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은 아주 짠데, 거기 사는 물고기는 짜지 않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체내의 염분농도를 조절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는 조절능력이 없기에 소금에 절여져서 짜게 된다. 신자로 하여금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게 하는 것은 도덕성이 아니라 생명력이다. 신자가 세상과 비슷해지는 이유는 영적으로 병들었거나 죽어가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3:1-6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그 생명의 주관자이시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1절). ‘일곱 영’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킨다. 그분은 이 땅에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일곱 영을 가지신 분이다. 그리고 그분은 일곱 별 즉 교회의 사자(메신저)들을 손에 쥐고 계신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 말씀을 전파하시고, 성령을 통해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교회는 이처럼 복음이 선포될 때 성령님에 의해서 거듭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세워진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하늘의 생명을 가진 거룩한 백성들의 공동체이다.
명성은 있으나 죽은 교회
그 주님께서 지금 사데 교회를 살펴보신다. 그리고 진단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1절).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다’는 곧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평판(reputation)이 있다는 뜻이다. ‘그 교회 요즘 뜨는 교회야.’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눈에 띄는 행사와 화려한 프로그램이 있거나 시설이나 재정이 넘치는 교회이다. 사람들이 멋진 공연을 보러 극장을 찾듯이 수많은 신자들이 예배당을 메우는 그런 교회이다. 매체를 통해 그 명성이 퍼져나가는 교회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죽은 자’라고 판단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람들의 평판과는 다르게 주님은 그들의 행위를 보시면서 죽은 자라고 하신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2절). 행위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뒤에서는 옷을 더럽혔다고 하신다. 그들의 안과 밖이 다르다. 세상 속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는 더러운 삶을 살아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행사용 장식은 있는데, 살아있는 열매가 없다. 거룩한 삶이 없다. 결국 주님은 그들이 영적으로 죽었기에 그렇다고 판단하신다.
사데 교회는 분명히 한때는 생명력으로 충만한 교회였다. 건강하게 활력 있게 성장하던 교회가 왜 지금은 이름뿐인 교회가 되었을까? 그들에게 ‘깨어라’고 두 번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너는 일깨어”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이들이 영적으로 잠이 든 것이다. 마치 마법의 잠이 든 성처럼 사망의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왜 잘나가던 교회가 영적인 잠을 자게 된 걸까? 너무 평안해서이다. 사데 지역은 대부분 높은 암벽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적으로부터 두 번밖에는 점령당한 적이 없다. 그만큼 완벽한 도시였다. 그러다 보니 나태하고 신전을 중심으로 우상숭배와 도덕적으로 퇴폐한 분위기가 만연했다. 종교적으로도 다른 도시에서와는 달리 유대인 회당과 큰 충돌이 없었고, 헬라인들도 핍박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사데 교회는 다른 교회들처럼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의 어려움이나 환란이나 궁핍을 겪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육신적으로 편안하다 보니 세상과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야성을 잃어버렸다. 점점 약해져서 결국은 세상에 취해서 잠이 들었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3절). 잠이 깜박 들면 시간이 금방 간다. 출근시간도 늦어버린다. 이처럼 예비하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어느 날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된다. 영원할 것 같은 인생은 지나버리고 갑자기 그분 앞에 서게 된다. 준비가 안 되었는데 말이다. 큰 낭패다. 주님은 사망의 잠을 자는 그들에게 뭐라고 권면하시는가?
마지막 남은 불씨를 살리라
마지막 남은 불씨를 살리라고 하신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2절). ‘남은 바 죽게 된 것’은 아직은 죽지 않고 그 숨이 남아 있는 상태를 이른다. 그런데 거의 죽어가는 상황이다. 그것을 ‘굳건하게 하라’는 말씀은 아직은 숨이 붙어 있으니 급히 영양제를 투여해서 살려내라는 말씀이다. 싸늘하게 식었는데 뒤적거려보니 그 속에 아직 희미한 불씨가 남아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시 부채질을 하든지 해서 그 불씨를 살려내라는 것이다.
남아 있는 것, 아직 죽지 않은 이 희미한 불씨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2절).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으니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살려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 앞에 온전한 행위가 무엇일까?
지금까지 보았지만, 주님이 칭찬하시는 행위는 내적인 동기가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소망하는 데서부터 나타나는 행위이다. 그런 면에서 주님께서 ‘네 화려한 많은 행위가 온전하지 않다’ 하시는 것은 가장 근본적으로 내적인 동기, 마음의 변화에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부부가 서로 섬기는 행동이 있는데, 표정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예전처럼 마음에 사랑으로 기쁨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에 없으면 무엇을 해도 온전하지 않다. 이들의 행위가 주님 앞에 그렇다. 예배를 드려도 마음은 다른 데 가 있고, 찬양을 해도 자기 목소리만 뽐내고, 기도를 해도 다른 사람들 들으라고 하고, 봉사를 해도 자기 의만 드러낸다. 그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도 감사도 없다. 지금 주님이 그것을 보시는 것이다. 그 마음에 가득했던 열정과 사랑이 다 싸늘하게 식어서 냉랭하게 죽어가는 그 마음을 보신다. 그런데 가만 보니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니, 그 남은 것에 급히 심폐소생술을 하라고 하신다. 완전히 죽어버리기 전에 사랑의 불씨, 믿음의 불씨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변화는 이 마음, 영혼에서 일어난다. 어느 날 말씀을 듣는데 마음이 뜨거워진다. 기도하는데 눈물이 난다. 갑자기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진다. 이것은 단지 감정적인 체험이 아니다. 죽었던 영적 감각이 살아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에 코에 생기를 불어 살게 하셨다. 이처럼 죽은 영혼에 따뜻한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오면 영혼이 살아난다. 그리고 마음에 전에 없던 기쁨, 사랑이 싹튼다. 이것이 영적 생명의 느낌이다.
이러한 마음의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이 옷을 찢고, 소와 양과 제물을 가져와도 결코 가져올 수 없던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그들이 수천 년 동안 가질 수 없었던 그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얻은 이 엄청난 생명의 가치를 잘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 사랑의 눈물이 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른다. 주님을 찬양할 때 내 마음이 뜨겁고 감동되어 눈물이 흐르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모른다. 그분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묵상하려고 새벽에 깨어나는 그 마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오직 거듭난 사람만이 가지는 하늘의 생명의 감각이란 사실을 모른다.
그러다 보니 그 고귀한 영적인 생명을 방치한다. 아기가 태어나면 온가족이 얼마나 신기해하고 귀하게 여기는가? 그래서 얼마나 잘 돌보는가? 그런데 그 아기를 먹이지도 안고 입히지도 안고 내팽개치면 어떻게 될까? 아이가 힘이 없어지고 점점 심장 박동이 점점 작아져 죽어갈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 안의 영적인 생명이 귀한 줄 모르고 방치한다. 먹이지도 돌보지도 않는다. 결국 영적인 생명의 숨소리가 작아지고, 심장박동이 작아지고 싸늘하게 식어간다. 지금 사데 교회가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한때 마음이 뜨겁고, 사랑과 기쁨의 눈물이 흐르고, 감사와 찬송이 저절로 흘러 넘쳤는데, 지금은 거의 아무런 느낌이 없다. ‘내가 정말 구원받았는지 모르겠어’ 할 만큼 그렇게 내적 생명이 냉랭하게 식어지고 있다. 더 이상 찬양을 해도 감동이 없고,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죽어가고 있다. 숨이 간당간당 붙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하신다. 긴급 심폐소생술을 하라는 말씀이다. 꺼져가는 그 불씨를 다시 살리라는 말씀이다. 예전 사랑방에는 추운 겨울에 방안에 두는 화로가 있었다. 거기에 숯불을 담아놓았다. 시간이 지나서 싸늘하게 식었다 싶다가도 부젓가락으로 파헤치면 그 속에 숨은 불씨 몇 덩이가 남아있었다. 거기에 아직 덜 탄 다른 숯을 올려놓고 후후 불어주면 다시 그 불씨가 살아났다. 다 꺼진 것 같지만 부젓가락으로 헤쳐 보면 아직은 불씨가 남아있었다. 주님을 향해서 뜨겁게 달아올랐던 그 마음이 비록 식어버린 것 같아도 헤쳐 보면 아직은 남아있다. 그것이 꺼지지 않게 다시 그 불씨를 살리라는 것이다. 이 불씨를 어떻게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음 은혜의 자리를 기억하고 거기로 돌아가라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3절). ‘어떻게’ 받았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신다. 처음 은혜 받았던 그 자리를 기억하라고 하신다. 사데 교회가 처음부터 죽어간 것은 아니다. 그들도 한때 번성하고 부흥했다. 뜨거운 때가 있었다. 그러니 ‘네가 처음 은혜 받아서 감격하던 바로 그때를 기억하라’ 하신다. 그 은혜로 마음이 뜨겁고 사랑이 가득했던 그때를 기억하라 하신다.
그리고 ‘지키라’ 하신다. 깊이 묻힌 그 불씨를 꺼내서 그것이 죽지 않도록 다시 부채질을 하라고 하신다. ‘어떻게’라는 말이 반복된다. 그때 그 불길이 어떻게 네 안에서 타올랐는지, 어떻게 그 은혜가 타올랐는지,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식어지고 차갑게 된 이유는 바로 그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들 안에 왕성한 생명이 역사하게 만들었던 그 자리를 떠난 것이다.
그것이 기도의 자리이다. 기도할 때에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고 그들 안에 생명의 태동했다. 또 그들이 말씀 듣기를 즐겨할 때 그 말씀 안에서 자랐다. 그들이 예배하고 찬양할 때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그들의 삶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그들은 열매를 맺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교회는 성장했다. 기도의 우물, 말씀의 우물, 찬양과 예배의 우물에서 은혜를 길어 올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자리를 멀리했다. 결국 그 우물들은 돌로 메워지고 마음에 은혜는 말라버렸다. 종교적인 행위는 남아 있었으나 사랑의 불이 꺼지고 믿음의 불이 꺼지고 소망의 불도 사그라졌다.
그런데 다시 주님께서 막혀버린 그 우물을 파라고 하신다. 과거 물이 나왔던 그 우물, 그러나 우리가 소홀히 한 사이에 마귀가 메워버린 그 우물을 다시 파라고 하신다. 다시 기도의 자리로, 다시 말씀의 자리로, 다시 찬양과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라고 하신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회개하라는 말이다. 우리 생각에는 회개가 가장 먼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고 하신다. 회개가 가장 뒤에 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회개하지 못한다. 잘못한 것을 알지만 돌이킬 힘이 없다. 머리로는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돌이키고 싶지 않다. 그러니 무슨 회개의 눈물이 나올까? 울고 싶어도 눈물이 메말라버린 것이다. 산모가 해산할 때가 되었는데 해산할 힘이 없다. 회개해야 산다고 하는데 회개할 힘이 없다.
어떻게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을까? 먼저 처음 은혜를 기억하고 그때 그 은혜, 생명이 가능하게 한 바로 그 ‘어떻게’를 다시 붙잡는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다시 은혜의 우물가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다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다시 마음이 뜨거워져서 그 얼어서 굳은 것이 녹아지기 시작한다. 눈이 열려서 내가 얼마나 멀리 떠났고, 내가 얼마나 더러웠는가를 알게 된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돌이키게 된다. 마음을 찢으며 통회하며 자복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며 돌이킬 수 있다. ‘주님 제가 멀리 떠났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 찬양과 예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전처럼 간절하게 말이다.
살아있는 믿음은 옷을 더럽히지 않는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4절).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소수가 있었다고 하신다. 그들이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닐 것이라고 하신다. 장차 그들이 천국에서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닐 것라는 말씀이다. 그들이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하신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믿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배웠다. 그런데 여기서는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 우리의 깨끗한 행위로 간다는 것인가?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5절).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이다. 그 시대의 우상에 무릎 꿇지 않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이 흰옷을 입는다. 천국 예복이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주님이 시인하신다. 어디에도 ‘믿어야 간다’는 말이 없다. ‘이겨야 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물론 믿음으로 천국 간다. 그런데 이 계시록에서 심판의 주님이 미리 오셔서 보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 믿음이 진짜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믿음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무엇인가? 행위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자신의 거룩한 삶으로 입증해야 한다.” 즉 진정한 믿음은 바로 우리의 행위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 결론 부에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진정한 믿음은 옷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단한 번도 옷을 더럽힌 적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흠도 티도 없는 흰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주님은 흰옷입고 천국에 들어온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 22:14).
그들의 옷이 흰 이유는 그들이 아무런 더러운 것을 묻히지 않아서가 아니다.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은 것이다. 그 피로 두루마기를 빤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너는 한 번 더러워졌으니 탈락이야’ 하지 않는다. 넘어질 때마다 그 죄를 자백하면 씻어 주신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곧 날마다 씻는 사람이다. 날마다 회개하는 사람이다.
누가 깨끗한 삶을 추구할까? 아침에 어제 입던 작업복 먼지 묻은 것 그대로 입고 나온 사람일까? 아니면 아침에 새롭게 세탁한 새하얀 드레스, 깨끗한 정장을 입은 사람일까? 이미 깨끗한 사람은 하루하루 더럽히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조심해서 살아간다. 하루하루 성령님을 의지하여 죄를 이기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점점 그는 죄에 넘어지는 횟수가 줄어든다.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를 보면 주인공이 외계인으로부터 신비한 능력을 얻어서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다. 그러면 다시 살아나서 이미 전날에 전진한 곳까지 가서 다시 또 이겨 나간다. 그렇게 매일 다시 죽고 다시 살아나서 전진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와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살아난다. 모든 죄는 다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새롭게 출발한다. 그렇게 매일 전진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기는 자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
이것이 새생명의 특징이다. 우리는 하늘의 생명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가진 거룩한 하늘의 생명은 이 세상의 것과 다르다. 그래서 이 세상 가운데 있지만 이 세상에 섞이지 않는다. 어둠의 세상 속에 있지만 그 어둠에 물들지 않는다. 우리는 흰옷을 입은 거룩한 공동체이다. 그런 우리 가운데 주님이 함께 거하신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이요 능력이다.
주님은 옷을 더럽히지 않은 소수에 주목하신다. 하나님의 역사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진 다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바로 이 복음의 능력으로 철저히 변화된 소수이다. 철저히 복음으로 거듭나서 하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휫필드가 그랬다. 존 웨슬리가 그랬다. 시대마다 자신의 삶을 드린 몇 사람에 의해서 그 시대가 달라졌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 거룩한 소수가 되길 바란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의 생명력으로 충만하여 역사를 바꾸는 창조적인 소수가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