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yen Vo/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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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은 다양하면서도 하나로 일치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다양하면서도 하나인 우리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첫 출발, 확신, 훈련, 일, 일상, 지혜, 성령, 주일성수, 국가, 그리고 자유일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첫 출발로부터 자유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시작해 보자.

앞서 ‘그리스도인과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일을 뺀 나머지의 시간들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이런 지극히 일상적인 부분에까지 신앙적이어야 하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적인 삶이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일상에까지 파고들어 하나님을 향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에릭 리델은 “나는 바람처럼 달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산책하며 걸을 때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며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그분의 임재하심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화가 빈센트 반고흐는 자연을 바라 볼 때 “모든 자연이 무언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거나 느끼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눈과 귀와 깨달을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유명한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미국의 그랜드 캐년 전망대에서 콜로라도 강이 만들어낸 엄청난 지형을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마침내 극적이 탄성을 터뜨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아주 특별하고 아주 신령한 것들에서 신앙의 최고의 모습을 찾는 경향이 많다. 기적이 일어나거나 아니면 중요한 일을 하는 것들이다. 물론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이런 것들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숨결이 닿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솔직히 말해서, 과거에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저렇게 억지스러울까?” “왜 저렇게 인위적일까?” 라는 생각을 많이 들론 했다. 그냥 그대로면 충분한데, 왜 굳이 내가 했다고 말하고, 알아주기를 바라는지? 그냥 그대로이면 은은한 향기일 텐데, 왜 구지 그것에 “내가, 내가, 내가”라는 것을 강조해야하는지! 우리는 눈에도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지 않고 억지스러웠다. 좋은 일을 좋게 보이게 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신앙이 억지스럽고 힘이 들어간 모습의 원인을 일상에까지 스며드는 하나님의 손길과 뜻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창조의 영성’이 없기 때문이다. 타락과 구속이라는 두 가지 원리 가운데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 사역에, 그 삶에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이 없는 것은 창조라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세계를 느껴보지 못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항상 특별해야 하고 항상 주를 위해 살겠다고 말하지만, 그 모든 게 불안해 보이고 억지스러워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창조 세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그 일상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과거의 억지스러워 보이는 사람들

디모데전서 4:1-5에는 “결혼하지 말라” “먹지 말라”(3절a)라고 말하는 사람들, 잘못된 신앙의 가르침에 빠져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부정하며 살아가는 극단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먼저 소개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무척 거룩하며 경건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금욕적인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물질적인 모든 것을 악으로 여기고, 하나님은 그런 물질을 만드신 분일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재로 초대교회에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이 있었다. 이들은 심지어 물질을 만든 신은 선한 신인 하나님이 아니라 악한 신이라고까지 강조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의 실상을 두 가지 면에서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데, 첫째는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은 ‘믿음에서 떠났다’고,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랐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1절). 또한 둘째는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에도, ‘마비된 양심’과 ‘외식’과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2절). 

오늘날의 억지스러워 보이는 사람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억지스러운 이단’과 같은 ‘억지스러운 신앙’이 있었다. 무엇을 부정하고 무엇을 분별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선과 악, 거룩함과 부정함, 교회와 세상이라는 두 가지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영지주의’이다. ‘영지주의’는 과거뿐만 아니라 또 다른 모습으로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쳐서, ‘이원론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형태를 고수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때나 지금도 여전히 “육신”을 좋지 못한 것으로 여기며, “세상”을 악하게만 생각하며 살아갔다.

전술한 바와 같이, 창조 없이, 타락과 구원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신앙은 경직되고, 구원을 통해 주신 자유는 별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된다. 결국 별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자유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 10:23). 이 말씀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라는 전제가 없다면, 그 다음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자유란 그저 억지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렇게 “이원론적 사고방식”의 틀로 살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펼쳐주신 삶이 아니다. 흑과 백으로만 된, 두 가지만 놓여있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것이 있지만,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것을 억지로, 인위적으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영지주의, 이원론적 사고, 타락과 구원만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가하나”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창조의 세계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억지와 인위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억지스러운 사람들의 가르침과 삶에 대한 답으로 ‘창조’를 말씀하고 있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람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3절). 일단 3절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을 향해 답변한다. 바울의 답변은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더 큰 그림을 보고 있다. 선과 악, 타락과 구원이란 이분법적 세계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더 넓은 창조의 세계인지를 보여 주고 있고, 큰 소리로 대답해 주고 있다. 그리고 성경 말씀에 따라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삶에 두 가지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원칙 1: 대원칙 – 창조, 감사함으로 받기

4절을 읽어보자.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3절 말씀과 비교했을 때, 두 가지가 추가되었다. 하나는 ‘선하매’ 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버릴 것이 없나니’라는 말씀이다. 이는 창조에 대한 추가 설명과도 같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가? 하나님이 먹을 것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입을 원재료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가?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도록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선한 하나님의 창조는 버릴 것이 없는 창조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를 받는 대원칙은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더 구체적인 것을 더하고 있다. 창조와 감사함 사이에, 말씀과 기도를 더하고 있다. 

원칙 2: 세부원칙 – 구속, 말씀과 기도로 받기

5절 말씀을 읽어보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5절은 4절에 대한 추가 설명이다. 4절만으로 끝내기에는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창조된 세계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고 또 구원하시는 세계 속에서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이라는 객관적인 기준과 기도라는 주관적인 기준을 우리가 안전하게 이 말씀을 적용할 수 있도록 제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말씀이란, 창조의 말씀일 수 있고, 또한 복음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창조의 말씀을 의미했다면, “거룩하여짐이라”라는 표현이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창조된 세상이라고 해도, 타락한 세상의 현실이 있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창조된 세상”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다. 3절에 창조를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자를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의 진리의 말씀을 믿고 아는 자만이 창조를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복음의 진리를 알아야 자유함이 있다. 다시 말해 창조의 세계를 타락으로부터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얽매이도록 하지 않는 분별과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 복음의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는 창조세계를 감사함으로 받게 된다. 또한 복음으로 창조를 바라보며 감사하게 된다.

또한 창조된 세계를 감사함으로 받는 주관적인 기준은 우리의 기도다. 우리 안에 거리낌이 있어서도 안 되고, 자유함 가운데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보통 우리는 이것을 ‘식기도’에서만 사용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크심에 맞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영국의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인 체스터턴은 이렇게 감사 기도에 대해 말했다. “당신은 식사 전에 감사 기도를 드린다.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연극과 오페라를 보기 전에도 감사 기도를 드리고, 연주회와 판토마임 전에도 감사 기도를 드리며, 책을 읽기 전에도, 스케치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기 전에도, 수영, 펜싱, 복싱, 산책, 연극을 하거나, 춤을 추기 전에도 감사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펜에 잉크를 묻히기 전에도 감사 기도를 드린다.” 

원칙의 적용: 하나님의 모든 창조 세계를 감사함으로 받는 삶

이런 원칙을 우리의 일상의 삶에 적용하여 살아가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여,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창조전체를 감사함으로 받아 거룩해지는 삶은 또 어떤 삶일까? 나는 그것을 모든 일상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일상을 그렇게 하나님과 연결하여 살아가고자 노력한 전통이 있다. 이것을 위해 노력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우리는 그 연결을 위해서, 우리의 삶의 속도와 리듬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유진 피터슨이라는 유명한 영성신학자는 하나님은 저녁과 아침이라는 2박자 하루 리듬과 육일과 칠일이라는 7박자 리듬을 가지신 분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도 그러한 리듬에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저녁에는 우리가 쉬고, 아침에 일하고, 육일 동안은 일하고 칠일에는 안식하는 하나님의 리듬이 우리의 삶의 리듬이 될 때에 우리는 참되게 일하면서 참되게 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과 쉼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과 연결시키고자 할 때에도 반드시 필요한 리듬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여유도, 하나님과 대화할 여유도 없는 분주한 삶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리듬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 두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는 “갑작스러운 기도”다.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시간들 속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기 위해 실천하는 가장 쉽고 단순한 방법이다. 그것은 분주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삶 속에 붙들기 위해 시도하는 노력들이다. “이 기도는 아침에 깨어날 때, 식사 전에, 직장을 떠나면서, 집에 가면서, 하루가 끝나는 시간에, 잠자리에 들면서 등 하루 동안 여러 시간에 흩어져 있는 짧은 기도다.” 매 순간을 이런 짧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이고, 모든 순간, 모든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잠시나마 누리는 것인데, 그 잠시가 계속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이러한 기도를 “천국에 곧바로 쏘아올린 화살, 천국을 짧게 방문하는 것, 천국의 고상함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둘째는 일과 일상의 분주함을 끊어내는 기술로서의 ‘묵상’이다. 이것을 “때때로 하는 묵상”이라고 한다. 어떤 일들, 어떤 활동들에 의해 우리의 마음의 리듬이 깨어지고 분주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활동에서 다른 활동으로 넘어갈 때, 그 사이에 명확하게 끊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이 시간에 짧은 묵상이, 활동으로 분주해지지 않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음의 일로 넘어가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향기 나듯 자연스럽게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가올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에 두셨으나 우리가 미처 즐기지 못한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정말 해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고, 버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과 함께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에 대한 기쁨과 감사함으로 넘쳐야 한다.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듯이 사는 것이 아니라, 향기 나듯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