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llustrated by: Jennifer Ehle; Images: Unsplash, Pexels, khunkorn via Canv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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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딜레마를 한탄하는 사람들이 흔히 꾸짖으면서 하는 말이 "이제 그만 로그오프하고 나와"이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의 장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며 반발한다. 나는 후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우리가 더 비판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셜 미디어가 "진짜 삶"이 아니라고 하는 건 지나친 단순화이다.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으며,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일은 실제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라는) 플랫폼은 우리가 실제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속인다. 오래지 않아서,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드라마에 중독된다. 매일 새로운 전투가 시작된다. 유명 인물과 그들의 동맹이 예상대로 집단주의 경계를 따라 쓰러지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맞춰서 내 목소리를 더해야 한다는 압박을 (또는 흥분을) 느낀다.

자크 엘룰(1912-1994)은 20세기 중반 개신교 신학자이자 사회 비평가로, 당시에 마셜 맥루한을 제외하고 그 어떤 기독교 사상가보다 기술과 뉴미디어가 끼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오늘날 소셜 미디어 현상과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그의 지혜를 들어야 한다.

현대 세계에서의 존재

엘룰은 주요 사회학 저서 및 그리스도인의 세상 참여 방식에 관한 신학적 저술에서 "피드(feed)"에 빨려드는 것에 대해서 경고했다.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일간 뉴스와 같은 현대 미디어 기술은 우리에게 "팩트"와 딜레마라는 폭격을 가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생각을 오늘날 소셜 미디어에 쉽게 적용할 수 있다. 소셜 미디어 사용자는 은연중에 한 쪽 편에 서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우리는 소외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또한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 속으로 뛰어든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스스로 중요하다고 느낀다. 우리는 로그인하고 항상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어떤 중요한 사건의 전개나 새로운 담론을 놓쳐서는 안 된다. 뒤쳐져서는 안 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현장에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엘룰은 이것을 "최신(current)에 대한 집착"이라고 설명했다.

엘룰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참여하고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충분히 고려하고 그것의 중요성을 확증했다. 그래서 그는 첫 번째 핵심 "신학적" 저서에 ‘현대 세계에서의 존재(Presence in the Modern World)’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 활동가들의 정서에 공감했다. 즉, 기독교가 공공질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지 사적 영역과 개인적인 헌신에만 속한다고 암시하는 조용한 충동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엘룰은 그의 주장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확인하고 후속 작 ‘하나님 나라의 거짓된 존재(False Presence of the Kingdom)’를 썼다. (원래 프랑스어 제목은 Fausse présence au monde moderne(현대 세계 속 교회의 거짓된 존재)로, 엄격하게 번역하면 False Presence in the Modern World가 된다. 전작과 비슷한 이 제목은 두 작품을 명확하게 연결한다.) 엘룰은 조용한 충동이 강한 시대가 있지만 동시에 진자는 언제라도 쉽게 반대라는 오류로 흔들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온 세상이 정치에 집착하던 당시에 엘룰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었고, 또한 그의 지적은 오늘날 북미 복음주의 기독교의 특정 계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엘룰에 따르면, 매우 많은 사람이 “존재”에 관한 그의 첫 번째 저작을 오해했다. 마치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를 "정치적 참여"와 융합한 더 광범위한 사회 참여의 암묵적 지지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후기 근대 민주주의가 가져온 한 가지 신화는 정치가 정말로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참여"의 압력을 받는다. 그리고 이는 정치 활동으로 이해된다.

엘룰은 이런 식의 압력이 정치의 지위를 적절한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렸다고 경고했다. 정치는 "궁극적인 영역"이 되며, "존재"는 주로 정치라는 영역에서 실천되고 그리스도인들은 정치를 통해서 모든 것을 걸러낸다(그는 ‘새로운 악마들(The New Demons)’의 마지막 장인 "정치적 종교"에서 이 점을 가장 명확하게 주장한다). 우리는 오늘날 주로 정치적 분열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온라인에서 이웃과 교류한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는 사실상 오늘날 대중을 위한 주요 공개 포럼이기에 정치 싸움은 주로 여기서 벌어진다.

만들어진 드라마

선전(propaganda)에 대한 엘룰의 주장과 더불어서 그의 이런 통찰력은 알고리즘, 분노 조장자, 전문적인 도발자에 의해 우리가 어떻게 몰려드는지를 인식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엘룰은 선전을 반응 유발에 필요한 대중 커뮤니케이션으로 이해했다. 선전가들은 “심리적 레버”를 설정함으로 특정 상징과 슬로건이 반사적 행동을 유발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복잡한 문제일수록 지나치게 단순화시킴으로 대중의 감정에 호소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고 미리 정해진 반응을 보인다. 도발자들은 모든 것이 들어맞는 고정관념을 생성하는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엄격하게 좁혀진 ​​선택 범위 내에서만 대응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도록 만든다.

엘룰은 드라마의 대부분이 완전히 조작되었다고 설명한다. 잘못된 정보에 기초하거나 부당한 비중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압력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람을 정치적 범주에 끼워 넣게 하고, 반사적 반응을 유발시키며, 나아가서 우리를 곧 사라질(du jour) 전투에 참여시키도록 압력을 가한다.

우리는 조금씩 모든 관련 당사자에게 분위기에 따라서 본능적으로 반응하도록 길들여진다. 모든 의견은 "긍정적“ 또는 "부정적" 태도로 축소되기에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 걸려 있다. 특정 집단이 만들어지고 적이 정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팩트에 관해서 다른 평가를 하거나 집단이 승인한 대응과 맞지 않는 사람들은 더 이상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 사실상 그런 집단에 속한 인물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당신이 싫어하는 집단의 아바타에 불과하다.

(진보적, 우익 반체제 인사, 중도파 등 어떤 종류든 관계없이) 본능적으로 반동주의자가 이런 식의 상황에 발을 담그는 순간 많은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런 식의 행동에 빠지는 것은 자제력 상실을 의미한다(잠 25:28; 갈 5:23; 딤후 1:7; 3:3; 벧전 4:7 참조). 그리고 냉정한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딤전 3:2, 11; 딤후 4:5; 딛 2:2; 벧전 4:7; 5:8 참조). 엘룰은 그것이 우리를 피상적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특정 집단과 그들의 확립된 견해에만 헌신함으로 정체성을 가지라는 압력은 당신에게 이제는 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잊도록 강요당함

끊임없이 넘쳐나는 뉴스와 토론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장기적 사고 능력을 방해한다. 당신은 이제 1분 전에 있었던 매우 중요한 일을 잊도록 강요당한다는 게 엘룰의 주장이다. 마구 휘둘리는 생채리듬은 이제 당신의 집중력이 모든 드라마의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도록 훈련시킨다. 따라서 과거에 익힌 교훈을 통합된 자아로 동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다.

쉬지 않고 발생하는 대부분의 사건은 특정 집단의 순간적인 대본을 다양한 참여자가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당신은 스스로 참여함으로 정치적 행위를 표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상 당신은 한 단계 아래에서 볼 때 무리 중 하나일 뿐이다. 당신은 이제 눈앞에 제시된 그날의 싸워야 할 내용과 당신에게 주어진 길을 벗어나서 생각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뉴스 따라잡기에 집착하고 정기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만든 선택권에 갇힌 상태라는 게 엘룰의 주장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상실되는 것은 기독교 진리가 가진 독특한 증거이다. 비그리스도교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과 말투에 빠진 그리스도인은 이제 맛을 잃은 소금에 불과하다.

목사에게 필요한 적용점

위탁받은 양떼를 돌보고 말씀 준비에 열심인 소명에 충실한 목사가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때그때 나오는 뉴스에 지적으로 반응할 시간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당신이 받은 목회학 학위(MDiv)는 전능함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의 목회적 책임은 온라인 "추종자"에게 있는 게 아니다. 대부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많은 전투가 당신으로 하여금 소명에서 주의를 돌리도록 만든다. 게다가, 당신이 받은 훈련과 전문성을 넘어서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그 결과 예상대로 특정 집단의 주장에 빠지는 순간, 당신의 권위는 희석된다. 당신은 이제 고작해야 당파 기계의 또 다른 톱니바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관심과 악명 또는 돈을 위해서 도발자로 행동하는 목사와 대중 신학자들의 경우에 상황은 더 심각하다. 성경은 어리석은 논쟁에 참여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종교 지도자들, 특히 믿는 이들에 대해 가혹하게 말한다(예: 딤전 3:1-3; 6:3-5; 딤후 2:14-26; 딛 3:1-11; 잠 6:16-19). 물론, 진짜 심각한 분열은 제대로 인식되어야만 한다(예: 렘 6:14; 마 10:34-39; 23; 눅 12:49-53).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견 불일치의 확대와 긴장의 악화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말씀이 주는 경고의 무게가 여러분을 누르도록 해야 한다.

엘룰은 단지 평화주의를 옹호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증언을 단지 당파성으로 축소하며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정치적 싸움에서 편을 드는 것은 항상 위험하다는 경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가진 건 정당이었다. 정당 가입은 확실하게 허용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당 소속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보다 당파적 정체성을 더 우선시하는, 부족한 그리스도인(less Christian)을 만들 수도 있다는 위험을 우려했다.

일단 정당이나 온라인 집단에 속하는 순간, 우리의 개념적, 수사적 선택권은 좁아진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여야 한다는 끊임없는 압력에 직면한다. 다양한 형태의 공식적, 비공식적 선전을 통해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사건을 해석하고 집단과 보조를 맞춰 논평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그런 집단에 가입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근본적 신앙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는 그리스도인과 더 깊은 차원에서 하나 됨을 드러낼 의무가 있다는 것이 엘룰의 주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한 쪽 편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일시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동료 신자를 무조건적으로 악마화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반드시 "로그오프"를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좀 더 잘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일상적인 드라마에 대한 관심을 낮춰야 한다. 온라인 전쟁에 휘말리지 말자. 현실이 점점 더 게임이 되어가고 있다고 우리까지 게임 속 플레이어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출처: Steered by Spectacle: Jacques Ellul and the Illusion of Online Engage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