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llustration: Jennifer Ehle; Images: istock.com/NiKita Filippov, Unsplash/Mike Kono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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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를 출간하고 5년 후, 닐 포스트먼은 독일 정보학회에서 “정보-행동 비율”이라는 자신이 만든 개념을 자세히 설명하는 연설을 했다. “죽도록 정보 얻기(Informing Ourselves to Death)”라는 제목의 이 강연에서 포스트먼은 1990년을 사는 일반인에게 “정보는 더 이상 문제 해결과 관련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2025년을 사는 우리에게도 쉽게 적용된다.

정보와 행동 사이의 유대감은 끊어졌다. 정보는 이제 사고파는 대상, 오락의 한 형태, 또는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옷처럼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정보는 무차별적으로 제공된다. 더 이상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며, 유용성과는 단절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에 넘쳐나고, 정보에 빠져들고, 정보를 통제하지 못한다. 정보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보 과잉에 대한 우리의 방어력은 무너졌고, 인간의 정보 면역 체계는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보를 걸러내는 방법을 모른다. 어떻게 줄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정보 과잉’에 관한 포스트먼의 이 경고가 인터넷 시대 이전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럼 오늘날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정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걸까? 당시에도 제대로 작동하는 “정보 면역” 방어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더 나쁜 상황에 처한 것일까? 특히 ChatGPT, 딥페이크, 정치적 허위 정보 캠페인, 그리고 그로 인한 인식론적 위기의 시대에 말이다. 우리가 직면한 정보위기는 적어도 세 가지이다. 지나치게 빨리 움직이는 너무 많은 정보가 알고리즘으로 인해 나를 정확하게 겨냥하도록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정보를 얻는 것”은 오늘날 자산이라기보다는 부채에 가깝다. 디지털로 매개된 정보의 질은 신뢰라는 단어를 붙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과잉정보 상태가 초래하는 흔한 부작용

과도한 정보 속에서 별 다른 활동을 하지 않을 때 무슨 일이 생길까? 내 경험과 관찰에 따르면, 몇 가지 일반적인 부작용이 발생한다.

불안해진다. 우리의 영혼이 전 세계의 “속보” 재난, 불의, 종말론적 헤드라인으로 꾸준히 채워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분노한다. 당파적 클릭유도, 트롤 도발, 기타 어리석은 말에 끊임없이 노출되면 혈압이 상승하고 화가 치솟는다.

중독된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정보 유형이 무엇인지 쉽게 파악한다. 조만간 우리는 중독자처럼 스크롤하고 클릭한다. 좋아하는 “뉴스”, 퀴즈, 그리고 육즙이 가득한 가십 장르가 주는 매력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된다.

무감각해진다. 구체적인 행동과 단절된 정보 섭취는 정보를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으로 만들고,우리를 실제 삶과 단절시킨다. 결국에 가서는 끔찍한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한 헤드라인조차도 마치 친구의 휴가 사진을 훑어보듯 무심코 스크롤해서 넘기는 상태가 된다.

외로워진다. 삶의 많은 부분을 지역에 기반을 둔 구체적인 공동체와 유리된 디지털 정보에 몰두할 때, 심지어 온라인에서 아무리 자주 토론하거나 논의하더라도, 우리는 더 외로워진다. 온라인 인플루언서나 나를 대신해 격렬하게 토론하는 대화방 아바타조차도 내게 정말로 필요한 진짜 공동체를 대체하지 못한다.

망상에 빠진다. 정보의 알고리즘 형태는 두 명이 똑같은 정보 속에서 살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모두가 다 사물을 다르게 바라본다. 누구나 다 자신의 선호도와 편견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조정된 콘텐츠를 즐긴다. 당연히 이것은 우리를 더욱 더 심각한 자신만의 공간, 에코 챔버에 갇히도록 만든다. 그 결과, 틀리고 맞고 관계없이, 누구나 다 자신이 옳다는 것에 대한 확신만을 점점 더 굳게 한다.

현실에서 분리된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부작용의 누적 효과는 과도한 정보 속에서 사는 가짜 삶이 진짜 삶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인식이 행동을 압도하고, 현실보다 서사에 더 많이 매료될 때, 우리가 느끼는 이 세계는 점점 더 초현실적이 된다.

C. S. 루이스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보-행동 단절의 역학을 한탄하며 그 현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빠르게 퍼져가는 뉴스가 초래하는 악 중 하나는 매일 아침 전 세계의 슬픔이 나를 찾는다는 사실이다. 문제가 생기는 마을에서야 당연히 사람들이 자신들이 도울 수 있는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야지. 하지만 나는 모든 일개 시민이 자신이 도울 수도 없는 상황에 마음을 고정시켜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할 수 있는 자선 활동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상황을 보면, 마치 많은 사람들이 단지 걱정하는 마음 그 자체가 대단히 큰 선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걱정하는 마음”(예를 들어서, 사회적 인식 자본)에 부여된 사회적 공로에 도전해야 한다는 루이스의 주장은 옳다. 나아가서 스스로 나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마음을 고정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그는 요점을 제대로 잡았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부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부담을 줄 뿐 아니라, 우리가 진짜로 해결할 수 있는 지역 문제에서 주의를 돌리도록 만든다.

지역사회를 등한시하기

세상 움직임을 따라잡기 위해 쏟는 모든 에너지 때문에 정작 우리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과 우리집 뒷마당에서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를 소홀히 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와 정의를 구체적으로 추구하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이 점이야말로 불균형한 정보-행동이 초래하는 문제의 핵심이다.

오늘날 대중 매체 환경으로 인해서 21세기를 사는 평균 젊은이는 지역 정치보다 국가 정치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대선 후보와 대법원 사건에 대해서는 강력한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자기가 사는 도시의 시장이나 시의원은 이름조차 모른다. 주변 지역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가 뭔지는 관심도 없다.

2020년 6월 경찰의 잔혹 행위에 항의하기 위해 인스타그램에 빈 검은색 사각형(#blackouttuesday)을 게시한 수백만 명의 Z세대 중 과연 몇 명이나 자기 동네에 사는 경찰관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을까? 2022년 2월에 소셜 미디어 아바타를 우크라이나 국기로 바꾼 수백만 명 중에서, 과연 몇 명이나 자기 동네에 사는 전쟁으로 파괴된 나라에서 온 난민이나 이민자를 도운 적이 있을까?

온라인 해시태그 활동은 선의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집단적 온라인 활동”의 바이러스성 힘이 어느 정도 차이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루이스가 지적했듯이, 그러한 활동이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할 수 있는 자선 활동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방법”이라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우리가 보다 더 균형 잡힌 정보-행동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정신 건강에 도움을 준다. 그리고 당신이 지역 사회와 구체화된 공동체에 기반을 두도록 만든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이제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결코 이룰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를 만드시는 전지전능하고 주권적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더 깊게 가져야 한다. 균형 잡힌 정보-행동을 통해서, 당신은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살게 하신 특정한 장소에서 신실한 증인이 되는 데 더욱 유익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반 메사와 브레트 맥크레켄이 편집한 Scrolling Ourselves to Death: Reclaiming Life in a Digital Age에서 간추렸다.

출처: The Spiritual Problem of Being Overinform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