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by congerdesig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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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한국 상황은 한마디로 ‘혼란’이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의료 등 전 분야에서 갈등과 분열이 극심해지고 있다. 요동치는 파도 속에서 배가 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복원력이 있기 때문이다. 복원력이란 배가 중심을 잃어도 오뚝이처럼 다시 중심을 잡고 일어나는 능력을 말한다. 2025년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한국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국 교회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거대한 배가 중심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복원력을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총 7번에 걸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며, 한국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본질적인 대안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_필자 이인호


벤저민 하디는 그의 책 퓨처 셀프에서 한 사람의 과거가 그의 현재의 행동과 삶을 좌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은 매를 꿈꾸는 존재이기에, 오히려 그가 꿈꾸는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고 그는 강조한다. 우리가 그 미래를 얼마나 생생하게 그리는지에 따라, 즉 미래의 나와 연결되는 수준이 현재의 삶의 수준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미래를 꿈꾸고 미래의 나를 생생하게 그릴 줄 알아야 한다. 그때 미래의 내가 현재를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미래에서 시작하여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8-11의 관점이 바로 미래에 있다. 오늘 교회에 나타나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셔서 이 땅을 심판하실 주님의 모습이다. 그분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교회에 와 계신다. 그래서 미래에 심판하실 그 잣대로 오늘 교회를 바라보신다.

요한계시록은 그 미래의 관점에서 오늘의 현재를 보게 한다. 미래의 시각으로 현재를 헤아리고 그 미래를 향한 삶을 현재에 살아가라고 한다. 그렇다면 미래에서 오신 주님, 장차 심판하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환란 궁핍에 대하여: 너희가 실상은 부요하다

먼저 주님은 예수님을 믿다가 환란과 궁핍을 당하고 있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 실상은 너희가 부요하다고 하신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 2:9). 지금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빼앗기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래서 궁핍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실은 네가 부요하다고 하신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까?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오늘 성경이 이 서머나 교회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계 2:8).

먼저, 그분은 처음부터 마지막이시라고 한다. 즉 예수님이 역사의 시작이시고, 역사의 마지막이시라는 것이다. 그분이 역사의 중심이요 주인이요 심판자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늘로 오르셨다. 그 하늘은 삼차원의 하늘이 아니라, 하늘보좌가 있는 하늘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하늘이다. 거기는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있다. 그 하늘은 이미 뜻이 이루어진 곳이다. 이미 주님은 역사의 끝에 계시고 그것을 보고 계신다. 이처럼 처음이며 마지막이신 예수님이 그 미래, 그 종말에서 오늘 우리의 선택의 결말을 이미 보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 길이 환란과 궁핍의 길이다. 그런데 이미 그들의 선택의 결말을 보고 계신 주님은, 그들이 부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주님은 긴 역사의 끝에서 그 결말을 다 보시면서 가치의 판단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영원의 관점에서 가치의 판단을 하시는 것이다.

당장에는 악인이 번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의 영화를 누리지 못하는 내가 바보 같다. 하지만 긴 역사 속에서 보면 악인의 번성은 잠시요, 이 세상의 영화도 잠시다. 결국 의인은 복을 받는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 37:10-11).

잠시는 악인이 이기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결말이 달라진다. 그리고 결국 종말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상급이 그를 기다린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 29-30). 

처음이요 나중이신 예수님은 바로 그 모든 역사의 끝에서 그것을 보고 말씀하신다. 믿음이란 이처럼 그 미래를 바라볼 줄 아는 것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그 미래를 보고, 그 미래를 향한 삶을 현재에 선택한다. 모세의 삶이 그랬다고 히브리서는 이야기한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26).

장차 하늘에서 상 주심을 바라보니, 세상의 영화가 잠시의 죄악의 낙이요, 그리스도를 향한 고난이 더 큰 재물이더라는 것이다. 이처럼 주님은 궁핍과 혼란 속에 있는 네가 실상은 더 부요한 자라 말씀하신다.

또한, 주님은 죽음을 이기신 분이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고 이 세상의 잠시의 삶이 전부라고 한다. 하지만 주님은 죽었다가 지금 살아나셨다. 지금 살아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원한 생명 가운데 계신다. 예수님은 지금 그 하늘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 계신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 네가 당하는 환란과 궁핍은 장차 네가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너는 부요한 자라는 것이다.

주님은 하늘 영광의 자리에서 지금의 고난을 바라보신다. 그 자리에서 보는 시각은 다르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네가 누릴 그 영원한 영광의 무게에 비하면, 이 땅의 환란은 잠시요 너무나 가벼운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시각이다. 결국 이러한 믿음의 시선이 가치의 역전을 가져온다.
 

비방에 대하여: 그들은 사단의 회당이다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첫 번째가 환란, 가난 같은 물리적인 것이라면, 두 번째는 비방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의 비방이 치명적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자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격이 힘든 것은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같은 뿌리를 가졌기 때문이고, 성경을 통해서 이론적, 신학적 공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가 당한 공격이 바로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이었다.

우리가 이단에게 비방 받고, 조폭이나, 범죄자나, 사기꾼에게 비방 받을 때는 잘 흔들리지 않는다. 문제는 그 비방하는 존재가 나쁜 인간이 아니라 인격이 좋은 사람일 때다.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사람, 윤리적으로도 존경받는 사람일 때가 문제다. 또는 성경적, 신학적인 깊이를 가지고 찾아올 때다. 그때 ‘내가 잘못된 것일까’ 하고 흔들리기 쉽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계 2:9).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신다. 자칭이라는 것은 주님이 그들을 인정하시는 게 아니고 그냥 스스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은 주님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고 그들의 회당은 사탄의 회당이라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처음과 나중이시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아신다. 자칭 율법적이고 경건하다고 행위와 규례를 자랑하는 그들의 행위의 처음과 끝을 다 아시는 분이다. 그분이 보니, 겉포장만 하나님의 백성처럼 보일 뿐, 실상의 삶은 사탄의 부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입니다. 영원한 하늘에서 보니 그들은 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다. 거듭나지 않은 것이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것이다. 결국 겉모습만 경건해 보일 뿐, 생각이나 은밀한 삶은 죄 아래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형제처럼 가까워야 할 그들이 시기와 질투로 사탄의 노예가 되어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다. 로마 군인의 힘을 빌려 예수님을 못 박은 자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다.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한 자들은 바로 종교지도자들이었다. 바울은 성경에 이삭을 희롱한 자는 이스마엘이라고 하면서, 이삭처럼 약속으로 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바로 이스마엘처럼 육체적으로 난 유대인들이라고 한다. 즉 믿음이 아닌, 자기 힘으로 구원받겠다는 종교인들이다. 다른 누구보다 기독교를 공격하고 예수님을 구원자로서 비방하는 사람들은, 죄인들이 아니다. 소위 의인들이다. 도덕적이고 학식 높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를 믿기에 비난에 가세한다.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한편일 것 같은 종교인들, 도덕적인 사람들이 가장 큰 비방자가 된다.

물론 오늘의 교회는 비방 받을 구실을 너무 많이 주었고, 신뢰를 잃었다.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세상은 예수님이 착한 일을 하셔도 비방했다. 초대교회는 착하고 사랑이 넘쳤는데도 핍박을 받았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분이 구원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너도 구원자가 필요한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게 싫은 것이다. 그런데 교회 다닌다는 것들이, 목사라는 것들이 못난 짓을 해대니, 때려주고 싶은데 맞을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깊은 본질로 들어가면 그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난에 흔들리면 안 된다. 교수님들이 비방하고, 착한 사람들이 비방하고, 훌륭한 종교인들이 비방한다고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 그들은 진정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죄 아래 있고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이요,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인 유대 지도자들의 길을 걷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면 그리스도도 그날에 우리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시인하면 그분도 그날에 우리를 시인할 것이다.
 

고난은 시험이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이 고난이 시험이기 때문이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계 2:10). 장차 고난이 올 건데 그것의 본질이 뭐냐 시험이라는 것이다. 즉 고난의 본질은 그것이 시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테스트라는 것이다. 우리는 욥이 받은 시험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의인인데 고난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파산 당했고 자녀들이 죽었고, 몸에 병이 들었으며, 친구들이 비방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

어느 날 하늘에서 하나님이 사단에게 욥의 정직과 경외함을 보았느냐고 칭찬하신다. 그러자 사탄이 여호와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한다. 하나님이 축복하니까 그런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욥의 삶에 고난을 주시면 분명히 욥도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선 욥은 안 그럴 거라고 하신다. 그래서 내기가 벌어진 것이다. 테스트이기에 하나님은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라고 범위를 제한하신.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에도 기한이 있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계 2:10). 이처럼 고난에는 이런 하늘의 내기가 있다. 사탄의 입장에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의 충성심이 가짜라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을 보고 싶으신 것이다. 고난은 신실함의 테스트인 것이다.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는 고난의 때에 나타난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누가 친구인지 아닌지가 드러났다. 그와 떡을 먹던 친구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를 비난하는 자가 친구였다. 의외의 사람들이 다윗의 아둘람 굴로 몰려왔고, 그들이 훗날 다윗 왕국의 중심이 되었다. 또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신 갈 때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고난이 오니까 누가 압살롬에게 넘어갔는지, 누가 여전히 다윗에게 충성하는지가 갈린다. 이처럼 고난은 적과 아군을 구별해 준다. 영광의 왕은 누구나 따른다. 그러나 고난 받는 그리스도는 소수만이 따른다. 그분을 따르는 일이 고난일 때 거기서 비로소 아군과 적군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 믿음을 가진, 신실한 사람들 위에 세워진다. 그런 면에서 고난은 테스트이다 우리의 신실함의 테스트, 충성심의 테스트이다.

이런 테스트에 대해 주님의 권면하신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죽도록 충성하라 하신다.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하신다.

면류관은 경주에서 승리하는 자,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에게 주는 상이다. 그렇다면 이 땅은 바로 충성의 경기장이라는 것이다. 이 땅의 삶은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실함을 테스트하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흔드는 여러 장애물이 있다. 물질적으로 궁핍해지고 손해 본다고 헷갈리지 말고, 그 길이 부요의 길이니 계속 충성하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비방에 마음 아파하지 말고 그들이 사탄의 모임이니까 계속 충성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회복되면, 이 어려움이 지나면 충성하겠다고 한다. 이 말은 시험 끝나면 공부하겠다는 말이다. 장수가 전쟁이 끝나면 충성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진정한 충성심을 보일 때는 바로 환란의 때이다.

환난의 때에 뒤로 물러나면 사탄이 미소 지으며 하나님께 말한다. ‘거 봐요. 내가 뭐라고 했어요.’ 사단이 미소 짓게 할 수는 없다. 환란이 극심해질 때에 충성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 견디고, 의심날 때에 더 믿는 것, 이것이 마귀를 허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험은 단지 합격과 불합격을 나누는 시험이 아니다.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이 아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세 가지 양상을 가진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고난은 우리의 신앙의 테스트(test)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단의 입장에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유혹(temptation)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그 시험을 허락하여 결국 우리를 단련(trial)하시는 것이다. 연단하시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그 고난 속에서 우리를 연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답게,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사람답게 빚으시는 것이다. 우리를 장차 온전하게 하여 쓰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맹렬히 고난 속에서 연단하신다.
 

죽어야 산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죽고자 하면 산다는 것이다. 비록 첫째 사망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더 무서운 둘째 사망은 받지 않는다. 지옥으로 가는 둘째 사망은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바로 그 유명한 폴리캅이었다. 황제에게 분향하는 것을 거절한 그에게 그리스도를 욕하고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을 때에 폴리캅은 “86년을 나는 그분을 섬겼소.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해 주신 왕을 모독할 수 있겠소?” 하고 화형을 당했다. 그는 주님이 말씀대로 죽도록 충성했다.

우리도 폴리캅처럼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세상은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해도, 우리는 변함없는 신실함으로 주를 섬겨야 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질이다. 그는 우리의 목숨을 바칠 만한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