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과 ‘소망’이 순례의 길을 가다가 ‘두마음(By-ends)’이란 사람을 만난다. 이 두마음은 다른 나그네 셋과 동행하는데, 그 셋은 ‘세상집착(Mr. Hold-the-world)’ ‘돈사랑(Mr. Money-love)’ ‘노랭이(Mr. Save-all)’다. 두마음이 한편에서는 하나님을 또 한편에선 세상과 돈에 대한 욕심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마음을 뿌리치고 앞서가던 크리스천과 소망은 은광 옆에서 그들을 부르는 ‘데마’라는 사람을 만난다. 성경에 바울의 동역자였으나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떠났던 바로 그 데마다. 그가 은광으로 와서 돈을 벌라고 하면서 조심만한다면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고 유혹한다. 하지만 그 은광은 너무 위험해서 대부분 죽거나 불구가 된다. 죽는다는 것은 믿음에서 완전히 파선한다는 것이고, 불구가 된다는 것은 크게 치명상을 입어서 기쁨과 열정을 잃은 무기력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크리스천과 소망은 단호하게 데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순례의 길을 떠난다.
하지만 뒤이어 온 두마음은 경각심 없이 이 데마의 유혹에 빠져 은광으로 간다. 그리고 다시는 순례의 길에서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결국 두마음은 부자가 되려는 욕심 때문에 믿음에서 파선하여, 천성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그것을 보게 된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함을 책망하신다.
미지근함을 책망하시다
요한계시록 3:14-22에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신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8절). 예수님이 아멘이시라는 것은 그분은 언제나 하나님께 ‘예’ 하고 순종하시는 분임을 말한다. 동시에 주님은 참되고 충성된 증인이시다. 증인이라고 할 땐 죽음, 순교를 내포하는 말이다. 목숨을 걸고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분이 창조의 근본이시라고 한다. 특별히 여기서는 새 창조의 시작, 우두머리이심을 말한다(요 1:1-5; 골 1:15-18). 하나님이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님을 세상의 머리로, 하나님의 보좌에 앉히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한마디 칭찬도 없이 책망을 쏟아내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15-16절). 주님은 그들이 미지근해서 토하여 버리실 것이라고 책망하신다. 충성된 증인이신 주님이 보실 때 그들의 미지근한 모습은 너무나도 역겨운 것이었다.
여기 ‘미지근하다’는 말은 라오디게아의 식수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식수가 부족했던 로마의 소도시들은 수도관을 통해 식수나 온천수를 공급받았다. 라오디게아는 10킬로미터 떨어진 북쪽 히에라폴리스에서 뜨거운 온천수는 공급받았다. 차가운 물은 더 멀리 18킬로미터 떨어진 골로새의 만년설이 녹은 생수에서 공급받았다. 그런데 너무 먼 거리를 관을 통해 지나다보니 뜨거운 온천수는 식어서 미지근해졌고, 차가운 생수도 대지의 열기로 미지근해졌다. 결국 시원한 생수로도 부적합하고, 뜨거운 온천수로도 부적합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가 이처럼 미적지근했다는 것이다. 그 믿음의 온도가 주님이 사용하기에 너무나 미지근하여 그들을 토해 버리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해진 걸까? 그 이유를 17절에서 엿볼 수 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그들의 믿음의 열정을 미지근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세상의 부요함이었다. 그들은 부자였기에 부족한 것이 없었고, 그러한 세상의 안락과 쾌락으로 믿음의 열정을 다 잃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에 대한 주님의 진단은 어떤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영적으로 너무나 불쌍하고 가련한 상태라고 진단하신다. 영적으로 가난하고 나약하고 병든 상태라는 것이다.
미지근함이란 질병의 심각성
우리는 여기서 이 미지근함이란 것이 얼마나 심각한 영적인 질병인지 보게 된다. 먼저 이 미지근함은 영적인 나태함이라고 할 수 있다. 나태함은 중세의 일곱 가지 중대한 죄악 중 하나로 꼽힌다. 오스기니스는 삶이 안전하고 호화롭고 최신 설비를 갖추게 되면 나태함이 가까이 찾아온다고 했다. 부유해져서 세상의 것에 부족함이 없으면 영적으로 나태함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태함을 ‘중년의 질병’이라고도 한다. 젊은 날의 고난을 지나 성공을 경험한 중년들이 겪는 질병이란 것이다. 특별히 부족한 것이 없고, 특별히 더 이루고 싶은 것도 없고, 자녀들은 잘 크다보니, 이만하면 됐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삶이 평안하니, 전처럼 어려울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던 기도도 사라진다. 따라서 영적인 활력, 뜨거운 열정이 식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 어느 정도 안정된 삶,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 찾아오는 질병이다. 다윗도 주변 나라를 정복하고 조공을 받으며 안정을 누리던 그때, 나태함이 찾아오고, 어느 날 늦게까지 잠을 자다가 결국 큰 죄에 빠지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지근함이 어떤 특정한 죄를 짓지 않은 상태이기에 스스로 심각한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물이 미지근하면 세균이 번성하여 쉽게 상해버린다. 이처럼 영적으로 미지근해지면 그 안에서 모든 죄의 바이러스가 번성하여 어느 날 갑자기 큰 죄악으로 나타나게 된다. 다윗이 늦게까지 잠을 자다가 밧세바를 보고 유혹에 넘어간 것을 보면, 그 미지근함 속에 이미 죄의 바이러스가 증식되고 있던 것이다. 결국 미지근한 상태는 아주 가련하고 헐벗고 눈먼 상태인 것이다. 언제든지 죄의 노예가 되어버릴 그런 상태이다. 이 미지근한 상태로 내버려두면 큰일 난다.
동시에, 이 미지근함은 두 마음을 품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엔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는데, 지금은 내가 부자여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우울하면 주님 바라보고 찬양하고 기도했다. 그런데 이젠 우울하면 쇼핑의 즐거움을 누리고, 친구와 여행을 하고, 휴일에는 친구들과 골프를 치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 외식을 즐기다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자신에게 만족과 기쁨을 주는 다른 무엇인가가 생긴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한마음은 주님께, 또 한 마음은 세상의 부요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이 미지근해진 것이다. 몸만 교회에 있고, 마음은 세상에 있던 것이다. 천로역정에서 두마음이 결국 천성에 이르지 못하고 믿음이 파선하게 되는 것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던 것이다.
주님은 이들을 향해서 주님께 와서 무엇인가를 사야한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절). 그들이 주님께 사야 할 목록은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이것들은 신자로서 아주 필수적이며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이러한 것들이 없이 신자라고 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다. 신자로서 갖추어야 할 그런 가장 기본적인 것을 예수님께 가서 사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은 오래 믿은 중직인 신자에게 새신자반에 들어가서 믿음의 기초부터 다시 배우라는 말과 같다. 그들에게 신앙의 기본적인 터를 다시 닦으라는 말은 그들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를 보면 도의 초보에 머물며, 그 터를 반복적으로 닦은 사람들이 광야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광야생활 내내 만나도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함께하고 그런 엄청난 은혜 기적을 맛보았다. 그런데 조금만 힘들면 번번이 원망하고 불평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의심한다. 그들의 광야생활은 이런 일의 반복이었다. 40년 동안 계속 은혜가 반복되고, 계속 원망과 의심이 반복된다. 결국 그들의 광야생활은 도의 초보의 반복이었다. 그것을 넘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도의 초보의 반복이었다. 결국 그들은 쉼 없이 의심했다. 그들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약속을 받았는데 믿음을 화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미지근한 마음이 뜨거워질 수 있을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영적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주님께 가서 사야한다. 첫째, 주님은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신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18절). 불로 연단한 금은, 연단된 믿음을 말한다. 세상의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믿음을 말한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가진 바로 그 믿음이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가난하고 작은 능력을 가졌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의 가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주님은 그들에게 천국 문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천국 문을 열도록 열쇠를 맡겨주셨다. 그리고 그들이 하늘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셨다. 이것이 진실한 믿음의 가치이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그 천국의 문을 열고 하루라도 숙박할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미지근한 믿음, 두 마음을 가진 그 믿음은 천국 갈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삶을 팔아서, 자신의 마음을 드려서 진실한 믿음을 사야한다. 세상의 금이 아니라, 진실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 그들이 사야할 것은 흰옷이다.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18절). 라오디게아는 아주 값비싼 흑색 양모의 원산지였다. 그들은 강남에 사는 부인들처럼 유명한 명품을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옷 중에 천국의 예복인 흰옷은 없었다. 몸을 위해서는 아름다운 명품이 많았지만, 영혼은 옷 한 벌 없는 벌거숭이였다. 모든 죄를 가려줄 의의 흰 옷은 어디 가서 마련해야 할까? 예수님은 ‘내게로 와서 사라’ 하신다. 예수님께서 이 흰 옷은 예수님만이 마련해 주시는 의의 옷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고, 그분의 자녀의 신분을 얻게 된다.
세 번째, 그들이 주님에게서 사야할 것은 안약이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절). 라오디게아는 실제로 안약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안약을 사서 바름으로 모두 건강하고 밝은 눈을 가졌다. 그저 시력만 좋은 것이 아니라, 그들은 세상을 보는 경제적인 눈도 밝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영적으로 어두웠다. 천국으로 가는 길을 보지 못했다. 말씀을 보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땅의 것만 보이고 하늘의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내게로 와서 안약을 사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만나면 눈이 열리고, 성경이 이해되고, 복음이 믿어지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듯이, 우리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하시는 구원자이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 사야한다는 것이다. “내게로 와서...사서”가 세 번 반복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들이 사야하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썩어질 금 대신에 연단된 금을, 양모 명품 옷 대신에 흰옷을, 눈을 치료하는 명약 대신에 영적인 안약을 사라는 것이다. 세상의 그 진기하고 값비싼 것을 사기 위해서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들의 삶, 그들의 영혼을 바쳐서 그것을 샀을 것이다.
파우스트는 악마와 거래를 한다. 조건은 악마가 파우스트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모든 봉 사를 다하고, 때가 되면 자신의 영혼을 악마의 손에 전적으로 맡긴다는 것이었다. 이 계약으로 인해 파우스트는 현세와 과거를 오가면서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 쾌락, 돈, 명예, 권세, 지혜 등 모든 것을 만끽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점점 욕망의 화신으로 변하여 살아가던 파우스트는 불현듯 악마와 거래한 그날에 이르러 죽음을 맞게 된다. 세상의 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을 팔아서 거래하는 것이다.
그 다음엔 징계를 하신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절).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멸망으로 빠져드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먼저 책망하신다. 다윗이 죄를 범하였을 때 나단을 보내어 책망하셨다.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이 얼마나 큰 죄악의 길인지 따끔하게 책망하며 알게 하셨다. 죄를 마음에만 품는 것과 실행한 것은 다르다. 그 죄로 인한 쓰디쓴 열매를 먹게 함으로 징계하신다.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죽었다. 다윗의 아들들이 겁탈, 반역 등으로 죽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다윗에게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반드시 책망하고 징계하신다. 주님의 백성은 결코 제 욕심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영혼을 팔아서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그 길은 성공하지 못한다. 나도 눈 한번 딱 감고 세상처럼 살면 돈 벌고 성공할 것 같다? 천만에 말씀이다. 만약 영혼을 팔아서 세상일에 몰두하는 데 잘된다, 계속 잘나간다? 그는 버림받은 사생자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는 결코 세상의 길에서 형통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두 마음을 품어 봐야 안 된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다 놓친다.
그래서 다시 열심을 내고, 회개해야 한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절). ‘열심을 내라’ 하신다. 믿음의 온도를 높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것은 돌이키라는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여 세상에서 주님께로 돌이키려면 믿음의 온도를 높여야 한다. 미지근하면 세균이 번식하기 쉽다. 몸의 온도가 낮으면 질병에 걸린다. 이처럼 죄와 마귀는 미지근한 마음에 번식한다. 우리가 이 세상 욕심을 버리려면 한 가지밖에 없다. 믿음의 온도를 높이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믿음의 온도를 높일까? 어떻게 해야 미지근함에서 벗어나 온전히 주님만 뜨겁게 사랑하며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 여기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20절).
주님이 우리의 문을 두드리신다. 지금 주님이 그의 문밖에 서 계신다. 그가 세상의 부에 마음을 빼앗겨 주님을 문 밖에 세워 두었다. ‘서서’는 현재완료형이다. 주님이 문 밖에서 과거부터 서 계신 것이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노니’는 현재형이다. 현재 계속 두드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은혜이다. 우리가 두 마음을 품고 있어도 쉼 없이 베푸시는 은혜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을 애굽에 두고 원망하고 의심할 때도 매일 만나를 주시고 매일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하늘의 은혜를 베푸셨듯이, 주님은 계속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
동시에 ‘내 음성을 듣고’라고 하신다. 주님은 두드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를 부르고 계셨다. 사랑의 음성으로 그를 부르셨다. ‘내 사랑하는 자야, 나의 어여쁜 자야.’ 그를 부르셨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신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음성을 들려주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문을 여는 것이다. 헬라어에서 ‘문’은 권세와 동의어이다. 문을 연다는 것은 대치하던 군사가 성문을 여는 것과 같다. 항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신다. 그 주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20절). 주님이 그와 함께 먹는다고 하신다. 유대인들은 결코 이방인과 함께 먹지 않았다. 부정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지 않은 것이다. 유대인만이 아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밥 먹는 데서도 신분질서가 분명했다. 양반들은 남자들도 겸상을 하지 않고 할아버지 따로, 아버지 따로, 형님 따로, 동생 따로 단독 상을 받았다. 평민들도 남자들끼리 상위에서 먹었다. 여자들은 방바닥에서 대강 대강 먹었고 노비들은 마당에서 먹었다. 양반들이 아내와 잠은 같이 자도, 밥만큼은 절대로 같이 먹지 않았다. 유대인들도 그랬다. 그러므로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큰 호의이고 대우였다.
특별히 ‘나는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는다’고 하신다.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 내가 ‘너와 함께’ 먹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님과 함께’ 먹는다는 것이다. 초점은 ‘무엇을’ 먹는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먹는가에 있다. 주님이 나에게 주목하시고 나와 친밀한 교제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주님께 집중하고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이다. 즉 주님과 나만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먹는다는 것 자체도 간단한 식사가 아니다. 유대인들의 만찬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면 같이 밥 먹으러 간다. 그리고 커피도 마시러 간다. 긴 시간을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한다. 주님은 이처럼 우리와 함께 깊은 교제를 하시길 원하신다는 것이다.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은 현재형이라고 했다. 이것은 주님은 과거에만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매일 두드리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매일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는 매일 문을 열어야 한다. 그렇게 매일 매일 주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하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문을 두드리는 이유이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것 말고는 없다. 물질의 부가 주는 즐거움, 세상에 빼앗긴 마음을 찾는 것은 이것 외에는 없다. 부부도 매일 대화하고 매일 같이 밥 먹고 커피도 마시고 간식도 먹고 그러면서 대화하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할 때 사랑이 깊어진다. 이처럼 우리가 매일 주님과 만나야 한다. 매일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매일 그분께 기도하며 은혜를 덧입어야 한다. 늘 그분 안에 포도가지처럼 거해야 한다. 이것 외엔 방법이 없다. 이것 외에는 이 세상을 이길 방법이 없다. 오직 한 가지 주님과 교제하는 것뿐이다.
주님과 보좌에 앉음
이 싸움을 이기면 보좌에 앉게 하여 주신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21절).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세상의 부요함이 주는 유혹을 이겨내고 미지근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믿음의 온도를 높이고 주님처럼 우리도 충성된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당신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인가? 매일 매일 매일 마음을 열고 주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원씽(The One Thing)에서 게리 켈러는 진정한 성공은 한 가지 일에 얼마나 집중하는가에 달렸다고 한다. 오늘날 멀티태스킹을 강조하지만, 오히려 생명이 달린 일에서 멀티태스킹은 큰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있지만, 그 누구도 두 가지 일에 동시에 집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운전을 하면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면 집중력이 떨어져 사고의 위험이 높아진다. 의사가 수술을 하면서 드라마를 본다면 한 사람의 생명은 크게 위태하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많은 일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제대로 한 가지에도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늘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긴다. 열매 맺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을 데려오라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 갈급한 사람, 사막 속에서 목말라 하고 영원한 나라의 샘을 그리며 한숨짓는 사람을 데려오라. 그런 사람들을 내게 데려오라.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냉담한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 주님과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주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