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은 다양하면서도 하나로 일치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다양하면서도 하나인 우리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첫 출발, 확신, 훈련, 일, 일상, 지혜, 성령, 주일성수, 국가, 그리고 자유일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첫 출발로부터 자유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시작해 보자.
출발이 있다면 목적지도 있어야 한다. 그 목표를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영적 성장”이라고 한다.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영적 훈련”이라고 한다.
영적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에베소서 4:13의 말씀은 성장, 자라는 것, 도달하는 것에 대해 잘 표현하고 있다. “되어, 이루어, 이르리니”라는 표현은 성장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결국 종착지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개인의 목표가 아니라 개인을 포함한 공동체의 목표다. 13절의 시작은 “내가”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다”라고 말한다. 성장의 주체는 한 개인의 아니라 공동체인 것이다.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라는 직분과 일꾼을 주신 것은 12절 말씀처럼,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이 말씀의 다른 버전은 13절 말씀이다. 12절의 최종적인 교회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13절의 성장의 목표점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다. 이것을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다시 표현해 보면, “그리스도가 충만한 교회”가 된다. 개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닮는 것, 공동체로서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는 것에 있다.
이것은 교회만을 위한 충만이 아니다. 교회가 충만해야, 그것이 세상 가운데 흘러나가 세상까지도 충만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다(엡 1:23).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얼마나 깨닫는가에 따라,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따라 충만의 정도가 커진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성장의 목표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와 연결된다. 즉 성장의 목표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이라면, 성장의 수단은 그 충만하신 그리스도를 얼마나 우리가 믿고 아는가에 달려 있다.
영적 성장의 수단은 두 가지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서로 다른 것, 서로 다른 종류가 아니라 구별할 수 없는 하나이다. 믿음에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식에도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역사적 경험적으로, 믿음과 지식이 분리되는 예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처럼 살지 않는 경우들이 많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반대로 아는 것에도 믿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한 지식과 믿음의 지식은 다르다. 조직신학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닌 다른 형태의 믿음을 구별하고 있다. 믿음이 없는 지식으로만 아는 “역사적 신앙”과, 반대로 감정에 기초를 둔 “일시적 신앙” 같은 것이 있다.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 것은 이처럼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된 것이다.
또한 이런 믿은 것과 아는 것에 공동체 전체가 하나 되어야 한다. 이러한 목표에 이르는 과정은 공동체 전체의 과제다. 공동체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으로 하나 된다. “하나됨”이라는 통일성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께 맞추는 데 있다. 바울이 말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이라는 표현도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뜻”이어야 하지, 다른 누군가의 말이 아니다. 에베소서 4장은 공동체를 강조한다. “몸도 하나, 성령도 한 분, 부르심의 한 소망, 주도 한 분,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하나님도 한 분”이라고 말씀한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것,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으로 하나가 되는 그런 믿음, 그런 아는 것이 ‘나’를 서장하게 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고, ‘우리’를 성장시켜 “그리스도의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한다.
성장해야 하는 이유
성장해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는 우리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사람의 속임수, 간사한 유혹, 교훈의 풍조에 요동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유혹에 빠지거나, 교훈의 풍조에 밀리거나 하는 것아 바로 “요동한다”는 뜻이다. 세 가지 단어가 중요하다. “빠지거나, 밀리거나, 요동하거나”이다. 결국 우리가 성장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빠지거나, 밀리거나,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는 “온전한 사람”과 반대된다. 이런 상태를 “어린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린아이”인가? 아니면 “온전한 사람”인가?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빠지지 않는다.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밀리지도 않는다.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흔들리지도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성장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영적 성장이 가능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영적 훈련”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적훈련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실재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영적훈련이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이 정의의 핵심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자기계발”과 “영적훈련”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훈련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훈련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내 삶 전체로 확대되고 충만하게 된다.
훈련의 핵심은 먼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내셔서,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하기 전에, 자신과 먼저 함께 있게 하셨다. 관계가 일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가 많은 문제가 있어도, 바울은 이렇게 소망한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디모데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사역하기 이전에,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딤후 2:1)라고 먼저 권면했다. 이것이 영적 훈련이며, 이 훈련을 통해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믿음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영적훈련의 성숙도. 훈련이 되었는지 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특별히 그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그 일을 숙달되게 하는 것이다. 예배 훈련이 잘된 사람은 교회 가는 것에 걱정하지,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기도훈련이 잘된 사람은 기도하는 것에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한다. “기도해야지... 기도해야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그냥 한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실 때, 민첩하게 행하는 것! 이것이 훈련된 모습이다. 기억해야할 것은 훈련된 것만이 성장하며, 사용된다!
영적 훈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기독교 역사를 통해 많은 신앙훈련에 대한 경험과 연구에 대한 전통이 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시간을 확보하고 고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경건의 시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중심으로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틀에서 안정감을 유지하고, 생활을 모든 영역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것이 영적훈련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모든 영적훈련의 전통들을 이 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경건의 시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의 기본적인 방향을 유지하게 해 준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만남, 생활을 하나님과의 경건의 시간에 맞춰 재 정렬해야 한다. 이러한 경건의 시간을 통해 만들어지는 생활의 리듬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초점을 유지하도록 돕는 장점이 있다.” 마음의 다짐은 아직 훈련이 아니다. 훈련은 그 다짐을 구체적으로 시간과 장소로 옮겨 매일의 삶 속에서 반복하는 것이다. 감동이 없어도, 이 시간의 중요성을 나의 성실성으로 이어가는 것이 훈련이다. 무엇보다 이 경건의 시간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적절한지를 측량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일상의 시간 속에서 문득 드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 어느 때 보다 집중된 이 시간에 내 삶에 대한 회개와 반성을 하게 된다.
기본적은 삶은 신앙의 기본적인 생활을 형성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에 가장 앞장선 네비게이토의 제자훈련의 원리를 보면, 제자훈련의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로 “기본적인 삶 형성”이라는 단계가 있다. 경건의 시간을 통해, 반드시 자신의 삶에 이끌어 내어야할 것은 기본적인 신앙생활의 패턴, 습관, 삶을 형성하는 것이다. 네비게이토에서는 그 기본적인 삶을 그리스도 중심의 말씀, 기도, 교제, 증거의 삶을 순종하는 것이다. 교회 식으로 말한다면, “말씀, 기도, 예수제자, 복음증거, 이웃사랑”이다.
이것은 네비게이토만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 전체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원리다. 경건의 시간을 거점으로 생활전체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 시간표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그 첫 단계가 바로 기존적인 생활 형성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일주일 위의 시간표를 작성해 보고, 삶의 패턴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에서 경건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적용해 가는 것이다. 이 과정 자체가 바로 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표라는 것을 사실상 어떤 방향도, 목적도, 일관성도 없는 경우들이 많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훈련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잘라내야 한다. 말씀을 읽는 시간, 기도할 시간, 전도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아야 할 사람들을 찾아갈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내 삶의 기본 리듬으로 만들어야 한다. 한 주간의 삶 정확하게 기록하고 관찰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 훈련하는 삶의 모습인지, 아니면 기분과 취향과 우연의 요소들로 가득 채워진 것들인지를 살펴야한다.
고든 맥도날드는 “계획되지 않은 시간의 법칙”을 네 가지로 말해왔다. 그 중에 두 가지만 소개한다면, 제일 법칙,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나의 약점이 있는 곳으로 흐른다.” 제이 법칙, “내가 속한 영역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좌우된다.” 이것을 적용해 본다면, 내가 훈련되지 못하면 나의 삶은 나의 약점으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또 내가 훈련되지 못하면, 내 영역 속에 있는 지배적인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의 지배적인 “온갖 교훈의 풍조”가 내 삶과 내 계획과 내 시간표에 밀려들어오게 된다. 주일을 지켜야 할 시간을 나의 약점으로 다른 유혹에 넘어가거나 세상의 풍조에 밀려 다른 약속을 잡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경건의 시간을 거점으로 기본적인 생활을 형성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자신의 소명에 따라 삶 전체로 확대
이제 마지막 과정인 삶 전체의 독특성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소명,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라진다. 삶을 형성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 이루어진다. 기본적인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적인 부분이지만, 그 이후의 삶 전체에 걸쳐 펼쳐지고 확대되는 소명으로서의 삶은 각 개인의 고유한 삶의 스타일이 될 것이다. 결국 영적 훈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훈련이다. 그 훈련으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됨을 이루어, 그 충만함이 세상에 까지 미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훈련, 또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은 경건의 시간을 고정시키는 훈련이다. 그 시간을 통해 기본적인 삶을 형성하도록 하는 훈련이고, 소명에 따라 자신의 삶 전체를 그 소명에 맞춰 확대하는 훈련이다. 훈련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확고한 의지와 노력으로 익숙해질 때 까지 이루어가야 한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실 때 필요한 사람ㄹ이 되는 것이고, 훈련할 때는 힘들지만 훈련이 되면 그 일 자체가 자유함이 될 것이다. 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데, 시작할 때의 감동이 사라지면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에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는가? 훈련되지 않아서다. 훈련되어야 진정한 감사와 기쁨과 평안, 그리고 자유함이 있다. 모두에게 충만함이 넘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