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by Myriams-Foto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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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한국 상황은 한마디로 ‘혼란’이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의료 등 전 분야에서 갈등과 분열이 극심해지고 있다. 요동치는 파도 속에서 배가 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복원력이 있기 때문이다. 복원력이란 배가 중심을 잃어도 오뚝이처럼 다시 중심을 잡고 일어나는 능력을 말한다. 2025년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한국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국 교회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거대한 배가 중심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복원력을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총 7번에 걸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며, 한국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본질적인 대안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_필자 이인호

 

정채봉 시인은 ‘첫 마음’의 소중함을 이렇게 노래했다.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이런 ‘처음 마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 인생의 위기는 그 첫 마음을 잃어버리고 익숙해지고 당연해지고, 그래서 더 이상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 시작된다. 그래서 결국 빼앗기고 나서야 후회한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다. 가장 소중한 우리 주님께 가졌던 그 첫 마음, 그 첫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손실이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신앙의 본질, 그 첫 번째는 바로 처음 사랑이다.

에베소 교회를 바라보시며 그들을 판단하시는 주님의 기준이 바로 처음 사랑이다. 과연 처음처럼 나를 사랑하는가? 그 첫 마음이 변함없이 나를 섬기고 있는가?

주님의 칭찬: 너희 사랑의 헌신을 내가 안다

주님은 먼저 그들을 칭찬하신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주님은 두 번이나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모든 헌신과 섬김을 다 알고 계신다는 말씀이다. 다 보고 계시고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만세 전부터 우리를 아시는 그런 앎과는 다르다. 아무것도 하시기 전, 우리의 존재를 무조건 사랑하시고 인정하시던 그 앎이 아니다.

이 본문에서 주님은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아신다. 그들이 악한 자와 거짓 사도를 분별한 것을 아시고, 그들이 견디고 부지런한 것을 아시고, 그들이 니골라 당을 미워하는 것을 아신다. 즉 인정하신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행위와 섬김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주님은 특별히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안다고 하시는데, 이것들은 아주 특징적인 단어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  거듭난 사람의 세 가지 열매가 있다.

믿음의 역사(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그것들이다. 그러니까 행위와 수고와 인내는 그들이 주를 믿고, 사랑하고, 소망하기에 나타나는 열매다. 결국, 여기에 나열하는 이 모든 행위와 섬김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소망하고, 그분의 진리를 알고, 그분께 충성하기에 나타나는 행동들이다.

하나님은 그 동기를 중요하게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섬기는 바로 그 헌신, 그 순종을 기억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책망: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들을 칭찬하신 주님은 이제 그들을 향해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신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지금 현재 사랑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 주님은 그들이 사랑으로 하는 그 섬김을 칭찬하셨다. 그런데 그 사랑이 처음에 비해서 식었다. “집사님은 참 믿음이 신실하고 성숙하세요.” 사람들은 그렇게 칭찬하는데, 예수님은 이렇게 보신다. “예전과 다르구나.” “그때처럼 기쁨과 감사가 넘치지 않는구나.”

이처럼 주님은 그들의 처음 사랑, 처음 행동과 그들의 ‘지금’을 비교하신다. 우리가 주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바로 그때와 비교하신다. 그런데 이 책망보다 정말 충격적인 것은 주님의 이 선언이다. “네가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계 2:5). 촛대는 빛을 밝히는 도구다. 이 세상에 빛을 밝히는 그 사명을 옮기시겠다는 말씀이다. 사랑이 식으면 결국 빛을 발하던 그 불이 꺼진다는 것이다. 생명력이 다하고 사명을 빼앗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첫 사랑의 식어짐은 가장 중대한 적신호이다. 마치 모든 몸이 건강한데 심장이 안 좋다, 차량의 모든 것이 좋은데 엔진이 안 좋다는 진단과 같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이 중요한 진단을 해야 한다.

‘종교’로 전락하는 교회

이스라엘 백성이 결국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곧, 여호와를 사랑하는 일에 실패한 것이다.

신명기의 율법은 이렇게 명령한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첫째, 여호와를 사랑하라. 둘째, 그래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라. 셋째, 그러면 너희에게 복을 주신다. 사랑–순종–축복이다. 이 명령을 다르지 않고, 우상숭배하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 우상숭배–불순종–저주다.

결국 가장 중요한 심장은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요 이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육체의 할례는 베풀지만, 마음의 할례를 베풀지 못하는 것이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사랑이란 마음의 동기가 빠져버리니 축복과 저주만 남는다. 순종하면 축복, 불순종하면 저주. 이 둘만 남는 것이다. 사랑의 동기를 잃어버리니 결국 그 순종의 동기는 축복과 저주가 되는 것이다.

신명기 28장에 여호와를 사랑함으로 순종할 때 주시는 축복의 목록이 열네 절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불순종할 때 주시는 저주의 목록은 축복 목록의 네 배나 된다. 모두 54절이다. 이 저주의 목록은 정말 무시무시하다. 엄청난 경고다. 여기서 그 복과 저주를 가르는 핵심은 ‘여호와를 사랑하는가’이다. 그런데 율법이 우리로 여호와를 사랑하게 못하니까, 결국 그들의 동기가 축복 또는 저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순종하고, 또는 저주받지 않아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두려움이 그들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교회생활이 두려워진다. 사람들이 서로 판단하며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된다. 그리고 두려움이 동기가 되는 종교집단은 율법화되고 규율화된다. 이것이 종교화이다.

그들은 규율을 지키는 것이 평안의 길이고 신의 노여움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반면에 그것을 어기면 신의 노여움을 산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은 대체로 그 종교의 규율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감시하는 종교경찰 역할을 한다. 유대 사회가 그랬다.

그런데 교회도 사랑이 식어지고, 사랑이라는 동기가 사라지면, 결국 두려움이 동기가 되어 종교화, 율법화된다. 독실하다는 중직자가 가정에서 종교규율로 아이들을 숨 막히게 하고, 신실한 권사님이 철없는 며느리를 정죄하고, 경찰 시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교회를 오래 다닌 중직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벽기도 출결 체크, 예배 지각 체크, 예배태도 체크를 하는 종교경찰이 된다. 젊은 사람들이 그런 중직자들의 서치라이트 불빛에 발각되어 혼나기 일쑤다. 그러니 젊은 세대가 교회를 떠나고,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등을 돌리는 것이다.

이 세상은 점점 상대주의에 빠져간다. 옳고 그름이 어디 있냐는 그런 흐름이다. 그런데 교회는 나만이 옳다는 교조주의에 빠져서 증오심과 적개심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저주한다. 그러니 누가 그런 교회를 가겠는가?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 안에 날이 갈수록 이런 분위기가 더 깊어지고 있다. 이처럼 사랑이란 동기가 식어버리면, 우리도 모르게 규율과 판단, 정의의 외침과 외식만 난무한 곳으로 변해버린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런 헌신 행위를 주님이 안 받으신다는 사실이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행위일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외적으로 보면 많은 고상한 종교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 안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 성경 안에서 구제, 봉사, 자녀교육, 성공하는 리더십의 법칙을 찾아낸다. 하지만 정작 말씀하신 분과의 생명력 있는 교제가 없다. 사랑을 말하지만, 판단과 정죄가 난무한다. 원망과 불평이 깔려 있다. 사람들에겐 칭찬받는지 모르겠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 한다. 너는 지금 너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하는 거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 결국 촛대를 옮기신다.

처음 사랑의 회복

어떻게 이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가 물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다시 하나님을 처음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먼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말씀하신다. 어디서 떨어졌는지(fall down) 생각하라고 하신다. 어디서 추락하였는지 돌아보라 하신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그러면, “처음 행위”는 무엇일까? 처음 은혜 받고 열심히 뛰던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처음 행위는 처음 주님을 향한 첫 사랑을 가져왔던 특징적인 행위이다. 그 행위 때문에 처음 사랑을 알게 되었는데, 지금 그 행위가 실종되었기 때문에 처음 사랑도 점차 실종되게 된, 바로 그러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개척했다. 그리고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같이 바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아마도 하루에 한 네 시간씩 매일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매일 모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기도했고,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들의 처음 행위였다. 주님을 사모해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하던 바로 그 행위가 그들의 처음 행위였다.

둘째,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특별히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무엇을 가르쳤을까? 우리는 바울의 서신서를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핵심 내용은 복음 곧 그리스도이다. 구약의 모든 성경 안에 감추어진 이 복음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배운 것이다.

이 복음이 하는 일이 무엇일까? 앞에서 말했듯이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일을 못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 순종하게 못하고 결국 모두 저주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모세가 예언한 대로(신 30:6), 율법이 못하는 그 일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 마음이 할례를 받아 변화되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분이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은혜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 마음에 성령이 거하신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고, 그것이 꿀송이처럼 달게 하시는 것이다.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이 마음이 할례를 받고 변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성령님은 우리가 육신을 이기고 그 말씀대로 살게 하신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의 삶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신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복음은 우리가 진심으로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분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복음은 이 율법을 성취한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에게 이 복음을 배우고 열매 맺었다. 그 사랑으로 열매 맺은 그것을 하나님이 칭찬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은 알아주시고 칭찬하신 것이다. 인정해 주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이다. 이 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은 요한삼서에서 가이오 장로에게 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길 간구한다고 했다(요삼 1:2). 즉 가이오가 영혼이 잘되어 나그네를 대접하고 섬기니까(사랑과 순종), 하나님이 그런 네 생업이 잘되고, 건강의 복을 주시길 원한다고 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이 그 수고 헌신을 알아주시고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결국 신명기에 약속한 그 놀라운 축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 땅에서는 은혜와 더불어 고난도 받는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승리케 하신다. 궁극적으로 그 축복의 절정은 바로 하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진정 이 복음이 우리가 복 받는 길이다. 이 복음이 바로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진정으로 순종하는 백성을 만드는 것이다.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였다.

날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라

결국 핵심은 우리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날마다 사랑하는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이긴다는 것은 모든 방해물을 물리치고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처음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겨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이기는 그에게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하신다.

그날 우리에게 생명과 치유를 공급해 주는 그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우리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강이 흐른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의 떡이고 그분 안에서 우리는 완전한 충만함을 누릴 것이다. 그날에 우리는 그분을 얼굴을 맞대고 보며 사랑할 것이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날마다 그 완전한 그분의 생명력으로 충만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가장 큰 사랑, 행복, 만족, 기쁨, 가치를 그분 안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놀라우신 은혜를 과연 누가 경험할까? 그것은 바로 여기서도 그분을 먹음으로 그분으로 인하여 살아가던 사람들이다. 그분과 교제하며 그 사랑으로 행복하고 만족하고 감사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가르침이 아니다. 먹는 것이다. 종교는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이신다. 종교는 엄숙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잔치다. 예수님은 고상한 선생으로 가르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주시어 우리의 행복과 사랑이 되시는 분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누리고 그분 때문에 행복하고, 그분을 더 알고 더 사랑하기에, 결국 그날에 천국에서 생명나무 실과인 그분으로 인해서 배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바로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싸움인 것이다.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헛된 것이요, 우리의 마음에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한다. 과연 나의 마음은 어떤가? 나의 사랑은 처음 사랑에 비교할 때 어떠한가? 식어버리지는 않았는가?

회개하자!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