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하는 삶과 바르게 살아가는 삶이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가? 또한 우리는 원하는 삶을 열심히 살다가 어느 시점에서 ‘그것이 바른 것이냐?’라는 질문을 누군가로부터 받거나 아니면 스스로 하게 되는 상황이 올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 심사숙고해 본 후에 바르지 않을 때 내가 원하는 삶을 멈추거나 포기하는가? 아니면 그 질문을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계속 고집하며 살아가는가?
아굴의 기도(잠언 30:7-9)는 이런 상황을 예측하며 드리는 지혜의 기도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면서도, 바른 삶에 대한 인생의 전략을 보여주는 지혜의 기도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바른 삶을 지키는 선에서 정도껏 원하는 것이다. 이런 인생에 대한 지혜로운 전략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타락한 존재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역시 더 깊고 넓게 그 죄의 실상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에는 세상은 안전하지 않기에 지혜와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잠언, 특히 아굴의 잠언이다.
그 지혜의 기도는 두 가지를 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다. 그것은 거짓된 삶을 살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내가 원하는 것만을 살아가는 삶이 바로 거짓된 삶이다.
헛된 것과 거짓말
아굴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겠다고 말하며 이 기도를 시작한다. 이 기도의 시점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 동안 드려왔던 기도다. 다시 말해 어느 시점에서, “나는 이런 거짓된 삶을 살지 않겠다!” 결단하는 기도다. 첫 번째 기도는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이다. 여기서 “헛된 것과 거짓말”이란 잠언의 중언법상 하나다. 즉 헛된 거짓말이다.
왜 거짓말을 하는가? 그렇다면 헛됨과 거짓이 함께 붙어 있는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 이 의미를 단어로 풀 것이 아니라 문맥에서 정확하게 어떤 의도를 말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아굴의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6). 여기서 거짓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것은 “더 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동시에 “네가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렵다”고 경고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지혜자가 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헛된 거짓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더하다는 것이 왜 거짓말일까? 하나님의 말씀은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상태다.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됨이 없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그대로다. 따라서 그 하신 말씀을 붙들고 의지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어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거짓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거짓 없는 삶”이다. 따라서 거짓된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다.
이제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하며 사는 것일까?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인가를 더하며 사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더하여 “하나님도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실거야” 말하며 살아간다. 바로 이것이 지혜자가 간절히 벗어나기를 원하는 거짓된 삶,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말, 자기 생각을 더하여 살아가는 삶이다. 이런 삶은 극단적인 부와 가난에서 다시 드러나게 된다.
거짓된 삶을 극복하기 위한 중도의 삶
아굴의 두 번째 기도는 거짓된 삶을 극복하기 위한 실재적인 기도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 기도의 내용에는 지혜자의 지혜가 담겨 있다. 무엇이 위험한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지혜가 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양극단의 위험. “나를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옵시고.” 거짓된 삶으로 나아가는 두 가지의 경우를 현실 가운데서 직관하게 된다. 그것은 지나치게 부하든지 지나치게 가난하든지다. 부와 가난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마음이 문제다. 양극단의 위험이란 이런 것이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부의 위험: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이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거짓말이다. 부를 소유하고 축적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을 애써 기억하지 않고, 마치 자신의 노력과 지혜로 부자가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그런 의도는 없어도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기만하든지, 그것이 어떤 형태든지, 이 모든 것이 다 거짓된 삶이다.
신명기에서도 광야에서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게 될 날이 올 때에, 교만해져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제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신 8:17). 이런 위험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계속되었고, 선지자들에게까지 경고로 말씀하셨다. 잘되면 잊어버리고, 잘 안되면 기억하는 못된 습관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더하는, 자기 생각, 자기 지혜, 자기 노력을 도하는 거짓된 삶의 한 모습이다. 유리하면 더하고 불리하면 빼버리는 계산법인 것이다. 오늘 잠언의 지혜자는 그런 경우에 이르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가난의 위험: 도둑질,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함. 또 하나의 위험은 이런 것이다.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이는 가난해서 도둑질하게 된 상황이다. 배불러서 교만하게 되는 것만큼이나 가난해서 도둑질하게 되는 상황은 본질상 같은 위험이다. 도둑질을 하고 난 이후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는 점이 바로 거짓된 삶의 모습이다. 여기서 “욕되게”라는 말씀은 “붙잡게”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다’라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라고 한글번역 성경은 사실상 의미 번역한 것이다.
아마도 도둑질하고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면서, “나는 도둑질 안 했습니다” 하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붙잡다”라는 의미로 더 넓게 생각하면, 이런 경우일 것이다. 도둑질을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중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다룬다”라는 의미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어떤 형태로든지, 그 모든 삶은 다 거짓된 삶이라는 것이다. 거짓 맹세든지, 도둑질을 숨기고 사는 삶이든지 다 거짓된 삶이다.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기만과 속임의 삶이다.
이러한 가난과 부의 경우에 찾아오는 위험, 거짓된 삶의 결과를 두려워하며, 하나의 대안적인 삶을 제시한다.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그 해결책이란 이런 것이다.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필요한 양식, 다시 말해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이다. 극단적 가난과 부를 피할 수 있는 어느 곳에서 살기를 기도한다. 양극단의 위험을 피하고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지점, 그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여기서 필요한 양식이란 문자적으로 “내 몫의 떡”이란 단어다. 필요 또는 몫이란 결국 매일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몫, 일용할 양식이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하루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먹었던 만나의 상징으로부터,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는 기도에까지 나타나는 일관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용할 양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채워지는 양식을 의미한다. 하루 이상을 쌓을 수 없고, 안식을 위해서는 이틀 치만을 쌓을 수 있는 양식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양식이다. 그래서 일용한 양식은 곧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에게 채워 주시는 특별한 양식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자로서, 세상의 유혹에 맞서 거짓된 삶을 살지 않고자 할 때에 반드시 생각하게 되는 양식이라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삶의 지혜와 전략을 원하는 자들이 선택하게 되는 양식이다.
양극단의 중간지점은 어떤 곳일까?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하는 지혜자의 기도는 극단이 주는 위험을 피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희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곳을 “중도의 삶(via media)”라고 말한다. 물질적인 삶에서의 중도는 부와 가난이 아닌 일용할 양식이지만, 다른 형태의 삶에서도 중도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중도/중간일까?
먼저 이 중도는 도피처가 아니다. 군대를 가면 너무 나서지도 너무 안 나서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딱 중간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중간은 사실상 도피처와 같은 것이다. 책임 있는 행동에 대한 부담감에서 피할 구실이 바로 중간이기도 하다. 일용할 양식의 문제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중간에 있다. 극단적 부와 극단적 가난에 처한 사람들은 소수다. 중산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지만, 그곳은 그들이 만족하는 자리는 아니다.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지 전략적으로 그들이 그곳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위로 올라가려고 하고, 밑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중간은 어쩔 수 없이 있는 곳이며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지 탈출하고자 하는 땅이다.
우리가 희망하는 중도는 조금 다르다. 그곳은 바른 삶 안에서 자신의 원함을 맞추어가려는 고도의 절제된 지혜의 영역이다. 이것이 고도로 절제된 지혜의 영역이라는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의 덕에서 잘 설명된다. 과거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중용”에서 찾았다. 그곳은 덕을 잘 함양하고 절제하여 자신의 인격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장소다. 다시 말해 덕은 중용을 선택하여 행동할 수 있는 성품이다. 중용은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것의 그 중간이다. 부자처럼 지나치거나 가난한 자처럼 모자라지 않는 곳이다. 예를 들어, ‘용기’가 중간(중용)이라면 그 모자람은 ‘비겁’이고 지나침은 ‘무모함’이다. ‘절제’가 중간이라면, 그 모자람은 ‘무감각’이고, 그 지나침은 ‘익살’이다. ‘친절’의 모자람은 ‘심술궂음’이고, 그 지나침은 ‘비굴’이나 ‘아첨’이다.
이런 식으로 중용을 선택한 덕은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는 것인데, 그것은 지혜롭고 훈련된 덕에서 나온다. 또한 이런 삶은 도피처나 기회주의의 땅도 아니다. 이 지역을 고집하며 행복에 이르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자하는 간절한 바램을 이룰 수 있는 땅이다. 사실 중용은 지나침과 모자람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지나침에게는 모자란다고, 모자람에게는 지나치다고 양쪽 모두로부터 욕을 먹는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오래 있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곳을 결단하여 선택한 사람은 그것을 버티며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며 나아갈 수 있다.
물질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의 전략적 선택지는 바로 ‘중도’다. 그 선택지는 거짓된 삶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고자 소망하는 사람들의 선택지고,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행복의 영역이다.
어떤 삶을 원하는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많은 것을 얻을지는 몰라도 동시에 많은 것을 잃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원하면서 바르게, 바르게 살아가면서 원하는, 나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삶의 지혜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잠언의 지혜자가 결단하며 드린 기도는 ‘최상의 삶’이 아니라 ‘더 나은 삶’에 대한 전략이다. 예를 들어,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6). 부자이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도 물론 있겠지만, 자신을 잘 살펴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전략도 있다. 그것이 바로 중도의 삶이다. 일용할 양식으로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적어도 “하나님을 모른다”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거짓된 삶을 살지 않는 것은 삶의 질을 높이는 지혜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게 경영되고 있는가? 그 삶은 안전한가? 무엇보다 기도가 있는 삶이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