고 하신다.

종교적인 싸움에서 이기고, 문화적인 싸움에서 지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계 2:13). 주님은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이 어떤 데서 사는지 아신다고 하시며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고 말씀하신다. 한마디로, 주님은 그들이 사는 곳의 영적인 문화를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사는 도시 버가모는 로마 제국 아시아 속주의 주도였다. 로마황제 셋을 숭배하는 신전들, 아우구스투스신전, 트라야누스신전, 세베투스신전이 있는 도시였다. 이 도시는 그만큼 황제 숭배의 압박이 강력한 곳이었다. 이 도시에는 그리스-로마의 4대 신전, 우스 신전과 아테네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도 있었다. 이처럼 버가모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였다. 더불어 이 도시에는 당시에 매우 유명했던 도서관도 있었다. 버가모는 사상적으로도 그 시대의 세속 철학과 학문이 막강한 진을 구축하고 있던 도시였다. 이런 사실로 보건대, 우리는 이 도시, 버가모의 영적인 문화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주님께서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고 하신 것은, 이 도시가 그만큼 영적인 세력이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칭찬: 신앙의 싸움을 이기다

앞서 에베소 교회의 수고와 인내를, 서머나 교회의 환란과 궁핍을 아신다고 하신 주님께서 이제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는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주를 섬기는지를 아신다며 칭찬하신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가 순교한 교회였다. 종교적인 핍박을 받고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교회였다. 주님께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그들을 칭찬하셨다.

  주님의 책망: 문화의 싸움에서 지다

그러나 칭찬 뒤에 책망이 이어진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였다. 싯딤에서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바알브올을 제사하는 데 가담했다. 이 일로 인해서 그들에게 염병이 일어나 많은 이스라엘이 백성이 죽임을 당했다(민수기 25장). 그 옛날 광야의 이스라엘이 발람을 따랐던 것처럼, 버가모 교회 안에 ‘니골라’를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그 “니골라당”은 우상숭배와 음란의 도시 버가모의 문화와 타협한 교리(“교훈”)를 주장했다. “발람의 교훈”에 넘어간 이스라엘이 가나안 문화와 타협하여 행음하고 우상숭배에 빠졌듯이, “니골라당의 교훈”에 넘어간 버가모 교인들은 그 도시의 음란한 문화의 영향을 받아 역시 쾌락과 음란, 우상숭배에 빠져들었다.

순교를 각오한 믿음으로 죽음의 핍박을 이겨낸 버가모 교회가 음란한 그 시대의 문화, 세속적인 그 시대의 사상에 휩쓸려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적인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문화적인 싸움에서 진 것이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예배 사수, 동성애 반대, 낙태 반대, 주일성수 등 굵직한 것들은 목숨 걸고 투쟁한다. 그런데 가치관은 세상과 비슷해지고 있다. 한국 사회의 현세적 물질주의의 모습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다. 출세지상주의, 소비주의, 쾌락주의가 교회 안에도 만연해 있다. 문화적인 싸움, 사상적인 싸움에서 밀리고 있는 것이다.

문화의 힘을 얕보다가 그 문화에 넘어간 사람이 있다. 삼손이다. 그는 성령 충만했다. 그에게는 누구도 당해낼 수가 없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늘 블레셋 도시를 가까이했고, 블레셋 여인들을 좋아했다. 그는 블레셋 여인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갔고, 결국 머리를 깎이고 힘을 잃어버렸다. 세속문화의 힘에 당한 것이다. 블레셋은 들릴라를 5,500세겔로 매수했다. 그 돈은 대략 약 200억 원이다. 200억 원으로 거대한 군사에 투자한 게 아니다. 삼손을 유혹하는 작전에 투자한 것이다.

세상이 사람들의 영혼을 유혹하려고 세속적인 문화에 200억, 2천억, 2조원을 쏟아 붓고 있다. 교육, 미디어, 여행, 취미, 소비 등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들만의 문화를 구축하고 있다. 특별히 이 시대의 방송, 문화 등은 10대, 20대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교육, 사상에서도 아이들을 붙잡으려고 엄청난 투자를 하고 사람들을 양성한다. 황사가 몰려와 공기를 뿌옇게 만드는 것처럼, 혼탁한 문화의 공기가 이 시대를 뿌옇게 물들이고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앞에 닥친 싸움이다.

세속 문화에 맞설 대항문화를 만들라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 자녀를 지킬까? 세속문화에 맞설 대항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사무엘을 지킨 문화의 힘

삼손과 거의 비슷한 사시시대 말기에 사사 사무엘이 있었다. 삼손과 달리 사무엘은 어떻게 그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을까?

사무엘은 그 어머니의 기도 가운데 잉태되어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드려져서 성소에서 자랐다. 거기서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제사장에게서 말씀을 배우며 주의 음성을 듣는 말씀의 사람으로 자랐다. 사무엘은 그 시대와는 다른 영적인 문화에서 자라난 것이다. 삼손도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 ‘나실인’이었지만 대조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결국 사무엘은 경건한 문화 속에서 어려서부터 말씀으로 양육되어, 말씀으로 그 시대를 깨우는 선지자가 된 것이다.

  우리 자녀를 지키는 문화

우리가 자녀들에게 해주어야 할 중요한 것은 바로 아이들이 기독교적인 문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배우는 환경 속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 한나와 성소의 대제사장이 협력하여 사무엘을 양육하였듯이, 우리도 교회와 가정이 힘을 합해서 다음세대를 키워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주일마다 부모와 손잡고 교회 오고, 다른 친구들과 예배 드리고, 선생님에게 말씀 배우고, 교회 마당에서 뛰어놓고, 수련회나 특별새벽부흥회에 참여하고, 그렇게 해서 아이들에게 시각적으로 체험적으로 기독교적인 문화 속에서 숨 쉬게 해야 한다. 그리고 자녀의 신앙교육을 가정과 교회가 연합해서 해야 한다.

세상은 우리 아이들 사로잡으려고 게임 하나, 영화 한편 만드는 데 수백씩, 수천억씩 투자한다. 우리가 다음세대를 지키려면 우리도 온 힘을 다해 문화적으로 이에 맞서야 한다. 이 버가모 같은 세상에서 사무엘, 다윗 같은 인물을 꿈꾸면서 이 시대를 이겨 나갔으면 좋겠다.

말씀으로 돌아가라

오늘 우리가 이 시대의 세속 문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경고

오늘 주님은 그 시대의 음란한 문화에 동화되어가는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 경고의 말씀을 하신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6).

주님이 오셔서 이 버가모 교회에 들어온 니골라당과 친히 싸우시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그 싸우는 무기가 “내 입의 검”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그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과 친히 싸우신다는 것이다.

  그들을 용납하지 말고 미워하고 대적하라

주님이 그들과 싸우신다는 것은 그들을 미워하고 대적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결코 그들을 용납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발람을 따라간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를 하게 되었고, 무려 2만 4000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발람을 얼마나 미워하셨을까? 결국 하나님은 발람을 칼로 쳐죽이셨다(민 31:8).

이처럼 주님은 성도를 꾀어 파멸로 이끄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미워하신다. 그들을 아량으로 놔둘게 아니란 것이다. 친히 당신의 검으로, 당신의 말씀으로 그들을 죽이실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교회 안에 그들을 용납하는 그 모습에서 돌아서라는 것이다. 버가모 교회는 지금 니골라당의 가르침에 맞서 싸우지 않고 있다. 앞에서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했다(계 2:6). 그런데 버가모 교회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종교적인 핍박에 대해서는 목숨 걸고 저항하고 맞서 싸웠던 버가모 교회가 니골라당에 대해서는 내버려두고 용납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대의 사상에 물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회개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들을 용납하지 말고 단호하게 맞서 싸우라 하신 것이다.

  말씀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라

그러면 그들에 맞서 어떻게 싸울까? 주님은 말씀의 검으로 싸우라 하신다. “입에서 나오는 검”은 곧 말씀이다. 말씀의 검으로 싸우시는 당신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 하신다.

예수님이 그 입에서 나오는 날선 검으로 심판하시는 날은 마지막 재림의 날이다. 그때 세상을 심판하실 그리스도가 지금 미리 이 버가모 교회에 와 계신다. 예수님은 장차 오셔서 바로 이 날카로운 검 같은 말씀으로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먼저 교회 안에 와 계신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이 날선 검 같은 말씀을 소유하고 그 말씀으로 새로워지길 주님은 원하신다. 주님이 오셔서 심판하기 전에, 먼저 그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교묘히 숨어 들어있는 발람의 교훈을 제거하고 거룩해지길 원하신다.

히브리서는 그 날선 검인 말씀의 예리함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그날에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칼날은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 판단한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의 행위들이 그 동기와 뜻까지 다 낱낱이 드러난다. 우리의 모든 숨은 죄와 생각까지 다 드러낸다.

주님은 교회가 우리 가운데 스며들어온 교묘한 문화적인, 사상적인 죄악들을 말씀으로 분별하고, 도려내고 거룩해지길 원하신다. 훗날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먼저 그 예리한 말씀의 칼날로 우리 자신을 수술하고 변화되길 원하신다. 주님은 교회는 바로 이런 날선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유하고 그것으로 악한 시대와 싸워야한다고 말씀하신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본질은 ‘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예수님이 말씀이시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늘 말씀을 읽고 가르치고 권면하였다. 기독교의 생명은 바로 이 말씀에 있다. 중세 로마가톨릭이 모든 제도와 전통으로 이 말씀을 가릴 때 교회의 암흑기가 왔다.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고 출간하여 이 성경이 사람들이 손에 들려져 읽히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로마가톨릭은 평신도들이 성경을 마음대로 읽고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면서 성경보급을 금지했다. 개신교는 그들이 위험하다는 바로 그 말씀 위에서 세워지고 부흥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다시 교회가 말씀을 덮어 놓고 전통과 습관을 앞세운다면 교회는 또 다시 암흑기로 돌라갈 것이다. 기억하자. 교회의 힘과 정체성은 말씀에 있다. 

세상의 문화를 이길 힘은 오직 말씀에 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계 2:17).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감추었던 만나”는 무엇일까? 만나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렸던 양식이다. 그들은 그것을 먹고 생존했다. 이처럼 오늘 우리가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먹고 살아갈 참된 떡은 무엇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감춘 만나라고 했을까?

우리는 단순히 이 성경이 만나요, 말씀을 읽으면 만나를 먹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만나는 성경의 문자와 율법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기도하면서 연구하고 묵상할 때에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분을 알아가게 된다.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성장하게 된다. 이렇게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감추었던 만나를 먹는 것이다. 이 떡이 우리를 참으로 배부르게 하고, 기쁘게 하고 만족하게 한다. 영혼에 힘을 얻고, 기쁨이 주어지고, 영적 생명이 살아난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니골라당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을 게을리 하고 아침마다 유튜브를 묵상하고 드라마를 묵상하고 웹툰을 묵상하고 그러면 마음에 세상적인 가치관이 자리 잡는다. 영적 식욕이 줄고, 세상의 것을 사랑하며 변질된다.

  흰 돌을 주신다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 “흰 돌”은 잔치에 들어올 수 있는 표식 같은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많다. 결국 이렇게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그 날에 천국에 들어갈 입장권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새 이름이 무엇인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 흰 돌이 우리 거듭난 신자의 새 이름이라는 견해이다. 이름이란 것은 하나의 인격을 상징한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곧 그의 존재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과 같다. 이처럼 그날에 우리에게 새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곧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날에 그곳에는 누가 들어갈까?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들어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점점 그 말씀이신 예수님을 닮는다. 날마다 달라지고, 새로운 인격, 새로운 삶으로 변화된다. 

둘째는 그 이름이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대의 정신을 이긴 자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는 흰 돌을 주신다. 그런데 그 이름은 받는 사람만이 안다. 그 이름은 개인적으로 아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철저히 하나님과 우리 각자 개인의 관계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서 믿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대신해서 믿을 수 없고, 아내가 남편을 대신해서 믿어줄 수 없다. 그 흰 돌의 초청장은 다 개개인이 받는다. 우리 개개인이 그분의 이름으로 된 초청장을 받아야만 천국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한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분을 알아가고 그분을 닮아 가며 그분과 교제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 간다. 드디어 그날 우리가 잔칫집 문 앞에 섰을 때에 주님이 문 앞에 와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맞이하신다. 그때 주님이 오셔서 나를 보시고, ‘오 사랑하는 친구여’ 하고 맞아 주셔야 한다. 그런데 주님이 나오셔서 ‘누구시더라? 도무지 모르겠네요?’ 하시면 못 들어가는 것이다. ‘주님 제가 교회도 다녔고. 봉사도 했고. 직분도 중직자입니다.’ 그것은 조건이 되지 못한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아가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였는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님은 너는 나와 진정으로 교제하고 뜻을 나눈 내 친구가 아니라 하신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말씀으로 훈련 받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필수적인 여정이다. 날마다 말씀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결국 발람의 교훈에 넘어간다. 세상 문화와 싸워서 이기는 것은 오직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