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인생을 살아 왔고, 살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의 성격도 그렇지만, 나 자신의 성격도 그렇다. 전형적인 내향인이라,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기를 받기보다는 기가 빠져 나간다. 그렇다고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더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중에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몰라 성격 이상한 노인네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돌이켜보면 어릴 때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어울리고 만나고 좋아하고 그랬던 것 같다. 거기에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어떤 지향이나 의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사람은 늘 주변에 있었고, 어울릴 기회는 많았다. 여행길에 잠깐 만난 사람과 긴 수다를 떨기도 하고, 잠시 일로 만났던 사람과 한동안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냥 그렇게 통하는 사람들이 한번씩 나타났고, 그것을 운이라고 여겼으며 그 운의 기한은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운도 희박해졌지만, 이미 알던 사람들과의 관계마저도 조금씩 달라지게 되었다. 나아가 좋은 관계란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공을 들여도 잘되지 않거나, 잘되는가 싶다가도 어처구니없이 쉽게 깨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에 더해 요즘 들어 깨닫는 것은, 그냥 막연한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의도 그리고 그를 위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바울도 자신이 향방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고전 9:26), 좋은 관계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를 확인하고 그 방향을 향해 가장 좋은 길들을 따져가며 이어가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일이 잘 이루어질 때, 사람을, 사람과의 관계를, 즐거워하는 경지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을 요즘 깨닫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이런 자세가 그냥 자연스럽게 몸에 밴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스스럼없이 호의를 표현하면서도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나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기다려 주었던 어떤 분과 며칠을 지내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이 즐거움은 뿌듯함과 성취의 감정까지 동반했는데, 어쩌면, 이게 가능한 것이었구나 하는 데서 오는 감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가깝게 알았던 분도 아니었건만, 서로에 대한 선의의 호기심과 호감 그리고 존중, 더 중요하게는 그분의 몸에 밴 기술 덕분에, 평소 남의 집에서는 하룻밤 자는 것도 힘들어 하는 성격이건만 며칠을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물론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내게 호의를 보여주고,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 같이 하루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내며 대화하고 했던 분이 비단 이 분만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 어떤 분은 무려 16년간을 알며 지낸 분도 있었다. 특별하다면 특별한 관계였는데, 이분의 선의는 어쩐지 내게 즐거움보다는 부담이었고, 이 분의 기대에 부응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늘 있었다. 이 분도 앞의 분도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차이가 있다면 앞의 분은 평신도이고 뒤의 분은 사역자였다는 것인데, 앞의 분은 그냥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거워했다면, 뒤의 분은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사명 의식을 가지고 나와 시간을 보냈다. 달리 표현하면, 앞의 분의 목적이 나 자신이었다면, 뒤의 분의 목적은 자기 사역이었던 셈이다. 이 뒤의 분과는 결국 그렇게 오랜 세월을 알았음에도 내가 중년에 접어들면서는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되었다. 즐거움이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매우 아이러니한데, 성경이 우리에게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과의 즐거움을 모르고 과연 하나님과의 즐거움을 알 수 있을까?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에게 인격성이 있다면, 인간과 제대로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하나님과도 제대로 즐거워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 기술을 익혀야 이 즐거움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한 가지 내가 알게 된 것은, 상대와의 관계에서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상대가 내게 다가오는 방식, 상대가 내게 표현하는 호의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의외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수동성인데,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든 잘하면 어그러진 관계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는 의욕을 종종 가지지만, 사실 상대방이 관대하다면 내가 잘못해도 관계는 이어진다. 이 말은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관계가 좋은 것이 마치 자신이 잘하거나 노력해서라는 자기 공덕 치하는 가능한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이다. 이런 자세는 기독교 복음의 기본자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에게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라며 다가오신 분이다(마 3:17).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하는 다른 어떤 일도 조건으로 하지 않는, 관계의 즐거움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시발점이다.
일반적으로 관계는 누군가의 다가감/다가옴, 혹은 호감의 표시로 시작이 되는데, 이 표시가 늘 제대로 간파되는 것은 아니며, 그 의도대로 잘 받아들이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잘 관찰하고 가늠하고 헤아리며 그를 위한 자리를 만들 준비를 해야 한다. 이는 내가 다가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다. 그를 위한 자리는 그의 존재를 즐거워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자리를 잘 만들면 서로를 즐거워할 수 있는 역량도 커진다. 물론 다가오는 사람을 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과 똑같은 용량의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계기가 주어지고 기회가 된다면, 서로에 대한 선의의 호기심과 호의를 이렇게 저렇게 확인하고 다지면서 서로를 즐거워하는 관계의 경지로 이끌어갈 수 있는 기본 소양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있다고 본다. 바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즐거워하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선언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이 기술은 쉽지 않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잘하는 분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드물게 그런 기술을 가진 분을 만나 좋은 경험을 했던 것인데, 사실 그런 기술이 피차 서툴러서 잘되지 않았던 관계들이 훨씬 많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실패로 끝난 관계는, 전에 글로도 썼듯, 작년 8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직장 상사와의 관계이다. 그가 더는 존재하지 않기에 이 관계는 또 한 번의 기회라는 것도 없이 끝나버렸는데, 어쩌면 그래서 더 생각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 상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제대로 만난 적은 없었으며, 그가 나에게 일자리를 제안한 것이 만남의 시작이었다. 내가 들은 이야기는 부정적인 것이 많았기에 나는 최대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그를 대하려 했지만, 일을 하면서 갈등이 생겼을 때 나의 반응은 아무래도 그런 선입견에서 자유롭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이성적 성향이 강한 나로서는 합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것에 대한 관용이 부족했다. 사람의 행동 이면의 동기나 마음을 읽는 기술이 내게는 없었고, 일을 진행하는 데에 필요한 합리적인 절차만이 가장 중요했다.
물론, 그 사람은 속된 말로 성깔이 보통이 아닌 것으로 유명했기에, 나 또한 적잖이 시달렸지만, 처음 그가 나를 대했던 방식이나, 나에게 일자리를 제안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나중에 다른 동료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는 내게 호의가 있었고, 그 나름대로는 함께 일하는 것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는 매우 서툴렀고, 자존심이 매우 강했으며,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약 그때 내가 좀 더 의도를 가지고 이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상대의 거친 성격 너머를 보고 그를 대하는 기술이 있었다면, 그래서 서로에 대한 기본적 호의와 호기심을 확인하고 확인시켜 주는 방법을 알았다면, 서로 나름 괜찮은 직장 동료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다소 미화해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당시에 직장 동료 모두가 그가 연구년을 마치고 돌아오는 때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런 기술 걸기를 한번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실패하더라도 한번 해볼 만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역시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과의 끝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과의 즐거움을 생각하다니, 사람이란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