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by Manfred Richte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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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은 다양하면서도 하나로 일치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다양하면서도 하나인 우리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첫 출발, 확신, 훈련, 일, 일상, 지혜, 성령, 주일성수, 국가, 그리고 자유일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첫 출발로부터 자유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시작해 보자.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가? 우리가 보통 일흔 살까지 산다고 가정할 때, TV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약 7년, 잠자는 데 23년, 일하는 데 26년, 양치질하고 씻고 화장실 가는 데 3년 반, 화내는 시간이 2년 정도라고 한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곳은 일이다. 26년! 아마도 한국에서는 최소한 잠자는 사람의 1/3을 일하는 쪽으로 옮겨야할 것 같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연간 일하는 시간은 2,163시간으로써,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근로 시간이라고 한다. 우리는 근로기준법의 하루 8시간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실재로 수면시간도 OECD 국가를 기준으로 보면, 평균 시간보다(8시간 22분) 33분 정도 더 적게 잔다고 한다(7시간 49분). 결국, 한국에서는 잠을 줄여 가면서까지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일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쉽게 짜증이 나고, 기분의 변동이 심하거나, 피부질환이 오거나, 근육이 긴장되고 쑤시거나, 깊은 잠을 자지 못하거나, 매사에 자신이 없고, 별다른 이유 없이 불안초조하고, 쉽게 피로감을 느끼고, 매사에 집중이 잘 안 되고, 음식을 보면 먹고 싶은 충동이 크고, 기억력이 나빠져 잘 잊어버리는 현상이 있다면, 여러분은 스트레스가 많은 것이다.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 ‘즐거움’보다는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

일을 즐겁게 하는 모습은 이제 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에는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일에 대한 부정적인 현실에 대해, 그 원인을 살펴보고, 또한 그 해답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의 타락

원래 일은 고통,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며, 동산을 경작하고 지켰고,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에덴동산에서의 일은 예배와 분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면전에서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일이 우리에게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 된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금하신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찾아온 것이 바로 일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의 저주를 받게 하셨고, 그 결과로 평생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도록 벌하셨다(창 3:17-19). 죄 짓기 전에는 일이 수고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일이 수고가 되고 말았다. 이 수고의 정도는 ‘평생에’라는 말씀과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즐거운 일이 이제는 수고로운 일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수단(창 4장).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그 이후의 삶을 살펴보면 이제 일이 단순한 수고의 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창세기 4장에 아담 이후의 가인과 셋의 후손의 족보를 보면 두 민족 가운데 한 민족은 불경건의 삶으로, 또 한 민족은 경건한 삶으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유리하는 자로서의 삶을 명령받았지만, 자신의 아들 에녹을 낳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에녹성을 지어 정면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에녹성의 가인의 후예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들보다 더 일찍 문명을 만들어낸다. 두발가인은 기구문명(구리, 쇠), 야발은 목축문명(가축), 유발은 수금과 퉁소 문명의 시조가 되었다(창 4:20-22).

반면에 경건한 셋의 자손들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우선순위가 있었다면, 불경건한 가인의 자손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생존 기술이 더 필요했기 때문에 경건의 자손들보다 더 빨리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 없이도 삶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끄 엘룰은 에녹성을 ‘하나님 없는 세계의 가능성’을 그들의 땀 흘리는 노력을 통해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그 에녹성의 정신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속도시 속에서 당연하고 더 세련되게 재현되고 있다. 

일의 구속

이런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타락한 일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원래의 목적으로 되돌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먼저 우리는 거듭나야 한다. 일을 구원하기 위해, 먼저 일하는 사람이 구원받아야 한다. 사람과 일의 이러한 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요한계시록 14:13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구원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행한 일도 구원에 포함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구절에서의 일은 교회의 일뿐만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의 주를 위한 모든 일까지도 포함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거듭나는 것으로만 일이 저절로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일까지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거듭난 사람이 변화되어야 한다. 존재의 중심이 바뀌고, 변화될 때, 그 변화의 한 부분으로 일도 변화된다. 일본의 대기업 가네보의 회장까지 지냈던, 일본의 샐러리맨들의 전설 같은 인물인 미타니 야스또의 <역전 인생>이라는 책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삶이 직장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미타니 야스토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고 일도 인생도 완전하게 맡기겠다고 결심한 후에는 인생을 바라보는 안목과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하고 행동의 판단 기준도 바뀌었다.” 야스토는 45년 동안의 가네보 회사 생활 가운데, 세 번의 전출과 좌천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회사를 혁신하여 인류기업이 되도록 노력했다. 그 첫 시작은 가네보 회사 안에 있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면서부터였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는 압력을 받았으면서도 “일이냐 신앙이냐”의 갈림길에서 신앙을 선택하며, 정면으로 돌파했다. 또한 그는 회사 안의 은밀한 관행,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한 모든 것들에 대해 타협하기를 거부하면서도 회사를 혁신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게 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그렇다면 그 일은 어떻게 하는 일일까?

소명으로서의 일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소명’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즉, 구원도 부르심이고, 소명도 부르심이다. 차이는 ‘구원’의 부르심은 최종적인 것이지만, ‘소명’은 그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으로 인도하는 부르심이다. 이러한 일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을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대로 해야 한다. 소명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하심을 듣는 것이고, 또한 순종하는 것이다. 소명의 원리에 따라 몇 가지의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이 있다.

첫째, ‘소명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은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다. 교회에서의 일은 각 개인에게 ‘은사’를 주심으로서 부르신다. 그리고 교회는 그 은사를 확인하여 그 은사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에 해당하는 공적 ‘직분’을 부여한다. 또한 세상의 일은 그 사람에게 재능과 환경을 통해 부르신다. 그리고 그런 부르심에 따라 ‘직업’을 갖게 된다. 이런 원리에 입각하여, 종교개혁 이후에 ‘직업(vocation)’을 ‘소명’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의 직분과 세상에서의 직업은 모두 거룩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종교 개혁자들의 가장 중요한 의도였다.

둘째, ‘일시적 소명’을 통해 ‘일-인격’과 ‘일-기술’ 모두 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명은 한 순간에 오고,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적합하게 그 사람을 훈련하기 위해 ‘일시적 부르심’으로, 즉 특별히 어떤 환경으로 이끄셔서 그 사람을 만들어 가신다. 이러한 사례를 모세와 요셉의 생애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모세와 요셉의 경험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부르심과 우리의 능력이 일치할 때가지 때로는 어려운 환경을 통해 우리를 준비시키기도 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에 있어서 인격 성숙의 방식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일을 통한 인격 성숙이다. 여기에 ‘도덕성’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일에서도 도덕성을 지켜야 한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 인정받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다. 그때 요셉은 자신이 하지 말아야할 것을 분명하게 알고 지켰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최선을 다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 삶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으로, 그 사람의 인격이 성숙해진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다. 모세는 광야에서 온유한 자라고 불려졌다(민 12:3).

일의 영성과 신학을 위해 한평생을 사역해 온 폴 스티븐슨은 우리의 일터와 연결하여 아홉 가지를 경고한다. 자만. “자신을 최고라고 여기며 자기 자신 안에 갇히는 것.” 탐욕. “자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음욕. “사욕을 채우기 위해 어떻게 남을 이용할지 상상하는 것.” 탐식. “지나친 음식 섭취를 통해 만족을 추구하는 것.” 분노. “사람과 환경을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열망을 드러내는 것.” 나태. “최소한의 일이나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고, 안이함을 좋아하는 것.” 질투.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는 것.” 동요. “늘 지금보다 나은 곳이 있으리라 느끼고 불안정한 것.” 권태. “일과 삶에 대한 진심 어린 열정이나 관심이 부족한 것.” 일의 영성이란 일의 하되, 앞에서 열거한 이러한 아홉까지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환경으로 이끌어 가실 때, 그 사람의 인격을 훈련하고자 하신다.

이는 그 이끄신 환경 가운데서 일을 배울 수 있도록 훈련하는 과정이다. 요셉이 바로 앞에 섰을 때에 꿈을 해석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도 알았다(창 41:33-36). 꿈 해석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지만, 일하는 것은 보디발의 집, 감옥에서 열심히 일해서 배운 것이다. 모세도 역시 ‘애굽에서의 40년’과 ‘광야에서의 40년’은 모두 모세를 훈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시적 부르심이었다. 애굽에서의 40년의 기간 동안의 경험은 그가 성경을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광야에서의 4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는데 사용되었다. 요셉이나 모세나 그들은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시키고 계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일 자체’다. 일의 영역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의 영역’이다. 안 믿어도 열심히 하면 믿는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반은총’ 때문이다. 안 믿는 자에게도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 기본 하한선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일반은총’이다. 죄를 억제하고, 모든 사람이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다. 따라서 우리는 공부든 일이든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고, 배우고 익혀야 일을 잘할 수 있고 공부도 잘할 수 있다. 열심히 해야 할 것에 기적을 바라는 것은 게으름이고, 요행을 바라는 것과 같다. 공부 안하고 시험 성적 잘나오도록 기도하는 것이나, 열심히 일하지 않고도 직장에서 승진하도록 기도하는 것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좋지 않다. 열심히 일하는 세상 사람을 이기려면 더 열심히 일하면서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일반은총이 작용하는 영역에서는 믿는 자든지 믿지 않는 자든지 같은 법칙 속에서 공평하게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

결국 이러한 일에 대한 소명과 일을 통한 인격과 일의 기술을 훈련하여 이루게 될 일의 최종적인 모습은 어떤 것일까? 종교개혁자들이 ‘소명의 원리’로 설명한 것이 실재로 현실에서 이루어지게 되면, 소위 그 영역을 지배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사람이 지배하면 ‘인격주권’이고, 그 사람이 주창하는 원리가 지배하면 ‘영역주권’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로서 목표하는 목표점이다. 즉, 하나님의 원리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현실 가운데 실현되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주신 소명에서, 그 사람이 그 소명에 따라 최선을 다하게 되면 그 분야에서 일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때 그 사람은 ‘인격주권(자)’가 된다. 다시 말해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인격주권을 가진 사람의 영향력 덕분에, 그 영역은 하나의 지배적인 원리 즉 ‘영역주권’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노력이 ‘그 분야 전체의 원리로 확대되는 것’이다. 모든 분야가 사실 이런 식으로 영역화되고, 그 영역의 지배적인 원리가 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소명자로서 동일한 일의 영역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인격주권자가 되고, 그리고 그 영역이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창조의 원리, 하나님의 원리로 움직여지는 거룩한 영역이 될 수 있도록 정복해야 한다. 결국 이것이 우리의 완성해야 할 일의 완성이다.

일은 ‘생계’를 위한 것이지만 생계가 목적이 아니다. 일은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지만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일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 이것이 최종적인 일의 목적이고, 이런 목적으로 일할 때, 그것이 소명이고 최종적인 구원을 향한 부르심에 이르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4:13의 말씀처럼 우리가 주 안에서 죽게 되어 천국에서 쉬게 될 때에, 그 쉼을 따라 우리도 그곳으로 영광스럽게 들어가는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