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by Gerd Altman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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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음식은 혼합적이다. 이것저것 다 섞어서 먹는 비빔밥이 그 으뜸이고, 국에 밥을 막아 국밥을 먹고, 이것저것 다 집어넣고 끓인 부대찌개를 먹는다. 콜라와 사이다도 섞어 먹고, 커피도 무언가를 썩어서 만든 라떼가 유행이다. 소주와 맥주도 섞어서 폭탄주를 만들어 마신다. 그래서 요리도 퓨전이 인기다. 기술도 융합 시대다. 점점 다문화사회가 되어간다. 그러다보니 시대사상도 온갖 것들이 섞여 있다. 

이러한 영향을 기독교도 받고 있다. 기독교와 유교, 불교가 섞여서 목사의 설교와 스님의 설교가 구별이 잘 안될 때가 많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점을 보고, 복음에 심리학, 경영학, 인문학 등 온갖 것을 섞는다. 그런데 다른 것은 몰라도 기독교에는 이것은 치명적이다. 진정한 진리, 진정한 구원의 길, 참 하나님은 결코 섞어서는 안 되고 흐려서도 안 되기에 그렇다.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이 세상에 살지만 결코 종교, 사상, 가치관이 섞여서는 안 되고 고유의 순수함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진노하시고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혼합하는 것이다. 복음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 진리의 가르침에 무속, 이단, 타종교를 섞고, 세상의 가치와 버무려 놓은 것을 하나님은 단연코 싫어하신다.

요한계시록 2:18-25에 우리 주님이 가장 무서운 모습으로 등장하신다.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더러워지면 질투하신다

먼저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 곧 지도자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자.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18절). 그 눈이 불꽃같고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눈이 불꽃같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감찰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질투한다는 것이다. 발이 빛난 주석 같다는 것은 그 불꽃 같은 눈동자로 감찰한 악과 더러움을 짓밟아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주님의 눈은 교회를 감찰하신다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23절). 주님은 그 눈으로 교회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다 감찰하신. 먼저 주님은 그들이 잘한 것을 칭찬하신다.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19절). 주님은 그들의 사업 즉 행위를 아신다. 그런데 단지 행위만 아시는 게 아니라, 그것의 동기와 성품을 곧 사랑, 믿음, 섬김, 인내의 자세를 아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내면까지 감찰하신다. 더 나아가 무엇보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고 하신다. 주님은 그들의 처음 행위부터 나중 행위까지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잘못도 꿰뚫어보신다. 그래서 책망할 일이 있다고 하신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20절). 주님이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였고, 그 여자가 주님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아름답고 열심 있는 섬김만 보시는 게 아니다. 동시에 주님은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잘못들도 보신다. 우리 내면의 사상도 살펴보시고 동기도 살펴보신다. 그 주님이 보시니 두아디라 교회는 참으로 두 가지 극단적인 모습이 섞여 있다. 사랑과 섬김의 행위가 많아서 칭찬받는데, 동시에 음행과 우상숭배도 공동체 안에 쓴 뿌리처럼 번성하는 교회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혼합되어 있던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대로 하면 은에 찌꺼기가 섞여 있고,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사 1:22). 우리 주님의 불꽃 같은 눈빛이 그것을 감찰해내신 것이다.

주님의 눈은 질투로 불타오르신다

동시에 불꽃 같은 눈은 질투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아디라 교회를 칭찬하실 때 주님은 여러 가지로 칭찬하신다. 무엇보다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하셨다. 보통 생명력이 없는 것은 처음이 제일 좋다. 전자제품, 옷, 자동차가 그렇다. 시간이 가면 낡아진다. 하지만 생명체는 점점 자라면서 멋도 깊어진다. 생명력이 없는 영적 체험은 처음에만 뜨겁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의 생명은 시간이 갈수록 아름답게 자라난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는 복음의 생명 안에서 자라는 교회다. 은혜와 생명력이 있는 교회이다. 주님이 보시기에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스러운 교회였다.

그런데 그렇게 잘 자라는 교회에 문제가 생겼다. 이상한 여선지자가 들어와서 그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숭배에 빠트렸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그 꼬임에 넘어가 하나님에게서 우상에게로, 육체적인 행음으로 흘러가 버렸다. 우리는 언제 질투하는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눈길을 줄 때다. 게다가 외도를 하면 눈에서 불꽃이 타오른다. 질투와 분노의 불이다. 우리 주님의 불꽃 같은 눈이 바로 그런 눈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질투하실 때는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 곧 우상을 숭배할 때이다. 이 질투의 불은 매우 맹렬하다고 성경은 묘사한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모든 것을 불살라버린다.

도대체 잘 자라던 사랑스러운 두아디라 교회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그 순수한 교회가 왜 이렇게 더럽혀진 것일까?

‘용납은 곧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용납’이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20절). 그들이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자를 ‘용납’했다. 이것이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 처음 은혜 받고서 충만한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이다. 처음 예수를 믿고 나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특별히 만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스럽고 형제요 가족처럼 친근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주의 종들을 존중하게 된다. 두아디라 교회도 그 선지자를 그렇게 우러러 보았다. 뭔가 대단해 보이고 신통력도 있어 보이고 자기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도 하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본질이 그 이름, 이세벨에 암시되어 있지만, 그들은 분별하지 못하고 그 악한 여선지자를 용납했다. 

자칭 선지자 이세벨

이 여인의 이름을 옛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왕비 이세벨이라 칭하는 것은 이 여인의 악한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방 공주로서 아합의 아내가 된 이세벨로 인해서 북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 우상 소굴이 되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은 진노하셔 그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다. 이세벨에 의해서 한 나라가 더러워졌다. 이처럼 두아디라 교회가 용납한 이 여선지자가 지금 그 교회를 심각하게 더럽히고 있다. 

이세벨은 “자칭 여선지자”다. 성령께서 선지자의 직분을 준 것이 아니다. 스스로 선지자라고 칭한 것이다. 결국 그의 가르침은 모두 그의 생각,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다. 앞에 버가모 교회처럼 니골라당의 교훈에 영향을 받은 신자들이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오늘로 말하자면 신천지의 목사 정도 되는 사람이 들어온 것이다.

가르쳐 꾀다

그가 성도들을 가르쳐 꾀었다.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는 이런 이상한 여자에게 공식적으로 가르칠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식으로 하면 순장 또는 교역자가 된 것이다. 앞서 에베소 교회는 교회 내에 지도자를 아무나 세우지 않았다(2절). 철저히 검증해서 세웠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자리에 그를 세워버렸다.

용납, 포용이 아주 중요한 미덕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것과, 그가 가진 이상한 가르침을 용납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왜 격리하는가? 그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바이러스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잘못된 가르침, 이단적인 가르침, 세상적인 사고 가치관까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14).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이 1:10).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이렇게 엄중하게 사도들이 명령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하고 그가 마음껏 성도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한 것이다.

타협의 유혹

왜 두아디라 성도들은 이 여인의 위험한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인 걸까? 사탄은 우리가 힘들 때 찾아온다. 이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사탄은 우리가 힘들어 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주저할 때 정말 귀신처럼 그 냄새를 맡는다. 그들은 우리가 처한 어려운 상황, 두려운 상황, 몸이 아픈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그 약점을 파고든다. 마치 자신에게 무슨 신비한 해법이 있는 것처럼 다가와서 꼬여낸다. 이것이 사탄의 전술이다. 이 거짓 여선지자도 마찬가지다. 그의 가르침은 당시 두아디라 교회가 처한 어려운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당시 로마의 도시들에서 상업 활동을 하려면 상인조합에 가입해야 했다. 그런데 그 모든 조합원들은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결국 그들과 거래를 하려면 그들의 우상숭배 제의에 참여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에게 갈등이 생긴 것이다. 믿음을 지키자니 사업이 어렵고, 사업을 잘하자니 믿음을 배반하게 된 것이다.

그때 바로 이세벨이란 자칭 여선지자가 나타났다. 이 여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 여인의 가르침이 교회에서 믿음생활도 계속하게 하고, 동시에 세상에서 우상숭배하고 행음도 하게 하는 그런 가르침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멀쩡하게 전처럼 봉사하고 섬기며, 또 세상에서는 타협하며 살아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음행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짓 가르침의 위력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게다가 이 여인이 아주 포용력 있고 자유분방하며 매력 있는 모습으로 가르쳤을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뭔가 사람을 끄는 신비한 은사와 능력도 가졌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이 여인의 가르침에 넘어가버린 것이다. 그녀의 추종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 먹고 살기 위해서 그들의 제례에 참여하는 게 뭐가 문제겠어. 내 중심을 아시지.’ 결국 그 여인들의 유혹에 행음에 빠지고 우상숭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북이스라엘이 이세벨의 꼬임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여호와라고 섬긴 것과 흡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이 혼합주의다. 진리와 비진리가 섞이고, 복음과 우상이, 진리와 미신이, 교회와 세상이 섞여버린 것이다. 이사야는 그들의 모습을 아브라함도 몰라볼 거라고 탄식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사 63:16). 이렇게 더럽혀진 모습을 어찌 아브라함이 내 후손이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으로 인정하겠느냐고 이사야는 탄식했다. 혼합주의는 이토록 하나님의 백성을 망쳐놓는다.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21절). 놀랍게도 주님은 자칭 선지자 이세벨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이것은 설사 교회 안에 몰래 들어온 신천지 추수꾼도 하나님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다.

회개는 주님의 참으로 놀라운 은혜이다. 한번 잘못에 빠졌다고 끝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문제는 죄 지은 다음이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길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너 이제 범죄 했으니 끝이야’ 하시는 게 아니다. 이세벨 같은 여인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면, 다른 성도들에겐 오죽 더 그러하시겠는가? 

그러나 이 여선지자는 회개하지 않았다. 구약의 이세벨도 엘리야 통해서 몇 차례나 하나님이 경고하셨다. 삼년반이나 비를 안 내리셨고, 불을 내려 바알 선지자들을 태워죽이셨다. 그런데도 이세벨은 회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퍅해졌다. 이처럼 결국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22절). 

여기 ‘던진다’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온다. 구약의 이세벨이 어떻게 죽었는가? 2층에서 던져져서 개들이 그 살을 먹어버렸다(왕하 9:33-37). 그처럼 이 여인은 그녀가 간음하던 침상이 병자의 침상이 되어, 거기 던져져 병을 앓다 죽을 것이라는 말이다. 또 그의 가르침을 받아서 더불어 행음하던 자들도 큰 환란 가운데 던진다고 하신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23절).

‘그의 자녀’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마치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여 낳은 아들을 죽인 것처럼 그 죄로 인한 징계의 의미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자녀는 곧 그 여인의 가르침으로 완전히 그의 제자가 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구약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엘리야가 죽이듯이, 이세벨의 영적인 자녀들에게도 재앙이 임하는 것이란 경고인 것이다. 결국 회개하지 않으면 이런 무시무시한 심판이 온다는 것이다. 그 빛난 주석 같은 발로 그녀를 밟아버린다는 것이다.

왜 재림에 오실 주님이 미리 교회에 오셔서 이렇게 책망하고 경고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회개하라는 것이다. 회개의 초청이다. 

성경에는 회개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이세벨이 그런 사람이다. 발람도 그런 사람이다. 가룟 유다에게도 회개할 기회가 있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렇다. 그들은 돌아서지 않아서 망했다. 그러나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는 음란죄를 저지르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까지 살해하는 큰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은 그가 침상이 젖도록 눈물 흘리며 회개할 때 다시 회복시키시고 사용하셨다. 성경에 죄를 짓고 회개한 사람 중에 용서받지 못한 사람이 없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 없다. 회개해야 한다. 돌이켜야 한다.

복음에 다른 무엇을 더하지 말라

남은 자가 되라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24절). 두아디아 교회에 그들에게 물들지 않고 남아 있는 자가 있다. ‘남아 있다’는 것은 아합의 때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을 남기셨다는 그런 의미이다. 두아디라 교회 안에 이세벨의 가르침에 무릎 꿇지 않은 소수가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24). 그들은 교회 내에 침투한 이 거짓 교훈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의 가르침을 받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서 가르침 받고, 건강한 교회에서 배운 것과 다른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면 일단 의심해야 한다. 아무리 순장이어도 설사 목회자여도 마찬가지다. 여기 ‘남은 자들’은 그런 이상한 가르침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복음만 붙들라

대신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고 하신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5). 그것은 바로 그들 안에 칭찬을 만들어낸 바로 그 복음이다. 그들이 믿음, 소망, 사랑의 열매들을 맺은 것은 복음을 들었고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바로 그 복음을 굳게 잡으라 하신다.

주님은 여기에 뭔가 다른 짐을 더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24). 바울이 복음 전할 때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그 복음이 부족하다며 거기에 뭔가를 더하라고 공격했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을 만나서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이렇게 말한다.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갈 2:6). 복음에 더할 것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다른 것을 더하려고 했다. 그들을 구원한 이 복음에 다른 무엇인가를 얹으려고 했다. 뭔가 더 신비하고 뭔가 더 자극적이고 뭔가 더 깊은 것을 원했다. 왜 더 신비하고 자극적인 것을 원할까? 예수님을 믿을 때에 받은 은혜,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몰라서 그렇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 그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 배워야 함에도, 그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다른 체험, 다른 가르침을 좇아가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사랑은 많았는데, 말씀이 부족했던 것이다. 

성경적 지도자의 중요성

왜 두아디라 교회는 말씀 안에서 깊이 자라지 못했을까? 지도자의 문제를 엿보게 된다. 거짓 가르침을 드러내는 일을 가장 잘한 교회가 에베소 교회다. 에베소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된 데는 배경이 있다. 바울이 개척해서 3년간 두란노서원에서 복음을 가르쳤다. 그 다음에는 요한, 디모데가 감독으로 섬기고 가르쳤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사도들, 건강한 지도자들의 가르침으로 말씀 안에서 성장한 것이다. 말씀의 전통 안에 선 것이다. 반면에 그러다 보니 그들이 처음 사랑이 식어지는 딱딱한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이 식어졌다고 주님께 책망 받았던 것이다. 반면에 두아디라 교회는 은혜가 충만해서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열정과 사랑이 식지 않은 교회였다. 그런데 말씀으로 가르침 받고 훈련하는 일을 등한히 했다. 그러다 보니 이세벨이란 거짓 선지자가 들어와서 활동하기가 아주 좋은 토양이 되었다. 다들 은혜는 넘치는데 말씀이 약하니까 꼬임에 넘어가기 좋은 곳이 된 것이다. 결국 지도자들이 말씀으로 양육하길 등한히 한 것이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은혜를 받아도 말씀으로 양육되지 않으면 결국 이단에게 넘어가고 세상에 넘어진다.

거룩이 능력이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다. 복음으로 거짓된 가르침을 이기고 거룩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26-27절).

거룩한 그들에게 권세와 통치권을 주어서, 그들을 통해서 그 행음하는 자들, 거짓된 자들을 철장으로 질그릇 깨뜨리듯 한다. 결국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28절) ‘새벽별’ 예수님을 의미한다(계 22:16).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사람에게는 주님 자신을 주겠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하실까? 체험 많은 사람, 활동 많은 사람이 아니다. 거룩한 사람이다. 그들이 새벽별이신 예수님을 소유한다. 그래서 그들이 이 어둔 세상에 새벽처럼 빛나는 존재가 된다. 오직 복음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다른 모든 것들은 거룩을 해하여 우리로 멸망에 이르게 하는 유혹이다. 복음만 붙들자. 그리고 거룩하자. 거룩이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