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한국 상황은 한마디로 ‘혼란’이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의료 등 전 분야에서 갈등과 분열이 극심해지고 있다. 요동치는 파도 속에서 배가 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복원력이 있기 때문이다. 복원력이란 배가 중심을 잃어도 오뚝이처럼 다시 중심을 잡고 일어나는 능력을 말한다. 2025년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한국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국 교회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거대한 배가 중심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복원력을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총 7번에 걸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며, 한국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본질적인 대안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_필자 이인호
세무서 직원이 한 목사님의 집에 불쑥 찾아왔다. “댁의 재산을 조사하여 탈세 여부를 알아보려고 세무서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대뜸 목사님이 자기는 숨겨둔 재산이 많다고 했다. 세무 공무원은 숨겨준 재산 목록을 빠짐없이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러자 목사님은 자신의 재산 목록 1호가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저에게 열정을 주시고 영원한 처소를 마련하고 계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저의 가장 귀중한 보물입니다.” 세무서 직원은 그것 말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대라고 했다. “예, 저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며 나를 돕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지요. 솔로몬 왕이 말했듯이 귀한 아내는 진주보다 가치가 큽니다.” 세무 공무원이 실망하여 다른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또 건강하고 믿음 좋은 자녀들이 있지요. 커서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을 보석들입니다.”
“그것 말고 뭐 없습니까?”
“제 마음속에는 그 어떤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까? 예, 이것이 저의 전 재산입니다.”
직원은 아무것도 적지 못한 채 장부를 덮으며 이야기했다. “댁은 정말 부유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재산 가운데 세금을 내야 할 것은 하나도 없군요.”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복음이 얼마나 충만한 복을 담고 있는 보석인지 모르고 살 때가 많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가치가 있는지를 잘 모른다. 그래서 그분을 진실하게 믿으려고 하지 않고 다른 무엇을 더하여 그 믿음을 더럽힌다.
작은 능력으로도 주를 믿고 섬긴 것이 진실한 믿음이다
요한계시록 3:7-13의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이 없는 교회다. 주님께서 이 교회를 칭찬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8절).
작은 능력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신앙을 지킨 것, 이것이 주님의 첫 번째 칭찬이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처한 상황은 매우 비슷했다.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다. 그리고 로마황제 숭배, 그리고 우상숭배가 만연했다. 다른 교회들처럼 빌라델비아 교회도 온전한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처한 그 교회를 주님은 칭찬하신다. 그들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 시대와 타협 없이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는 칭찬이다. 숫자도 적고, 교인 중에 유명한 사람도 없고, 재력가도 없다. 핍박이 오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법적으로, 재정적으로 도움을 받을 데가 없는 그런 교회다. 그런데도 잘 믿었다. 주님은 그 믿음을 칭찬하신다.
정량평가와 정성평가라는 것이 있다. 정량평가는 양과 수치만 보고서 내리는 평가다. 그런데 정성평가는 질을 본다.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다른 것을 보는 것이다. 수능점수만이 아니라 그가 가진 인성, 봉사, 창의성을 본다. 그가 차상위계층인가? 한부모가정은 아닌가? 농촌지역에 살지는 않는가? 이런 것을 보는 평가다.
우리 주님도 양이나 수치를 단순히 비교하여 판단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작은 능력으로 어떻게 믿음을 지켰는지를 보신다. 정성평가를 하신 것이다. 주님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가난한 과부를 보시고 그가 가장 많이 드렸다고 하셨다(눅 21:1-4). 그 과부는 가진 것을 전부 드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작지만, 그의 능력에 비하면 곧 정성평가를 해보니 정말 큰 헌신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빌라델비아 교회의 열악한 환경, 약한 몸, 경제적 궁핍, 선교지의 핍박 등을 생각해 보니, 그 속에서 주를 믿는 그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진실한 믿음의 가치를 주님의 축복에서 본다. 빌라델비아에 나타나신 주님은 다른 교회들과는 사뭇 달리 넉넉히 축복하시는 모습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7절).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궁에 국고 관리를 맡은 셉나라는 고위 관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자신의 이익과 영광을 도모했다. 하나님은 셉나의 관직을 박탈하고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을 국고 관리자로 세우셨다. 그리고 주님은 엘리야김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자가 없으리라”(사 22:22). 신실한 엘리야김에게 왕의 국고를 관리하는 실권이 있음을 말씀해 주셨다. 이처럼 예수님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는 것은,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실권을 가지신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거룩하고 진실하시다. 그 거룩하고 신실하신 분은 하늘의 보고를 아무에게나 열어 주지 않으신다. 진실한 사람에게만 열어 주신다.
그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8절).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하신다. 그 열린 문은 곧 천국의 문, 구원의 문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그리스도께서 그 문을 열어 두시고, 그것을 닫을 자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너희의 믿음은 흠이 없다’는 말씀이다. ‘너희는 진실하다’는 말씀이다. 작고 약할 때, 어려울 때 주를 섬기는 그 믿음에는 무엇이 섞이거나 한 것이 없다. 누가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묵묵히 주를 섬기는 그 믿음이 진실한 믿음이다. 주님은 그런 믿음을 인정하신다.
나아가, 주님이 오셔서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고 열린 문을 두었다는 선언은, 단지 ‘너희는 구원받는다’는 것 그 이상의 말씀이다. 그 의미를 우리는 그 다음 말씀에서 발견한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9절). 주님이 유대인들의 회당을 다시 한 번 사탄의 회당이라고 말씀하신다. 서머나 교회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계 2:9). 왜 유대인들의 회당을 두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로마에서 합법적 지위를 가진 유대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로마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터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짓말로 교회를 핍박하고 회당에서 그들을 좇아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비방이 더 치명적인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을 가리켜 주님은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신다. 나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신다. 그들은 사탄의 회당이다. 그들이 문을 닫았지만, 내가 너희에게 천국 백성의 열린 문을 두었다. 너희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주님은 영적인 선언에만 그치지 않으신다.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신다.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9절). 빌라델비아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인들 중 몇이 그 교회에 와서 절을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실 여기의 ‘몇’이라는 번역은 충분하지 못하다. 같은 구절을 새번역은 원문의 의미에 더욱 맞게 번역했다. “보아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결국 빌라델비아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인들이 그들 앞에 꿇어 엎드릴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특별히 이사야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앞에 다윗의 열쇠, 열린 문도 이사야서에서 인용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무릎 꿇고 엎드린다는 개념도 이사야서의 여러 곳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사 45:14). “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사 60:14).
이사야서에서 ‘와서 무릎 꿇는 자들’은 그들을 핍박하고 멸시하던 이방인들이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에게 와서 무릎 꿇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그 말씀을 인용하여 유대인들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무릎 꿇는다고 하신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런 사랑을 받는 특권은 유대인들의 것이었으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버렸고 믿음에서 떨어졌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과 약속은 신약 교회가 이어받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오히려 유대인들이 와서 절하며 엎드릴 것이라는 말씀이다. 결국 너희가 진정한 이스라엘이라는 말씀이다. 너희가 진정 내 백성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진실한 믿음의 가치이다. 이 믿음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모든 축복, 약속, 보물을 다 이어받은 것이다. 믿음 안에서 완전한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하신다. 그들이 무릎 꿇고 돌아와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진정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나만 아는 게 아니라, 그들도 알고 인정하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만 아는 주관적인 데서만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아하, 저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종이야’ 하는 것을 알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어떤 청년이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신과 의사는 자신이 쥐라고 믿는 그를 치료할 방법을 찾았다. 의사가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 당신은 과거에 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쥐가 아니고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가 어떻게 사람이 되었는지 열심히 설명했다. 그때 청년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아 그렇군요. 제가 사람이 되었군요.” 청년은 자신이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드디어 퇴원하게 되었다. 그와 작별 인사를 한 의사가 미처 돌아서기도 전에 그는 다시 병원으로 뛰어들어 왔다. 청년이 벌벌 떨면서 말한다. “선생님, 병원 바로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어요.” “아니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쥐가 아니란 말입니다. 고양이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청년이 의사의 눈치를 보며 말했습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제가 더 이상 쥐가 아니라는 것을, 제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 그렇지만 선생님, 고양이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우리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나는 내적으로는 풍성한 주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우리의 겉모습만 보고 우리가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기 무릎 꿇는 것이 무슨 힘과 지위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와서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발견하는 것이 있다. 세상이 교회를 통해 천국 문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핍박하고 멸시하던 그들이 회개하고 교회로 들어와서 무릎 꿇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국의 문을 여는 다윗의 열쇠를 주님이 교회에 주셨음을 암시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다(마 16:19).
교회에 천국 열쇠를 주셨다. 교회는 이제 이 세상을 향해 열린 문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여 천국 문을 여는 열쇠를 받았다.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간다. 천국백성으로 준비된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진실한 믿음을 가진 주의 백성들에게 천국 문을 열어 주실 뿐만 아니라 천국을 여는 열쇠를 주신다.
인내로 주를 섬기는 것이 진실한 믿음의 증거이다
주님께서 두 번째 칭찬을 하신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10절). ‘인내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약속이고 소망이라는 것이다. 현재에는 고난이 있다. 그런데 말씀은 약속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하며 인내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인내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고난 속에 있다는 것이다. 작은 능력을 가졌는데 고난의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이다.
똑같은 짐을 져도 몸이 약한 사람은 더 많은 인내를 요한다. 똑같은 봉사를 해도 적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똑같이 주의 일을 해도, 선교 현장이나 핍박의 환경에서는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일의 양이 아니라 그 인내의 무게이다. 어떤 사람의 신앙의 무게는 그의 인내의 무게와 비례한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인내를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셨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10절).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내가 너를 지킨다고 하신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일에 손해가 있고 핍박이 있으면 그 믿음을 버린다. 그런데 그때에 인내하여 복음을 끝까지 믿으면, 말씀에 순종하며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않으면, 결국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신다.
주님은 언제 우리를 지켜 주시는가? 시험의 때라고 하신다. 그 시험의 때는 언제인가?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10절). 이때는 바로 시험하여 알곡과 가라지를 골라내는 때이다. 그때 거짓된 자를 불 못에, 신자는 연단되어 천국에 들어간다. 이것이 시험의 때이다.
그런데 이 시험의 때를 면제하여 주신다고 하신다. 그들이 이미 고난 속에서 인내함으로서 진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기에 그렇게 하신다. 그들은 이미 이 고난의 시간에 인내 속에서 그 믿음이 연단된 것이다. 순수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시험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험의 때를 면해 주신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연단 받은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다. 이 땅에서 비록 힘들고 고난스럽지만 인내할 때 믿음은 연단됨을 우리는 믿는다. 그 인내의 믿음을 주님이 인정하신다.
그런데 이 말은 시험의 때, 환란의 때가 그냥 지나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에 주님이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불 시험에서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그것이 금보다 귀하다고 하였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이라고 한다. 금은 산화서열도에서 거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다. 거의 산화가 불가능한 금속이란 것이다. 신라시대 금관이 천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그런데 그 금이 불로 연단하여 없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불은 마지막 종말의 불을 의미한다. 그때 모든 체질이 풀어진다. 불로 이 세상이 심판 받는다. 그때에는 이 불의 연단 앞에 금도 다 사라진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금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신다. 금은 다 타버리지만, 금보다 귀한 믿음, 연단된 진실한 믿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예수님만 믿는 순수한 믿음은 그때에 살아남아서 우리를 보호한다. 주님이 그날에 우리를 지키신다. 진실한 믿음이 이렇게 소중하다. 금보다 귀하다. 우리가 이 땅의 금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을 버린다면, 결국 그 금은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 한다. 그러나 오직 믿음은 우리를 지켜준다.
이처럼 종말에 우리를 구원하는 그 믿음은, 지금 고난의 세상에서도 우리를 지켜 준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속에 던져졌을 때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 같은 이가 함께하셨다. 주님이 함께 하셔서 불이 태우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이 풀무 불같은 세상을 지날 때에 그 불이 우리를 사르지 못하도록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 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예수님을 믿는 이 믿음이 우리를 지켜 준다. 비록 작은 능력이고 세상에 백이 없어도, 하나님은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지켜 주신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11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고 하신다. 네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인내하면서 주님을 진실하게 섬기라 하신다. 그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신다.
면류관은 마라톤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씌워주는 월계관이다. 그가 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그 긴 마라톤을 인내로서 잘 달렸다는 것이다. 누군가 그런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면 그것은 인내가 그를 그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다른 선수들보다 더 인내하며 훈련하고 달렸기에 챔피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기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챔피언의 자리에 올라오게 했던 바로 그 인내의 자세이다.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우리는 계속 인내로 경주해야 한다.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 하신다. 주님은 꼭 재림 때만 오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삶 속에 우리를 보호하러 상시 오신다. 응답하시고 통치하신다. 주님은 언제나 속히 오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시지 않으신다. 고난 속에 있는 자녀들을 언제나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신다. 주님은 속히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만 더 참으라 하신다. 영원히 인내만 하는 게 아니다. 속히 오실 것이니 인내하라 하신다.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인내 속에서 진실하게 주님만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진실한 믿음의 사람을 성전 기둥이 되게 하신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12절). 성전 기둥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쫓겨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유대회당에서 쫓겨났다. 정통파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쫓겨날 때 자신들이 정말 버림받은 것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12절). 주님은 그 기둥에 세 가지 이름을 새겨 주신다.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 주신다. 그들이 진정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새겨 주신다. 그들이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님의 새 이름을 새겨 주신다. 그들이 진정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하늘 백성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문을 닫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국 문을 열어 주신다. 하늘 성전 문을 열어 주신다.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은 누구인가? 작은 능력을 가졌는데 말씀을 지키며 인내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믿음의 힘이 큰 사람들이다. 겉보기엔 약해 보이고, 재정도 건강도 환경도 어렵고, 재주도 적고, 숫자도 적다. 그런데도 그 시대 속에서 타협하지 않고 말씀을 지키며 섬기고 헌신하는 사람들, 그들이 진정 강한 믿음의 소유자이다. 많은 억울함과 핍박을 당하는 힘없는 자들, 그러나 믿음을 지키는 그들이 진정 믿음의 근력이 강한 사람들이다.
성전의 기둥처럼 쓰임 받는 사람들은 헤라클레스처럼 육체적인 힘이 강하거나 세상적인 능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믿음의 근력이 강한 사람이다. 육체적인 힘은 50킬로그램도 못 들 수 있고, 100킬로그램도 못 떠받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근육으로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떠받칠 수 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고, 하늘의 별처럼 많은 열방의 시조가 되었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99세에,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가장 약한 그때에도 믿었다. 굳세게 믿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떠받친 것이다.
오늘날도 주의 교회의 기둥처럼 쓰임 받는 사람들은 바로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이다. 어려운 일이 있다면 지금 그 믿음의 근육을 키우는 중이다. 믿음으로 인내하여 기둥 같은 사람들이 되자.
그들이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의미가 유대인 회당에서 쫓겨나듯 쫓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배경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그 지역에 지진이 많이 일어났다. 그래서 성 안에, 벽에 금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불안해서 많은 사람들이 성 밖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들은 그 도성 안의 안전한 삶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게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작은 능력을 가졌지만 진실하게 인내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혈통도, 가문도, 능력도 아니다. 오직 믿음이다. 이것이 이사야서에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사 56:3-5).
아무리 자격 없는 이방인이요 율법으로 흠이 있는 자여도 예수님 안에서 여호와께 연합한 사람들은 아들딸보다 나은 기념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 성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약하지만 진실한 인내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경험하는 축복이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유능하고 잘생긴 나무는 사람들의 눈에 띄어 금방 팔려간다. 하지만 아무의 눈에 안 띄어서 자리를 지키게 되는 못생긴 나무만이 경험하는 게 있다. “그는 그 동산에 부는 산들 바람, 여름날의 시원한 소나기,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이 주는 행복을 안다. 그 산에 사는 온갖 동물들과 대화하고, 아름다운 새소리를 즐기며, 풀벌레들의 합창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모든 것들과 함께 노래하며 사랑을 나누는 행복을 안다. 밤에 쏟아지는 달빛과 별빛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드는 기쁨도 알고, 거센 비바람이 불 때에는 함께 산을 지키는 다른 못생긴 나무들의 소중함도 알게 된다. 그는 산을 사랑한다. 그래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이미 행복하다. 그래서 바람이 차갑고, 눈이 내리고, 거센 시련이 와도 꿋꿋이 포기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킨다.”(박완서, 한 길 사람 속) 이것이 못 생긴 나무가 누리는 은혜다. 이것이 작은 능력을 가진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이 누리는 은혜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굳게 서서 이처럼 나가지 않고, 뿌리내리며 산을 지키는 그런 축복을 경험하면 좋겠다. 이런 저런 시험 어려움 같은 것 다 이기고 인내로 이기고 뿌리 내리자. 못생긴 나무가 되어 끝까지 진실한 믿음을 견디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우고 기둥같이 세워지고, 그 속에서 공동체의 축복을 맛보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3절). 성령의 음성을 듣고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