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년간 발생한 "대규모 교회이탈"을 둘러싼 통계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멀어지는 여러 이유에 대한 각종 추측과 더불어 다양한 논평 및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예배에 빠지지 않는 교인들을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모습조차도 낙관적인 전망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에는 열심히 출석하는지 모르지만, 그런 신자들 중 상당수가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 그들에게 등록하고 출석하는 교회가 있다는 건 그리스도의 왕국이나 사명과는 무관한, 단지 삶의 보조 수단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다.

얼마 전 나는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 교인 중 한 명과 나누었던 진지한 대화에 관한 것이었다. 그냥 겉으로만 볼 때 내 친구가 대화를 나눈 그 교인은 말 그대로 열심히 교회에 헌신하고 봉사하는 신자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친구는 그 교인이 사실상 교회의 핵심 교리 몇 가지를 은근히 무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역사적인 기독교 가르침의 틀을 벗어나 성적 부도덕을 용인했고, 나아가서 영원한 심판을 아예 부인했다.

“나는 그 부분에 있어서 교회가 틀렸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나는 교회 오는 게 좋아요. 공동체 느낌 같은 거, 참 좋잖아요.”

그게 그의 태도였다. 그에게 교회는 단지 종교적 재화와 서비스를 효율적으로 제공하는 기관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진정한 믿음의 확신과 헌신이 부족했다. 

기독교가 당신에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을 때

내 친구는 그 교인에게 다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기 힘든 게 있나요? 다시 말해서, 아무리 힘들더라고 꼭 따르고 싶은, 그런 기독교의 가르침이 있습니까?”

이 질문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기독교는 언젠가는 모든 사람의 감정을 거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구 많은 지역에서 성 윤리 또는 구원과 관련한 그리스도의 배타성을 중심으로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역에 따라서 갈등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갈등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모든 세대에 걸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엄중한 말씀과 제자도의 함의를 놓고 씨름해 왔다.

지옥, 삼위일체, 성경적 결혼 등 정통 교리를 옹호하는 일부 교인들 중에서조차도 성경의 명령이 정치적 편의주의와 충돌할 때면 정통 교리의 허점을 찾으려고 한다. 부에 대한 성경의 경고, 자비에 대한 부르심, 연약한 사람들에게 보여야 할 연민 등 이러한 가르침은 종종 우리의 문화적 또는 정치적 본능에 도전한다. 만약 성경이 당신의 개인적 또는 정치적 견해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면, 즉 산상수훈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고 나아가서 예수님의 비유도 재해석하여 기독교적 사랑의 범위를 편리하게 축소하는 게 가능하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다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의 가장 깊은 신념이 진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기독교의 모든 주장이 우리에게 마냥 쉽게만 다가온다면, 그건 예수님이 알려주신 기독교가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길을 어렵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의 핵심 인물 파우스투스에 반박하며 이렇게 말했듯이 말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믿고 불리한 것은 믿지 않을 때, 그건 복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결코 지고 싶지 않은 십자가

우리는 스스로를 시험해야 한다. 나는 지금 참되신 하나님에게 충성을 맹세하는가, 아니면 내 머릿속에서 상상의 신을 만들어내는 데에 만족하는가? 그분의 계시에 포함된 거친 부분을 내 취향에 맞춰서 다듬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그분이 자신에 대해 하시는 말씀에 기꺼이 복종하는가? 비록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말이다.

이 질문들은 중요하다. 지키기 어려운 하나님의 계시에 기꺼이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뜻이 우리 삶을 불편하게 만들 때 내가 그분의 뜻을 기꺼이 행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십자가를 지고"와 "너의 꿈을 쫓아라"는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당신의 기준이 "꿈을 쫓는 것“이 될 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는 약속에 헌신하는 가족의 모임이 아니라 당신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조력자로 전락할 것이다.

기독교의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이 불편하다. 다른 쪽 뺨을 돌리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구걸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것은 어리석게 보인다. 평생 신실하게 결혼 서약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나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어리석다. 매주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지나치게 느껴진다. 거듭거듭 용서하는 것은 순진해 빠진 생각이 아닌가? 세상에, 영원히 불타는 불이라고? 이런 위협은 터무니없게만 들린다. 구주로서 예수님의 유일함은 편협하게만 보인다.

내 직감에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 중 상당수가 쉬운 기독교의 유익을 조용히 누리는 게 아닌가 싶다. 즉, 명령은 필요 없고, 순종하는 데 별다른 노력을 요구하지 않으며, 짊어질 수는 있지만 결코 짊어질 마음이 없는 십자가를 찬양하는, 그런 기독교 말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부르심 없이 십자가라는 선물만을 원한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은 “내 멍에를 메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성령의 임재와 능력 덕분에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여전히 멍에가 들어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

적지 않은 교회가 교리의 분명한 경계를 흐린다. 제자도가 주는 불편함을 최소화하며, 액세서리로 전락한 형태의 신앙을 기꺼이 수용한다. 하지만 인생에 언제나 폭풍은 치고, 바람은 분다. 폭풍이 몰아칠 때, 그런 신앙은 모래 위에 세운 집처럼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할 것이다.

모래 위에 지은 집, 나의 취향과 선호에 따라 끊임없이 변신하는 신앙은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시련을 견디는 것은 반석 위에 세운 집이다. 흔들리지 않는다, 움직이지도 않는다. 사람의 취향에 맞춰서 재편되는 신앙이 아니라, 신자라면 누구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기초에 뿌리를 내린 신앙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신앙과 관련해서 힘들게 느껴지는 부분이 전혀 없는가?

기독교 가르침 중에서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게 전혀 없는가?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내가 받아들인 것이 기독교의 험난한 현실인지, 아니면 어디에서나 제공되는 널리고 널린 쉬운 위조품 중 하나가 아닌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출처: The Ever-Present Search for an Easy Christian Fa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