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상징인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도시이자 전 세계 경제, 문화, 패션의 중심지입니다. 비록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 DC지만 뉴욕은 세계 수도로 불리기까지 합니다. 실제로 유엔 본부가 뉴욕에 있죠. 그 뉴욕 옆에 코네티컷 주가 있습니다. 코네티컷은 예일 대학으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아시아계 최초로 우리나라의 김영준 변호사가 예일대 전체 동문회 이사로 선출된 적(2022년)이 있습니다. 김영준 변호사는 예일대뿐만 아니라 하버드 대학에서도 동문이사를 맡은 이력으로 뉴스가 되었지요. 미국에서조차 하버드대, 예일대 양쪽 모두 동문회 이사를 한 유일한 사람일 거라고 합니다.
예일대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졸업한 학교로도 유명합니다. 에드워즈는 열세 살에 예일대 합격해서 열일곱 살에 수석으로 졸업한 굉장한 수재였거든요. 그는 스물다섯 살이 되던 1728년에 노샘프턴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교회사에 부흥의 시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중에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던 부흥은 미국의 1차 영적 대각성 운동입니다. 이 부흥을 단순히 ‘Revival(부흥)’로 부르지 않고 ‘Great awakening(대각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전에 일어났던 개인의 회심에 국한된 부흥이 아니라 공동체의 변화와 국가의 개혁까지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영적 대각성이 바로 코네티컷 주에서 일어난 부흥이었습니다. 그것도 에드워즈 목사님이 사역하시던 노샘프턴 동네에서 1734년과 1740년에 일어났던 부흥입니다. 이 시기 에드워즈가 했던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이라고 하는 설교는 매우 유명합니다. 저는 목사가 된 이후에 에드워즈의 설교를 들었는데, 다시 또 회심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코네티컷 골짜기에서 일어났던 부흥에 대해 에드워즈는 그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온 동네 하나님의 임자가 가득해 보였습니다. 그때처럼 온 동네가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찼던 적은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집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놀라운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젊은이들도 자기들끼리 모이면 그리스도의 탁월성 구원의 방법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경이롭고 값없는 주관적인 은혜, 영혼들을 회심시키는 그분의 역사,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과 확실성, 그분의 완전을 보는 것이 달콤하다는 사실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202쪽)
에드워즈는 부흥을 경험하고 그에 관련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놀라운 회심 이야기와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균형 잡힌 부흥론을 썼습니다.
부흥이 일어났던 코네티컷 주의 상황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에드워즈 특유의 필체로 기록한 그는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고 모두 부흥에 참여하기를 촉구하는 형태의 글을 썼습니다. 에드워즈가 ‘가슴의 신학자’라고 불리고, ‘탁월한 부흥 운동 변증가’라는 별칭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이 책들 때문이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는 한 신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은 조나단의 책 읽기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을 할까요?”
“조나단의 책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어야 합니다.”
이제 그의 책은 목회자들의 기본도서가 되었으며, 그가 이후에 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는 선교사님의 필수 도서가 되었습니다.
목사님들과 함께 여러 신학자의 책을 보면서 에드워드의 책을 읽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목사, 성도들의 영혼 지킴이라는 책을 시작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론을 읽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론은 750쪽이 넘는 두꺼운 분량의 책입니다. 책 자체도 워낙 커서 읽는 것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이해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책 읽기 전에 먼저 에드워즈의 전문가를 모시고 예비 강의를 듣고 시작했음에도 그의 책을 읽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번역의 문제도 있었고, 우리의 이해력의 문제도 있어서 좀처럼 에드워즈가 우리의 가슴을 파고들어 오는 데는 여러 가지 걸림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고, 이 책을 끝낸 후 우리는 에드워즈의 신학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에드워즈가 던져준 화두로 우리는 현시대의 부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시대 부흥은 과연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너무나도 분명하게도 부흥은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셔야만 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부흥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들 정도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부흥 세미나를 통해, 노력하기만 하면 부흥은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두 날개, 알파, 총동원 전도주일 같은 전도 세미나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부흥이라는 주제가 뜨거운 감자 같이 여겨져서, 부흥하지 못하는 교회는 문제가 있는 교회이며, 목사가 무능하다는 편견까지 심어주었습니다. 빚을 내서라도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에 교회를 세워야 하며, 멋진 실내장식과 넓은 주차장까지 마련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부흥하는 목사가 되려면 외국 유학은 물론이고, 2 대 8 가르마에 포마드 기름까지 발라야 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부흥이 가져온 압박감은 너무 커서 마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부흥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목사님들도 계셨습니다. 부흥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성공한 목사라는 이미지에 필수요건처럼 치부되었습니다. 자연스레 부흥하지 못한 목사님들의 열등감은 심각해서 목사의 우울증이 직업병처럼 여겨지고 목회자의 자살 소식도 늘어났습니다. 목사가 된 후에 열등감이 더 커졌다는 목사님이 70퍼센트를 넘는다고 합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어디서 목회하는지, 교인은 몇 명이나 되는지, 올해 세례는 몇 명에게 주었는지 물을 때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책이든 세미나든 ‘부흥’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부흥하기 위한 ‘방법론’일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 제목에 교회명이 들어가면 거부감이 들 정도였습니다. 팀 켈러의 센터 처치도 그런 이유로 읽지 않았습니다. 에드워즈의 부흥론을 이제야 읽게 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부흥론’이라는 말 자체가 ‘부흥하기 위한 방법’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드워즈는 부흥을 위한 방법론을 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경험했던 부흥에 대해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부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난과 모함에 관해 변증한 책이 ‘부흥론’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일으켜 주시는 부흥에 대해서 반대하는 자가 되지는 말라고 얘기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부흥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고 촉구합니다.
우리 시대도 부흥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평양 대부흥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한국을 휩쓸고 간 부흥운동이 있었지만 지금은 부흥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좀처럼 부흥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교회가 쇠퇴하고 있고,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한국의 기독교는 그 신뢰도가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다시 한 번 기독교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는 종교가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부흥을 속히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흥이 우리의 노력에 달린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부흥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많은 고민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외적으로 너무 많은 시간을 쓰거나, 힘을 낭비하고 탈진해서 정작 교회에서는 아무 일도 못 하는 사람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목사들의 외부 활동은 위로와 쉼을 누리고, 서로에게 격려가 될 수 있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운동을 해서 건강을 지키든지, 공부를 통해 지식을 넓히든지, 함께 만나 밥 먹고 차 마시고 수다를 떨더라도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서 그 힘으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언제 시작되더라도 우리가 그 부흥을 감당할 체력과 에너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부흥이 오기 전에 지쳐서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가 기독교를 비난하고 있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하건 우리가 사회가 무관심해지는 날이 오기 전에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비난하는 것으로는 한국 교회의 자정 능력을 되살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다 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전도의 길이 막혀버린 시대에 계속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기쁨으로 예배하고 서로 교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을 때 사람들은 교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것입니다.
“로또에 당첨돼도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은 자신의 직업 만족도를 가늠하게 해 줍니다. 이 질문에 모든 목사님이 ‘계속하겠다’고 답하셨습니다. 로또만 되면 목회 그만두겠다는 분을 아직 한 분도 뵙지 못했지요. 아무리 교회가 힘들고 어려워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한국 교회에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언제 다시 임할지 알 수 없지만 그때를 바라보며 견디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더라도 목사님들이 책과 운동을 핑계 삼아 함께 모여 밥 한 끼 나누는 일도 부흥을 기다리는 좋은 방법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지치지 말고, 외롭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다 같이 그날을 기다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