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4년 8월 열린 프랑스 올림픽 개막식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기존의 스타디움 중심 개막식에서 벗어나 파리 도심 전체를 무대로 활용하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도 화제가 되었지만, 그보다 더 논란이 된 것은 퍼포먼스에 포함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이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연상시키는 연출은 로마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한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격을 넘어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예수의 자리에 몸집이 큰 여성이 앉아 있었고, 그 주변에는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로 보이는 인물들이 제자들의 자리를 차지한 채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게다가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풍요와 포도주의 신인 그리스 신화 속 디오니소스가 비스듬히 기대어 누워 있었다.
이 장면이 논란이 되자, 이를 기획한 연출자는 “올림포스의 신들과 디오니소스 축제를 패러디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설령 기획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해당 연출이 최후의 만찬과 디오니소스 축제를 뒤섞음으로써 기독교의 성(性) 개념을 조롱하고 왜곡하려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논란이 확산되자, 이러한 기획을 허용한 안 이달고(Anne Hidalgo) 파리 시장은 불만을 드러내며 이렇게 발언했다. “반동파와 극우주의자, 그리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속에 우리를 가두려는 자들은 꺼져라!” “파리는 모든 자유의 도시이며, LGBTQI+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을 포함한 성소수자) 공동체의 피난처이자,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다.”[1]
올림픽 개막식은 전 세계 모든 연령층이 함께 즐기는 축제다. 그렇기에 특정 종교, 정치적 입장, 사상을 노골적으로 옹호하기보다,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와 평화의 메시지를 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 개막식은 특정한 사상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파리의 엘리트 계층이 지향하는 가치를 개막식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혐오와 증오를 표출하는 자’로 몰아갔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정작 자신들은 ‘톨레랑스(tolérance, 관용)’를 표방하면서도,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들에게는 이를 강요하고 배척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현대 윤리의 기준, “관용”
파리 올림픽 개막식의 기획자들은 ‘톨레랑스(관용)’로 자신들의 선택을 정당화하였다. 이 ‘관용’이라는 개념은 오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다. 특히 서유럽 사회에서 관용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로마가톨릭과 개신교를 받아들인 국가들이 기독교를 앞세워 권력을 확장하려는 정치적 충돌이 지속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100년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종교 전쟁으로 이어졌고, 유럽 사회는 결국 사회 통합을 위한 새로운 철학적·정치적 논의가 필요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영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존 로크(John Locke)는 1689년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을 발표해 그의 정치적인 이상과 윤리를 제안하였다. 이 책은 절대군주제를 옹호했던 로버트 필머 경(Sir Robert Filmer)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집필된 것으로, 로크는 왕이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시민과의 ‘사회 계약’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는 통치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자연 상태’에서 찾았다. 즉, 국가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통치자와 시민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 중재 원리를 제시하면서, 인간 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의 자연적 무정부 상태, 즉 ‘자연 상태’를 그의 주장의 논리적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로크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부터 자유와 평등, 그리고 상호 이익을 중시하는 존재였으며, 따라서 사회가 발전한 후에도 이러한 원칙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자연 상태에 대한 이해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안에 있는 신의 목소리인 이성은 인간이 자기 존재를 지켜야 한다는 자연(본성)의 성향을 추구하는 것이 창조자의 의지를 따르는 것임을 가르치고 확신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2]
그의 주장에 따르면, 로크는 성경이 아닌 이성을 특별한 계시의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그는 성경이나 율법보다도 “자기 존재를 지켜야 한다는 자연의 성향”을 더욱 높은 차원의 윤리이자 신적인 명령으로 간주하며, 이것이야말로 창조자의 의지라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종교적 교리 해석의 차이로 인해 끊임없이 이어지던 종교 전쟁의 시대에 새로운 윤리 체계를 제시했던 것이다. 이러한 로크의 윤리는 각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도덕적 기준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방향으로 합의하는 것이 윤리의 본질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지만, 이후 사회가 인본주의화 되면서 로크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당연한 원리로 자리 잡게 된다.
결국 이 사상은 근대 즉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특징인 ‘다원성’과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다원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 이를 이어받아서 칸트(Immanuel Kant)는 다원주의와 모더니즘의 윤리를 ‘관용’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칸트의 관용 개념은 그의 저서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철학적 기획』에서 언급된 ‘우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칸트는 세계 시민이 따라야 할 법으로 보편적 우호 조건을 제시하는데, 그 핵심은 상대가 나에게 신체적 위협을 가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행동하는 한, 그들의 거주와 점유를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3] 달리 표현하자면, 쌍방이 계약을 통해 합의했다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근대 사회는 세계 시민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윤리를 찾고자 하였고, 결국 그 방향성은 개인과 개인의 상호 계약을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누구나 따라야할 보편적 원칙보다는 개인 간의 합의가 더 중요한 윤리적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 윤리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꼽히는 알리스데이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이러한 근대적 윤리 체계를 감정에 기초한 유동적인 윤리 즉 정의주의(情意主義, emotivism)라고 규정하며 이렇게 설명한다. “정의주의는 모든 가치평가적 판단, 더 정확히 말해 모든 도덕적 판단은 선호의 표현들, 태도 및 감정의 표현들과 다를 바 없다는 학설이다.”[4]
‘취향’의 시대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시대의 진리 개념 중 가장 보수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도덕과 윤리마저도 이제는 개인의 감정과 상호 계약에 기초한 영역으로 변화하고 있다. 물론, 살인의 옳고 그름을 개인의 취향과 정서적 결정에 따라 판단하는 극단적인 시대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생명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변화의 징후가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스위스에서는 개인이 안락사를 원할 경우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살할 수 있다. 그 조건은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말기 질환을 앓고 있을 경우’,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장애가 있는 경우’, 또는 ‘참을 수 없고 억제할 수 없는 고통이 지속되는 경우’이다. 이는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이라는 ‘상호 이익의 원리’에 근거한 근대적 윤리에 근거한다. 또한, 이상적인 사회라면 개인의 이러한 선택을 존중하고 관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뒤따른다. 다행히 생명의 영역에서 이러한 관용적 흐름이 아직까지 보편적으로 자리 잡지는 않았지만,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안락사에 대한 관용적 태도는 점차 확산되고 있으며, 이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반면, 이미 관용적 윤리가 주류가 된 영역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성 윤리’의 변화이다. 칼 트루먼(Carl Trueman)은 이를 ‘LGBTQ+ 운동’으로 정의하며, 이러한 흐름이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서구 사회의 사상과 문화 속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그는 성혁명이 루소에서 시작되어 낭만주의자들을 거쳐 프로이트, 그리고 이후의 신좌파 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친 철학적 개념과 경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한다. “내 논의의 핵심은 현재 우리의 문화와 정치에서 중심이 되고 있는 LGBTQ+ 이슈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자아(self)’의 개념이 변화하는 더 깊은 혁명의 한 가지 증상이라는 점이다. LGBTQ+ 운동은 성혁명에서 비롯되었으며, 성혁명은 루소(Rousseau)에서 시작되어 낭만주의자들(Romantics)을 거쳐 프로이트(Freud), 그리고 신좌파(New Left)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철학적 사상과 흐름 속에서 형성되었다.”[5]
‘성혁명’의 시대
칼 트루먼(Carl Trueman)이 언급한 ‘성혁명’이란 무엇일까?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혁명’이라는 용어의 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혁명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이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가 있다. 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제자로서, 프로이트가 주장한 성욕과 정신병의 직접적인 관계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따랐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성욕이며, 정신 질환의 대부분은 무의식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정신 질환은 성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거나 억압되거나, 혹은 중독 상태가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이론을 계승한 라이히는 자신의 독자적인 개념을 정립하며 성욕을 ‘오르가 에너지’(orgone energy)라고 명명했다. 그는 정신 질환의 원인을 ‘오르가즘(성적 쾌락의 극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즉, 성적 욕구가 자유롭게 해소되지 않는 것이 정신적 억압과 병리적 문제를 낳는다는 것이다.
또한,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성욕 이론을 공산주의 혁명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순한 계급투쟁과 경제적 해방만으로는 혁명이 완성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귀족과 상류층은 경제적 권력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성적 권력까지 독점하고 있으며, 반면 노동자 계급은 극심한 노동으로 인해 성적 욕구를 해소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억압이 지속되면 결국 노동자들의 정신 건강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며, 이는 혁명의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할 때, 성 해방을 이루는 데에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윤리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성문화가 여전히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라이히는 경제적 혁명만큼이나 중요한 과제로 기독교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성 윤리를 해체하고, 새로운 성 윤리와 문화를 보급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저서 『성혁명(Die Sexualität im Kulturkampf)』에서 노동자 계급의 성 해방을 위한 이상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오늘날 학교의 보건 교육과 성 교육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으며,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많다. 다음은 라이히가 주장한 성혁명의 목표를 전남대학교 유수종 교수가 2008년 진보평론에서 여섯 가지로 요약한 내용이다.
1. 모든 사람에게 피임약을 무료로 배급하여 임신 걱정 없이 성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한다.
2. 모든 여성에게 낙태의 자유를 보장한다.
3. 기혼과 미혼의 법적 구분을 폐지하여 미혼자도 자유롭게 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다.
4. 이혼의 자유를 보장하여 개인이 섹스를 통한 오르가즘을 추구할 권리를 인정한다.
5. 충분한 성 교육을 제공하여 성병 없는 안전한 성생활을 보장한다.
6. 성범죄자를 처벌하기보다는 치료를 우선하여, 그들의 오르가즘을 보장함으로써 성범죄를 예방하고 치료한다.
이처럼 성문화를 포함한 사회 전반의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억압받고 있는 인민을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이라고 보았던 라이히의 주장과 같은 사상을 ‘문화적 마르크시즘(Cultural Marxism)’이라고 한다. 칼 트루먼(Carl Trueman)은 이러한 사상을 계승한 이들이 ‘신좌파(New Left)’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신좌파는 경제적 해방을 중심으로 했던 전통적인 좌파와 구별하여 문화를 통한 혁명이 진정한 혁명의 완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성경을 위협하는 신좌파 문화 전쟁
이러한 신좌파의 문화 운동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문학, 정치, 경제, 법률, 철학, 신학, 의학, 과학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신좌파의 문화·세계관 운동은 반기독교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으며, 신학계에서 조차 기존의 교리 체계와 기독교 윤리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책으로 격하시키는 문학 비평 이론이 적용되면서,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토대마저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의 최전선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기존의 성 개념을 파괴하고 해체하려는 움직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결과, 성경의 가정은 ‘억압적인 가부장제’로 왜곡되었고, 교회마저도 성경이 제시하는 가족에 대한 관점을 부정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성경 해석을 수용한 미국의 주류 교회는 2014년 PCUSA(미국장로교의 주류 교단) 제221회 총회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이라는 기존의 정의를 “두 사람 사이의 서약(commitment between two people)”[6]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해석함으로써 동성 결혼을 교회 내에서 합법화하였다. 이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 결혼 합법화 판결(2015년 6월 26일)보다 앞선 결정이었다.
신좌파의 문화 운동에 영향을 받은 성경 해석은 성경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전통적인 해석을 해체하며, 새로운 의미를 도출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예일대 신학부 신약학 교수였으며, 미국 장로교(PCUSA)의 동성애자 목사 안수 결정에 신학적 영향을 미친 레티 러셀(Letty M. Russell)의 룻기 해석을 들 수 있다.
룻기는 모압 여인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극진히 섬기고, 그로 인해 보아스의 환대를 받아 다윗의 조상이 되는 이야기이다(룻기 1장). 그러나 러셀은 이 이야기를 억압받는 여성의 시각인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7] 그녀는 룻의 섬김을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문화 속에서 여성이 착취당하는 식민지적 상황에서 비롯된 수동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성경에서 이러한 억압적 요소를 제거해야만 본래의 의미를 올바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러셀의 주장에 따라서 야마구찌 사토꼬는 룻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는 괴이한 주장을 펼친다. “룻은 지금의 성 개념으로 볼 때 이성애와 동성애를 넘어선 양성애자”[8]라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억압받는 여성이 원하는 성경 해석일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이 시대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자들의 교만이 낳은 문화적 괴변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해석 방식은 성경의 텍스트를 선별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성경의 특정 부분을 인간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재조합하여, 시대적 흐름에 맞춘 논리적이고 일관된 내용을 찾아내려는 인간 중심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세계관 전쟁: 동성애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약 20년 전, 내가 강원도 양양의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ship)에서 일할 때 두 명의 그리스도인 청년이 찾아왔다. 이들은 모두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으며, 그중 한 명은 영국 정경대(LSE)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청년이었다. 이들이 지내는 동안 하루는 이들과 동성애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이들의 주된 주장은 “선천적으로 동성애자로 태어난 사람은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동성애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면 이를 억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1980-90년대 이루어진 동성애 유전자 연구를 제시했다. 당시 서구 사회에서 동성애는 선천적이라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힘을 잃었고, 오히려 다른 관점이 부상하고 있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대표적인 페미니즘 철학자인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1990년 저서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이 있었다. 버틀러는 이 책에서 젠더(성)는 선천적인 것과 무관하며, 개인의 성적 취향과 선택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즉, 젠더란 마치 옷을 갈아입듯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일종의 패션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려는 유전자 연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최신 논리가 등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듯, 2019년 영국 바이오뱅크(UK Biobank)와 미국 유전자 검사 기업 23andMe Inc.가 제공한 약 48만 명의 DNA 샘플과 생활습관 조사 자료를 분석한 브로드 연구소(Broad Institute) 정신의학연구센터의 연구 결과가 사이언스(Science, 2019년 8월 29일)에 공개되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동성애 유전자의 존재는 유의미하지 않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전 연구들과 달리 대규모 유전자은행을 활용한 가장 광범위한 연구에서도 동성애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 연구 결과는 동성애 지지 진영을 혼란스럽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1990년대 이후 동성애 논의가 의학과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과 신념의 문제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이제 동성애(LGBTQ+)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필요한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들어온 동성애 친화적인 문화와 관점, 성도들의 무관심은 단순히 외부적인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한 성윤리와 가족에 대한 관점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가르침에 따라 살지 않고 다음 세대에 본이 되지 못한 기성세대의 책임이 크다. 우리는 지금 각종 세계관이 충돌하는 세계관 전쟁 중에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
오래전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을 쓴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인도에서 수십 년간 선교사로 사역한 후,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와 큰 충격에 빠졌다. 젊은 시절 자신을 파송했던 교회는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고, 더 이상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예수님의 복음은 힘을 잃고, 영국의 국가 행사에서 단순한 종교적 장식물로 전락해 있었다.
그러나 뉴비긴은 이 현상이 복음 자체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 원인이 성경과 복음을 단순한 이성적 지식으로만 연구하고 추구했던 근대 신학과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에 있다고 보았다. 삶에서 실천되지 않는 지식, 공허한 신학적 지식이야말로 비인격적인 신앙의 종말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신앙이 결국 교회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뉴비긴은 복음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인격적인 지식’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원주의가 팽배한 인도의 힌두교 문화 속에서 오랫동안 복음을 전해왔던 경험 때문이었다. 뉴비긴은 교회를 향해 각자의 믿음을 단순한 사상으로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살아낼 수 있는 ‘참된 지식’인지 겨루어 보자고 도전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성경이 진리임을 믿는다면, 이를 살아내는 확신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을 개인의 취향과 선택의 문제로 바라보며, 역사상 유례없는 형태의 이상한 가족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이를 사회적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권리라고 주장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변하지 않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그 사랑 속에서 태어난 자녀들과 함께 세상의 고난과 어려움을 신실하게 극복해 나가는 것—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족을 통해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본연의 기쁨이자 행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사랑하고, 이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행복,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만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이 누려야할 참된 기쁨과 행복이기 때문이다.
토의 질문
1. 파리 올림픽 개막식의 논란을 둘러싸고, “관용”이라는 가치가 타인의 신념을 부정하거나 조롱하는 형태로 변질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2. 라이히(Wilhelm Reich)의 ‘성 해방’ 이론이나 프로이트주의는 서구 사회의 성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회나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 흐름을 이해하고, 대화 혹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3. “세계관 전쟁”이라는 개념에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가? 공감한다면, 실제로 어떤 부분에서 이 세계관 충돌을 체감하고 있는가?
4. 교회 공동체에서 동성애(LGBTQ+) 이슈를 대할 때, ‘진리’와 ‘사랑’을 균형 있게 담아낼 수 있는 태도와 언어는 무엇일까?
5. 가정 혹은 교회 내에서의 교육을 통해, 청년들과 다음 세대에게 성경적 성윤리와 가족관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을까? 실제 사례나 적용 가능한 방법을 제시해 보자.
[1] 2025년 2월 20일 검색 https://www.lemonde.fr/politique/article/2024/08/06/anne-hidalgo-avec-les-jo-les-gens-se-disent-c-est-pas-completement-foutu-on-peut-etre-ensemble-et-on-peut-etre-heureux-ensemble_6269386_823448.html
[2] John Locke, Two Treatises of Govern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223.
[3] Immanuel Kant,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철학적 기획,” 『비판기 저작 Ⅱ 칸트전집 11, 정성과, 배정호, 홍우람, 염승준, 이진오, 이상헌 역 (파주: 한길사, 2022), 39.
[4] Alasdair MacIntyre, After Virtue: A Study in Moral Theory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4), 19.
[5] Carl R. Trueman, The Rise and Triumph of the Modern Self (Illinois: Crossway, 2020), 384.
[6] https://pcusa.org/sites/default/files/marriage-proposed_w-4.9000_side_by_side.pdf
[7] Letty M. Russell, Just Hospitality: God's Welcome in a World of Difference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2009), 91-94.
[8] 야마구찌 사토꼬, 『동성에와 성경의 진실: 무지개는 우리 가운데』, Homosexuality and the Biblical Truths: Rainbows Among Us-Seeking Justice in Sexuality and Life, 양희매 역 (일산: 무지개신학연구소, 2017), 2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