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of Wesley by William Hamilton, 1788. Currently on display in John Wesley's House, City Road, London./Public Domain
Portrait of Wesley by William Hamilton, 1788. Currently on display in John Wesley's House, City Road, London./Public Domain

다시 존 스토트 이전의 영국 성공회로 돌아가 보자. 종교개혁 시절 마르틴 루터는 성서학자이자 신학자였고, 장 칼뱅은 인문학자이자 행정가였다고 하면, 종교개혁 이후 2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영국 성공회의 사제였던 웨슬리의 주된 정체성은 목회자였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것은, 개혁주의자들이 만든 아름답지만 귀족적인 신학을 평신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그 신학을 공장과 농장, 광산에서 일하는 평신도의 삶에까지 지속적으로 적용 가능한 실천 모듈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51] 그는 일반적인 시민이 이해하고 적용할 수 없거나 신학의 결과가 좋지 않은 그런 신학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52]

웨슬리의 시대에 산업혁명이 가져온 결과는 참혹했다. 자본가들은 도덕적인 해이에 빠졌고, 노동자들은 가난과 절망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200년이 지난 시점에서 개혁주의의 성화론은 자본주의의 타락 앞에서 무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웨슬리의 성화론은 책에 소개되는 이론이 아닌 성도의 삶과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나야만 했던 것이다.[53]

루터와 칼뱅의 성화론에 비하여 웨슬리의 성화론이 가지는 가장 독특한 점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동방정교회의 수도사들이 한때 가졌던 완전의 교리를 그의 방식으로 다시 해석한 것이다. 구원과 칭의에 대하여는 웨슬리나 루터나 칼뱅이 차이가 없다. 심지어 구원과 성화는 분리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루터나 칼뱅과 같다. 하지만 웨슬리는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신 예수님의 초청 앞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신학적으로 상상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혹은 경험해 본 적 이 없다는 이유로 이 거룩한 초청을 거절해도 되는 것인가?[54]

여기에서 웨슬리는 갑바도키아 교부들의 완전론을 개혁주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웨슬리가 말하는 완전은 더 이상 성화가 필요 없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거룩함을 향한 끝없는 성장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화는 거듭나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며, 온전한 성화는 온전한 사랑으로 드러나게 된다. 거룩함 없는 사랑은 없으며, 사랑 없는 거룩함도 없다. 하지만 완전을 이룬 사람도 여전히 유혹과 연약함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 있으며 매일 매일 회개와 속죄를 경험해야 한다.[55] 

루터파와 칼뱅파는 사람의 거룩해질 수 있는 능력 혹은 가능성에 대하여 굉장히 비관적이었다. 심지어 웨슬리는 그의 완전론 때문에 감리교 내부로부터도 많은 공격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웨슬리는 1758년 브리스톨회의와 1759년 런던회의를 통하여 토의한 후 1766년에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간단한 설명(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다시 성화와 완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56]

웨슬리의 표준설교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교리를 설명할 때 사용한 설교 본문은 그 옛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완전에 대하여 설명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빌립보서 3:12이다. 웨슬리는 이 설교에서 요한일서 5:18을 인용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그래서 루터와 칼뱅이 말하는 “믿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57] 칼뱅이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존재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한다면, 당연히 나의 부족함이 아닌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웨슬리는 성경이 완전에 대하여 이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면, 필요 없는 논쟁을 멈추고, 이제 완전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사도에 의해 확인되었으니,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이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합시다.”[58] 이렇게 웨슬리는 철저하게 목회적 억양을 섞어서 사회적 타락을 멈추고 이제 눈앞에 놓인 푯대(성화)를 위하여 노력하자며 설득하는 것이다. 바로 이 웨슬리의 성화와 완전교리를 강조하는 교단이 성결교단이다.

웨슬리가 싸운 것은 칼뱅이 아니라 칼뱅주의자들이었음을 명심하자. 지금도 웨인 그루뎀 같은 칼뱅주의 침례교 신학자는 웨슬리의 완전론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다.[59] 

‘성화론 케리커처’를 마치며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서 거룩함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람의 실패일까 하나님의 실패일까? 사람의 믿음이 부족한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치 않은 것일까? 과연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책임과 노력을 제거할 때만 온전해지는 것일까? 성화론에는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고 그보다 더 많은 질문들이 존재한다. 다만 지난 기독교 2000년의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사람은 구원 이후에도 계속 거룩해져야만 하고 더 깊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화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더 성화될 수 있다면, 기꺼이 1,000 페이지짜리 논문이라도 쓰겠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은 나만 가지는 것일까? 그래서 은혜를 다시 구하게 된다. 제발 환원주의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

 

51. 루터와 칼뱅이 비텐베르크 대학과 바젤대학을 대표한다면, 웨슬리는 애플이나 삼성 같은 느낌일 것 같다. 

52. Melvin E. Dieter, “The Wesleyan View” in Five Views on Sanctification (Grand Rapids, MI: Academic Books, 1987), 11.

53. The Book of Discipline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ed. 2008, 75-76.

54. John Wesley, “On Perfection,” in Standard Sermons

55. John Wesley, The Works of John Wesley, vol. 13 (Kansas City, MO: Beacon Hill Press, 1979), 278–279. 

56. Work info: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 -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57. John Wesley, “On Christian Perfection,” 5.

58. John Wesley, “On Christian Perfection,” 30.

59. 웨인 그루뎀은 웨슬리의 노력을 “완전의 기준을 낮춤”이라고 평가절하하며, 완전은 오직 죽음으로 성결에 이를 때만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웨인 그루뎀, 조직신학(중), (서울: 은성출판사, 2009), 400-402.

 

글 싣는 차례 
2. 완전을 향한 겸손_수도원운동
6. 성화에도 목표가 있다_존 웨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