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지나치면 좋지 않다. 중세교회가 금욕과 훈련에 대하여 강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이것은 결국 구원받은 자가 성화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화를 이룬 자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처럼 보이는 순서의 역전을 낳았다. 기어코 복음이 율법으로 다시 대체된 것이다. 면죄부는 이러한 현상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중세기 최대의 보이스피싱이다.
이러한 신학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이 종교개혁자들이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성화는 여전히 구원 다음에 오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칭의가 일어나게 되고,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이 성화의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화는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성화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굳이 이런 질문을 해야 했나 싶지만, 신학자들의 상상력과 입을 막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결국 그 옛날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논쟁을 벌였던 것처럼, 레디엔 대학의 아르미니우스와 칼뱅주의자들이 논쟁을 벌였다. 성화는 늘 구원과 같이 다루어지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종교개혁 이후의 성화론 주변에는 익숙한 단어들이 눈에 띈다: 은혜, 믿음, 구원, 칭의, 완전, 신적 연합, 도덕, 등등. 한마디만 잘못 말해도 총회의 이단시비에 휘말릴 만큼 예민한 주제들이고,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30] 혹시 내가 이 글을 쓴 이후 어디론가 불려가거나 악성댓글로 고생하면, 복음과도시에서 나를 위하여 변호해 줄 것을 진지하게 요청한다. 성화론은 이 육중한 단어들을 어디서 얼마큼 사용할 것인지가 쟁점이다.
루터는 성화의 결론이 구원이라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뒤집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특별히 루터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학자이며 교회에서 설교하는 설교자로서의 삶은 살았지만,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책임지는 일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서른셋 젊은 나이로서 그의 관심은 은혜와 믿음과 칭의에 있었고 성도들의 삶이 성화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칼뱅이나 웨슬리와 같이 깊이 있게 성화를 다루지 않은 점은 아쉽다.
그래도 루터의 글들을 종합해 보자면, 루터에게 있어서 성화는 구원 이후에 자연히 오는 결과이다. 도덕적으로 더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노력은 “옛 사람의 투쟁”일 뿐이다. 진정한 성화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구원만이 아니라 성화의 문제까지 다 책임지신다는 것을 단순하게 믿는 것에 불과하다. 죄악을 저지르던 옛 사람이 죽었으니, 이제는 완전한 자유인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피조물이 되고, 진짜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31] 루터는 이러한 성화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가지는 능력을 극대화하여 보여 주었다.
다만 루터의 성화론을 이야기할 때, 독일어의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어나 영어, 헬라어, 라틴어로도 구원과 성화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 다른 단어이다. 하지만 독일어로 구원은 ‘Das Heil’로, 성화는 ‘Die Heiligung’으로 쓴다. 어원학적으로 본다면, 성화는 구원에 속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알렌 리차드슨 같은 루터교 학자는 구원(칭의)과 성화를 구분하는 것은 논리적 명확성을 위해 굉장히 유혹적이지만, 오히려 그러한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32] 루터의 성화는 예수를 믿다가 어느 날 문득 ‘내가 이렇게 거룩해졌구나…’ 깨닫는 것이며[33] 따라서 성화는 “칭의에 익숙해지는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34]
[30] 성화는 이러한 개념들을 재료로 만드는 요리와 같다. 대부분 은혜를 주재료로 하여 도덕과 칭의, 사람의 노력 등등을 잘 섞어서 시대가 요구하는 맛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루터는 맛없는 성화로, 칼뱅은 매운 맛 성화로, 웨슬리는 구수한 맛 성화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만 그러는 것인가?
[31] So it is with the works of a believer. Being by his faith replaced afresh in Paradise and created anew, he does not need works for his justification, but that he may not be idle, but may keep his own body and work upon it. His works are to be done freely, with the sole object of pleasing God. Only we are not yet fully created anew in perfect faith and love; these require to be increased, not however through works, but through themselves. Martin Luther, The Freedom of a Christian.
[32] Alan Richardson, ed., A Theological Word Book of the Bible (New York: Macmillan, 1960), 218.
[33] 게르하르트 포드, 『성화란 무엇인가』(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0), 22.
[34] Ibid., 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