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그렇다 손치더라도 점점 우리 사회는 분열과 대립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주제는 시민사회에 큰 숙제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찢겨지고 반목하는 관계를 치유하고 화평케 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세상 관점과 가치의 하부 구조가 되어 컬트 집단처럼 되어버린 현상을 마주하노라면 단순한 다원주의가 아닌 극단적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절박한 물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팀 켈러는 “교회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곳이 되어야 하며, 세상의 이슈들에 침묵해서는 안 되지만 지나치게 거칠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여서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진리 안에서 화해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의 부름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화목케 하는 말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고후 5:19) 그리스도인의 직분은 화목케 하는 사역이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단지 다른 가치관 정도가 아니라 적대감에 둘러싸여 박해를 받았던 초대교회 신앙 공동체는 그 적대감에 맞서 증오나 보복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공동체 내부적으로는 하나님께 용서 받은 자로서 회개와 용서를 통해 서로를 용납하고 관계를 맺어감으로 공동체의 건강성을 이루어 갔습니다. 오늘 우리의 부르심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화해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먼저 신앙 공동체로서 하나님과의 화목됨을 누리는 것이 모든 화해의 반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골고새서 1:19-20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됨 없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화목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첫째는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궁극적인 가치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자기중심성으로 가득 찬 죄인과 죄인들인 우리가 더불어 함께한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 서로 양해를 하는 것일 뿐 화목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디트리히 본회퍼는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서로가 맺은 공동체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에게 행하신 일에 기초한다. 기독교적 형제애는 영적인 것이지, 인간적인 현실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다른 모든 공동체들과 구별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케 된 자들로서 할 수 있는 대로 형제 및 다른 이웃들과 더불어 하나 되는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화해를 위한 실천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다원화된 시민 사회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가진 자로 살아가기 위한 실천적 방안은 무엇일까요? 팀 켈러는 우리에게 다음의 질문을 제시하며 이 물음에 끊임없이 익숙해지기를 권면합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을 누리게 된 자에게 공급되는 영적인 자원을 힘입을 때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관과 도덕적 가치 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가는 대화(경청)를 할 수 있을까?
2. 서로의 신념과 상관없이, 더 나은 삶의 터전을 만들 수 있도록 힘을 합칠 수 있을까?
3. 서로 다른 세계관과 가치 체계를 가진 이웃을 악마화하지 않고 존중하며 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실천적 답으로 법학자이자 신학자인 존 이나주는 그의 책 『Confident Pluralism(신뢰 가능한 다원주의)』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가 세 가지 시민적 실천(civic practice)을 통해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1]
첫째, 관용입니다. 그가 설명하는 관용은 다른 사람의 신념에 무관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념에 대해 충격을 받거나 오히려 어떤 경우는 충격을 받아야만 하기도 합니다. 관용의 핵심은 그 신념을 가진 사람이 본질적으로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관용은 ‘사람’과 ‘그 사람이 가진 신념’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며, 그 사람을 천부적 권리, 존엄성, 존중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성경 말씀(약 3:9)을 근거로 하기에 이와 같은 실천이 가능하며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당위성을 갖습니다.
둘째,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의 부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의 신념이 자신에게는 분명하고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믿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이 믿는 도덕적 가치를 동일한 신념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증명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면,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이 어리석다고 단정 짓거나 일방적으로 교정하려는 태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인내입니다. 겸손이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되고, 관용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존중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인내는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희망에서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타인을 대할 때, 상대방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성급히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경청하며,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또한 지치지 않고 서로에게 나아가는 데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이나주는 분열된 관계 속에서 화해를 이끄는 길로 관용, 겸손, 인내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용서’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용서는 복수를 포기하고 억울함을 내려놓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어느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로마서 5:10)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사죄의 은총을 맛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회해 위원회’를 이끈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용서 없이는 미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용서 없이는 진정한 미래도, 평화도, 정의도, 화해도 없습니다. 2025년 서울의 봄은 정의와 화평이 입을 맞추는 은총의 날이 되기를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1] John D. Inazu, Confident Pluralism: Surviving and Thriving Through Deep Differenc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8), 8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