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us Tuğ/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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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종교 현상에 관심을 가졌던 월터 클라크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무언가를 극히 일부만 얻고서는 진짜를 얻어야 할 필요를 없애버린다”라고 했다(Ernest Kurtz and Katherine Ketcham, The Spirituality of Imperfection, 23에서 재인용). 이 진술이 교회에 주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역할적 정신의 감옥에 잠들어 있는 교회의 신앙과 삶을 깨우기 위한 도전을 내포하고 있는 진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인간의 역할적 정신 또는 이성을 통해 분석할 수 있는 유형의 교리와 도덕과 제도 등은 중요한 요소로 주목하지만, 무형의 영성, 경외 등과 같은 차원은 상대적으로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awe)의 성향과 같은 영적 차원을 이차적인 요소로 여기게 되면 불공명적 신앙과 삶을 초래할 수 있다.

경외 또는 경외심은 우리 삶에서 성스럽고 숭고하며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경험과 기쁨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거대한 신비와 맺은 관계에 대한 정서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드리안 반 카암은 경외의 성향(the disposition of awe)을 우리 안에 창조적 선물로 주어진 선(先) 성향으로 인간의 생체적 성향과 정신적 또는 역할적 성향을 뛰어넘는 초월적 성향으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경외의 성향은 인간의 생체적 몸과 역할적 정신과 상호성 안에 있을 뿐 아니라 이것들 모두에 대해서 점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성향이다(아드리안 반 카암, 인간 형성, 370).

경외의 성향은 도나 조하(Donah Zohar)와 이안 마셜(Ian Marshall)이 제시한 영적 지능(Spiritual Intelligence)과 비견될 수 있는 성향으로, 영적 지능이 다른 지능을 의미 있게 하고 통합하는 역할을 하듯이, 경외의 성향도 다른 성향들을 의미 있게 하고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조하와 마셜에 따르면, “IQ가 낮으면 합리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EQ가 낮으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낯선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SQ가 낮으면 우리 존재 자체가 불구로 된다.”(도나 조하, 이안 마셀, SQ: 영성 지능, 261) 이와 같이 경외의 성향도 다른 성향들, 즉 생체적, 역할적 성향을 의미 있게 하고 통합시키는 근원적 성향이기도 하다. 경외의 성향은 공명과 일치의 성향이다. 경외의 성향은 다른 형성적 성향들과 공명할 뿐 아니라 다른 성향들의 의미들을 더 깊게 뿌리내리도록 하는 성향이다. 따라서 경의의 성향이 결핍되거나 배제되면, 삶의 의미를 순간 너머를 바라보거나 사태를 더 큰 의미와 가치의 구조에 자리매김하는 능력이 부족하게 된다.

깊은 차원에서 경외는 예배를 잘 풀어 쓴 표현이다. 경외는 예배를 통해 가장 심오하게 표출될 수 있다. 경외는 예배의 핵심적인 성향이다. 또한 하나님 경외와 사랑에 의해 촉진되는 예배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포용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에 관한 파악과 이에 따른 인정이자 긍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의존성은 단지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존성은 경외와 사랑을 갈망하는 의존성에 가깝다. 따라서 신적 신비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통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로 만든다. 여기서 의존성은 ‘나는 당신 없이 살 수 없어’라고 말하는 의존성과 같은 것이다. 이 의존성은 인간의 자유와 공명적 삶을 높여 주는 의존성이다. 이는 나는 당신과 관계에서 무엇이 다르고 나의 한계를 없애 주는 것에 대한 욕구 안에서 자라는 의존성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의해 촉진되는 의존성은 경외의 한 성향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경외는 공명적 문화와 인간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경외로 충만한 사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과의 관계에서는 합치의 성향,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연민의 성향, 몸담은 사회-역사적인 상황 속에서는 융화의 성향, 즉 공명적 삶을 형성해 가기 때문이다.

나아가 경외의 성향은 신적 신비와 현현을 경험하는 핵심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몸, 자연, 시간, 이 땅의 실재로부터 거리를 갖고, 혹은 무시하며 신적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창조적 선물인 몸, 자연, 시간을 거룩한 것으로,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의 현존을 축하하므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외 성향의 핵심 형태인 기독교 예배는 지상적이고 물질적이며 현세적이다. 기독교 예배는 몸과 분리된 천상의 영혼이 참여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예배는 언제나 물질을 통해 의미를 만드는 사건이며,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불가피하게 성례전적이다.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근본적이며 시원적인 직관은 예배 안에서 표현될 뿐만 아니라 예배 전체가 바로 그런 현상, 즉 인상과 경험이다. 창조 세계에 대한 이러한 예전적 긍정은 흔히 세계에 대한 성례전적 이해로 설명한다. 창조 “세계가 예배의 수단과 은혜의 수단인 것은 우연이 아니며, 예배를 통해 세계의 의미가 계시 되고, 그 본질이 회복되며 그 운명이 성취됨을 뜻한다(Alexander Schmemann, For the Life of the World, 121). 여기서 창조 세계의 물질이 어떤 마술적인 신비나 힘에 따라 성례전적인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물질을 예배의 맥락 안에서 성례전적으로 취하며 바라볼 때, 그것은 자연적인 성례전성이 강화되며 완성된다. 따라서 예배는 창조 세계의 물질적 존재를 의도된 그 본래의 목적을 향해 방향 짓고 다시 방향 짓는 행위이다. 우리가 창조 세계와 성례전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자연 또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벗어난 심연으로부터 성장하게 하는 행위가 된다. 경외의 성향은 우리가 자연을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 유혹과 소유자가 되려고 하는 습관을 버리게 하는 힘으로도 작용한다.

물론 창조 세계에 대한 성례전적 이해는 유혹도 존재한다. 이는 특히 교회의 공적 성례전을 주변화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비록 모든 피조물이 성례전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피조물이 같은 정도로 성례전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성령은 모든 피조물 안에 거하시지만, 특정한 장소와 사물, 행동 안에서 성령의 임재가 강력해질 수 있다. 일상 안에서 삶이 예배라고 여기면서 공동체로 모여 함께하는 공적 예배나 성례전을 무가치하다고 여기거나 무시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니다.

나아가 우리의 예배에서 창조 세계의 성례전성의 강화는 세상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다른 삶을 위한 최상의 준비하고도 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예배로의 부르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뿐 아니라 참 인간이 되라는 초대와도 관계되기 때문이다. 제임스 스미스에 따르면, 우리를 예배로의 부르신 것은 “‘종교적인’ 무언가, 우리의 ‘일상적’ 삶에 덧붙은 무언가를 행하는 부르심이 아니다. 이것은 참 인간이 되라는 부르심, 즉 온전하고 참된 인간이 되어야 할 소명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공동체와 백성이 되라는 부르심이다.”(제임스 K. A. 스미스,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245) 그러므로 예배는 참 인간이 되라는 부르심, 즉 세상을 향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양육하기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과도 관계된다. 특히 예배는 우리의 삶에서 공명성 또는 통전성을 육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커리큘럼과도 관계된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예배의 핵심 요소인 경외는 우리의 삶이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단편화되고, 분열된 상태에서 공명적 삶을 형성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경외의 성향은 우리가 하나님과 공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와 공명하게 하는 힘으로도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