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 Kell/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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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오늘 설교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낀다.

물론 당신은 더 잘 준비하고 싶었고, 말씀을 놓고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무엇보다 영적으로 잘 무장된 상태에서 강대상에 오르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고, 하나님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설교 전 마지막 찬양이 시작되었다. 이제 곧 설교를 시작해야 한다. 좌중을 둘러보는 당신 눈에 처음 보는 얼굴이 보인다. 아, 내가 평소에 이렇게 약하게 설교준비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 게다가 영적 방황 중에 있다고 알려진 교인도 오늘 예배에 참석했다. 아니, 왜 지난 주일에 오지 않았던 걸까? 교인들이 오늘따라 더 영적으로 굶주려 보인다. 성령님이 현존하시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내가 저들을 실망시키는 건 아닐까?

당신은 강대상에 올라간다. 많은 눈이 당신을 올려다본다. 당신은 설교를 시작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먼저 용서를 구합니다. 우리 큰아들이 일주일 내내 아팠고, 그래서 설교 준비에 많은 시간을 쏟지 못했습니다.“ 아니면, "좋은 아침입니다... 목소리가 잘 안 나오는 걸 용서해 주십시오. 감기에 걸렸거든요."

이런 말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없으면 좋으련만. 나로서는 아주 문제가 많은 발언이다. 이런 식으로 사전에 변명을 하는 건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앞에 있는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서가 아니라, 인간이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교만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마냥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든다.

그럼 설교 준비를 하는 주중에 직면했던 장애물을 강조하는 것이 항상 잘못된 걸까?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 부족한 요소를 설명하는 게 항상 자기애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절대로 문제점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규칙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게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서는 태도라기보다는 징징거리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하며, 자존심을 달래고, 변명이나 늘어놓는 도입부가 되어, 사람들이 당신과 당신의 전달 방식, 그리고 당신의 언변 에 불과한 게 아닐까? 사람들이 당신, 당신의 언변, 당신의 설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부적절한 민감함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설교자라면 마땅히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은 낮추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교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씀으로 곧장 들어가는 게 더 신실하고 남자다운 태도이지 않을까? 이 질문에 각자 스스로 답해야 하겠지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 그러나 제게 있어서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수면 아래 있는  것

이런 이야기가 당신에게 어떤 경각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별 문제가 안 되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멀리서 레비아탄이 수면에 떠오르는 것을 본 선원이 당황하는 건 그 짐승이 단순히 숨을 쉬려고 올라왔기 때문이 아니라(배를 삼키려고 올라온 게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레비아탄을 보았기 때문이다. 숨을 쉬러 올라오는 것으로는 별 문제가 안 될지 몰라도, 수면 아래에서 헤엄치는 것은 아무런 경고 없이 파괴를 일으킨다. 교인들에게 사과하는 것으로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자기중심성은 결코 그렇지 않다. 교만은 죽여야 할 대상이다. 자기변명을 늘어놓게 놔둬서는 안 된다.

빈약한 설교를 변명하는 것은 자기도취의 여러 표현 중 하나에 불과하다. 부정적인 피드백에 충격을 받는 것은 그 하나고, 칭찬에 군침을 흘리는 것도 그 마찬가지다. 리처드 백스터는 이렇게 묘사했다.

부끄러움만 아니었다면,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자신에 대한 칭찬을 이끌어내려 했을 것이다. 자신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무슨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기뻐하고, 자신이 그저 그렇거나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면 바로 눈앞에 있던 상을 놓친 것처럼 낙담한다. (The Reformed Pastor, 126쪽)

위대해 보이고 싶은 사람은 큰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이다. 교만한 사람은 타인이 내리는 낮은 평가에 겁을 먹는다. 은밀한 교만은 사람을 깨어지기 쉽게 만든다. 그런 마음은 평론가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의 마음이지, 결코 주인의 메시지를 똑바로 전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전령의 마음이 아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나팔수를 상상해 보라.

이 사람은 당장 강단에서 내려와야 하고, 다른 사람을 세워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설교를 마친 다음에 로비에서 교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려 할 것이다. 사람을 낚으려는 게 아니라, 행여 칭찬을 낚을 수 있지 않을까, 교인들이 설교에서 특히 마음에 들어 했던 부분이 어딘지 알기 위해서 말이다. 누군가가 그의 설교에서 고쳤으면 하는 부분을 지적한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당장 풀이 죽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점점 더 깊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발톱과도 같다. 주님, 우리 모든 전령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약함 변명

사도 바울은 누가 칭찬해 주거나 토닥거려 주는 데 연연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과 사역은 공존이 불가능했다(갈 1:10). 바울도 그의 사역에서 겪은 고난과 어려움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 방식은 전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변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했다.

바울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었다. 귀신들조차도 그의 이름으로 알고 두려워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님의 일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이러했다.

내가 자랑하려 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터이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은 삼가겠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서 보거나 들은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후 12:6)

바울이 원했던 건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약함으로 알려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바울과 다르다. 나는 나 자신의 약함을 말하면서도 은근히 ‘보통은 잘한다’는 점을 강조하려 든다. 나는 약점을 자랑하지 않는다. 어떻게든지 설명해서 이해시키려고 한다. 나의 자존심은 사람들에게 ‘보통은 이보다 훨씬 잘한다’는 걸 알리려 한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업적을 숨기고, 자신의 약점을 드러냈다. 자신의 강함을 자랑함으로 하나님의 강하심이 가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 실제보다 더 높게 여기지 않기를 원했다. 

교만이 변명하게 두지 말라

바울도 한때는 육신을 자랑하고 약함을 멸시하던 삶을 살았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를 그리스도의 의로 바꾸었을 때, 그는 자신을 드러내려는 싸움을 그만둔 것 같다. 그는 그리스도께 오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유대인 남자가 되고 싶어 했던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빌 3:7-8)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나’였던 그가 가장 합당하신 ‘그리스도’로 대체되었다.

목사들이여, 강대상에 오를 때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히 서되, 육신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말라. 설교단에 당신의 소명이 없다면, 더 이상 거기에 있지 말라. 그러나 설교하라는 하나님의 부름이 계속 있다면, 당신의 상태가 어떠하든, 어떤 한계에도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라. 그분이 당신을 낮추길 원하신다면, 무릎을 꿇고 나아가라. 평소보다 더 많이 넘어지는 게 그분의 뜻이라면, 그 거침 속에서도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러나 왜 내가 평소와 달리 오늘 설교가 인상적이지 않은지를 변명하려고 몸을 굽히지는 말라. 당신을 잊고 성도들과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오로지 구주만을 선포하라. 특히 약할 때 더 그래야 한다. 이때야말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당신 안에서 가장 충만하게 머물 때이기 때문이다.

출처: Don’t Be Sorry for the Serm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