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ton's tomb at Olney, Buckinghamshire/CC0
Newton's tomb at Olney, Buckinghamshire/CC0

 

그리스도인의 삶 연재를 시작하며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은 다양하면서도 하나로 일치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다양하면서도 하나인 우리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첫 출발, 확신, 훈련, 일, 일상, 지혜, 성령, 주일성수, 국가, 그리고 자유일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첫 출발로부터 자유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시작해 보자. _필자 김경호


우리가 믿는 것과 그 믿음을 실천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보통 믿는 것과 그 믿음을 실천하는 것 사이에, 관련 없이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어떤 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에는 합당한 삶이 나타나야 한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무엇인가 자동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고, 그냥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익숙해진 것이 곧 신앙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고 실천하는 것만을 우리의 유일한 잣대로 삼아야 한다. 그 시작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시점에서부터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그 시작을 분명한 믿음으로 시작했는가? 그 시작한 삶에 분명한 변화가 나타났는가? 그리고 시작한 이후 나에게 변화가 있었는가? 다시 말해 ‘시작’이 있느냐와 시작 이후 ‘변화’가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의 출발점이 있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부르심을 믿고 받아들인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영접한다는 것’이다. 그분을 내 마음과 삶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누구에게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은 날이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출발점으로 시작했는가?

존 뉴턴도 그의 삶에 분명한 출발점을 가졌다. 그는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유명한 찬송가를 지은 분이다. 이 찬송가는 1-2절에서 자신이 구원받았던 그날을 찬양하고, 3절은 그 후로부터 이제껏 살아 온 현재를 찬양한다. 마지막 4절은 앞으로 거기서 살 천국에서는 해처럼 밝게 살 것이라고 찬양한다. 우리에게도 처음 믿은 그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이 나에게도 귀하고 귀한가?

존 뉴턴에게 그 처음 믿은 그 시간은 1784년 3월 10일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불량자였고, 그 때에는 노예선의 선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레이하운드라는 노예선이 폭풍우를 만나 돛이 떨어져나가고, 뱃전은 함몰되었으며, 바닷물은 갑판 위로 쏟아졌다. 선원들 모두 그들의 오랜 경험으로 볼 때 이런 정도면, 곧 바다에 배가 가라앉게 되고, 모두 물에 빠져 죽게 된다는 것을 확신할 정도였다. 이 때 존 뉴턴은 하나님을 모독하며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폭풍우가 잠잠해지고, 모두 목숨을 건졌을 때, 뉴턴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믿기 시작했다. 바로 그날이 1748년 3월 10일이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놀라운 은혜를 주신 날, 내가 처음 하나님을 믿은 날”이라고 기록하게 된 것이 찬양의 가사가 된 것이다.

이 날/과정에는 분명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 이 날은 분명히 나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날이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날이어야 하고, 개인적인 결단을 통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날이어야 한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날에 이 세 가지가 믿어질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날에 걸쳐 점차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 최종적으로 내가 결단하여 그분을 영접하게 되는 분명한 신앙고백과 내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날에 감동이 있든지 없든지, 급격한 체험과 함께 시작했든지 아니했든지 간에 말이다.

사실 이러한 체험의 유무는 ‘위기의식’과 연관된다는 연구가 있다. 모태신앙은 처음부터 교회에서의 삶을 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급격한 체험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조직신학자인 루이스 벌코프도 급격한 체험은 성인 연령에 도달 후, 중생한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 회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어떤 권사님은 부흥회 때 은혜를 받고 내려오는데, 나무들, 산들, 강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 없었다고 했다. 보이는 사람마다 “예수님 믿고 천국 가세요!” 뜨겁게 외쳤다. 어떤 집사님은 예수님을 믿고 나니 “세상이 새롭게 보이고, 자신이 천사 아닌 천사로 변했다” 고백했다. 어떤 집사님은 하나님이 10여년의 긴 기간을 통해 선생님, 친구들, 남편을 통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아무 이유 없이 걱정 없이 마음이 하나님께로 정해졌다” 고백했다.

또 어느 집사님은 하나님을 떠난 이후,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하고, 직장생활까지 아주 바쁜 삶을 살면서 지쳐갔다고 했다. 마음속에 무언가 모르는 부족한 느낌이 들었는데, 언니의 권유로 교회에 출석하여 첫 예배를 드리는 순간 “너무도 감동적이고 은혜스럽고, 그 동안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어지는 것 같은 기쁨이 있었다”고백했다.

우리에게 그날은 언제인가?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날은 언제인가? 그날이 있었기에,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는 것이다. 우리도 존 뉴턴처럼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찬양할 수 있는가?

분명한 변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존 뉴턴 목사님은 1807년 12월 21일에 소천했다. 그리고 그의 비문(사진)에 그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한 때 이교도였던 탕자였고 아프리카 노예상인이었던 존 뉴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긍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크게 변화되어 마침내 성직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부인했던 바로 그 믿음을 전파하며 버킹검에서 16년간을, 올니교회에서 27년 봉사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비문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될까? 그 비문에 분명하게 변화된 삶을 기록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의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고 한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으로 널리 알려진 말이다. 우리 삶의 결과는 우리의 비문으로 남게 된다. 후회 없이 살기를 바란다면, 마지막 후회 없는 말을 남기기를 원한다면, 처음 우리가 붙잡았던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계속 붙들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회심에 대한 경험으로 우리의 마음이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우리의 삶의 중심과 삶의 방식과 삶의 목적이 바뀌게 된다. 하나님이 바꾸어 주신 마음은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삶의 중심의 변화: 그리스도 중심

첫째로, 그것은 내 삶의 중심이 달라진다. 완악한 마음에 지진이 일어나고 그 진원지가 우리에게는 곧 중심지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내 마음을 깨뜨리는 진원지가 되어 점차 크게 확장되는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은 곧 깨어지는 모습이고, 다른 편에서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확장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와 같은 고백이 있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우리는 무엇인가를 확대하는 삶을 추구한다. 그 중심에 내가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삶의 확대일 뿐이다.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칭송이 따르는 삶의 확장이 있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육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사람이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는 것, 곧 중심의 변화기 있어야 한다.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셔야 하고, 우리는 그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변화이고, ‘엔 크라이스트!’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삶의 방식과 성품의 변화: 성령의 인도와 열매

삶의 방식과 성품이 달라진다. 이 부분은 두 가지가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먼저는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따라 살 때, 그 방식에 맞는 결과가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성품의 변화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변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하고, 성령을 따라 말하고, 성령을 따라 생각하게 되면, 결국 예수님의 성품이 우리의 인격이 되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어떤 일을 하게 될 때 성령으로 일하는 것과 인간적으로 일하는 것은 다르다. 나쁨 마음으로도 일할 수 있고, 좋은 마음으로도 일할 수 있다. 결국 어떤 마음으로 했느냐가 그 성품으로 남게 된다.

결국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취하는 자에게는 그의 성품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말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은 없느니라”(갈 5:22-23). 성령으로 살아가는 자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일과 업적으로 속일지 몰라도 인격으로는 절대 속일 수 없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결과는 성품을 만들어가는 생각, 말, 일들이다. 

인생의 목적과 변화: 하나님의 영광을 최종, 최고의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달라진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결단과 헌신이 있게 되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사명’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고전 10:31), 각 사람을 부르시고, 그 사람을 위한 고유한 사명을 주신다. 한 평생 한 방향으로 계속해서 이루어가야 할 내 삶의 과제가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목적, 이 사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고백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쓴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경건 묵상집이 있다. 3월 5일의 묵상 내용을 보면, 제목이 “유용성을 고려하지 마십시오!”이다. 내용은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와 사명 없이 살아가는 자의 차이를 구별하고 있다. 사명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일하는 것은 쉽다. 챔버스는 이런 일들을 “기독교적인 감상으로 포장된 상식이 그들의 인도자가” 된다고 말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상식에 맞는 만큼만 기분 좋게 일한다는 것이다. “나도 하나님의 일을 했어! 그래 나도 중요한 사람이야!” 말하게 하는 그런 기분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런 상식이나 기분, 또는 유용성을 따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 일에 목숨도 아끼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살려고 하는 일과 삶 자체를 포기해서라도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명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사명으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헌신은 얼마나 상식적이며, 유용하며, 기분 좋은 것인가? 만일 하나님의 뜻이 그 상식을 넘어서고,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며, 유용성에 맞지 않는 것들이라면, 우리는 과연 할 수 있을까?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바울은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다버릴 정도로 돌에 맞았다. 그렇지만 그는 일어나 그 성으로 되돌아 들어갔다(사도행전 14장).  상식에 맞는 행동일까? 기분 좋은 일일까? 효과적인 일일까? 그렇지 않다! 오직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이 그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사명만으로 이룰 수 있다. 그것은 인생 전체가 가지는 방향이며, 이 방향으로 오래되고, 지속적인 헌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한 방향으로 된 오래된 순종!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런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결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영접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른 것으로 시작된 것은 다 무너지고, 허망해지고 만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또한 그 이후의 변화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다. 중심이 바뀌고, 성품도 바뀌고, 목적도 바뀌어 살아가게 된다. 우리도 분명히 변화하게 된다. 나에게도 이러한 시작이 있는가? 또한 이러한 변화가 계속되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어느 집사님의 간증이 이러한 변화를 계속 고백하고 있다. “믿음의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다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지인들에게 교회 다닌다고 일부러 이야기하며, 교회 한번 같이 가자고 친구들에게 권하기도 했다. 성경책도 선물해 보고, 널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수시로 이야기해 보았다. 어린 저의 모습에 모두들 적당히 하라고, 혼자 열심히 믿으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냥 전할 뿐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교회 출석 후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시고 계심을 삶 속에서 매순간 느끼며 살아간다. 때에 따라 부어 주시는 축복과 헌신할 수 있는 마음과 건강도 주시니 감사하며 살고 있다. 때로 삶 속에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더욱 단단하게 해 주시기 위한 주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우리 가정의 가훈이다.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사랑과 주님이 주시는 축복과 은혜 속에서 감사하며, 앞으로도 열심히 말씀과 믿음 생활하며 주님 기쁘시게 하는 자녀의 모습으로 살아가겠다.”

아마 이 분은 비문에 “범사에 감사하다가 천국 간 사람”이라고 기록될 것 같다. 우리 모두의 삶에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