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이 사진은 얇은 페이지의 책, 성경 책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연한 분홍빛의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는 정물 이미지입니다.
책은 나무 질감의 표면 위에 놓여 있으며, 배경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으로 인해 흐릿하게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지며, 차분하고 정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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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아마존에서 가장 오래 사랑받은 자기계발서는 놀랍게도 1994년에 출간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도 절판되지 않고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 스티븐 코비는 개인의 효과성이란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시도와 변화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요즘의 자기계발 모델 역시 이와 비슷하다. ‘성취감’ ‘자존감’ 같은 언어로 다시 포장되어, 개인의 성장 동력을 효율성과 자기결정성으로 설명한다. 어떤 일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면 실행 의지가 생기고, 실천이 가능해진다. 실천은 성취와 자신감을 낳고, 그것은 또 다른 시도의 용기가 된다는 식이다.
이런 구조를 반복하는 자기계발서는 이 책 말고도 넘쳐난다. 나 역시 이런 책들을 많이 읽었지만, 여전히 제자리다. 젊었을 땐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솟구쳤지만, 곧 ‘별것 아니네’ 하는 합리화 섞인 포기로 돌아섰다.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메시지에서 은근한 압박감을 느꼈고, 게으름과 자기합리화가 뒤엉켜 내 삶의 형태를 그대로 굳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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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중 잠시나마 유튜브 설교를 기웃거린다. 목사님이 힘주어 외친다. 자아 성장을 위해 도전하라!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라! 그런데 그 말 속에서 나는 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 이론을 떠올린다. 인간은 우주적 존재이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그 가능성이 인간 존엄의 근거라고 프랭클은 말한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인간을 변화시키고, 심지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호소력이 없는 건 아니다. 시험이 끝난 후나 과제를 마친 날 느꼈던 그 짧은 홀가분함이 기억난다. 그러나 나는 본래 어떤 일에도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가 잦고, 평가에 인색하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성취의 마침표는 좀처럼 찍히지 않는다. 혼자서 읽고 쓰고 검색하며 하루를 보내지만, “오늘 뭐 했나” 싶은 자책이 남을 때가 많다.
이런 나에게 진정한 안식은 ‘내 힘’이 아닌 ‘누군가의 힘’에 있다. 그 힘의 원형은 어릴 적 주일학교 전도사님의 설교였다. PPT는 말할 것도 없고 변변한 예화집도 없던 그 시절, 전도사님이 들려주신 그 이야기,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확신, 그 말씀은 내 안에서 살아 움직였다. 예배 후 권사님이 말아주신 국수 한 그릇을 후딱 비우고, 오후 예배 전 교회 마당을 뛰어놀던 나는 다윗의 의분과 용기를 그대로 전수받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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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주일학교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그 자리를 다양한 상담이론이 채웠다. 그러다 보니 요즘 설교에서 사용되는 몇몇 언어에 불편함을 느낀다. ‘의미적 존재’ ‘긍정적 마인드’ ‘명상’ 같은 단어들이 성경의 맥락 없이 섞여 전달된다.
이 말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쓰는 걸까? 어쩌면 유튜브 상담 콘텐츠에서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개념들은 본래 신적 기운의 유출, 피조물의 자아 완성, 우주와의 합일 따위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독교 신앙과 부합하는지를 떠나, 결국은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무거운 요구로 다가온다.
나는 그런 동기부여조차 버겁다. ‘의미와 가치적 존재’보다는, 오늘도 부족했지만 ‘살아냈다’는 위로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아무런 조건 없이 주어지는 힘, 그 안전을 최고의 매력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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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지칠 때쯤 다른 유튜브 채널로 옮겨 탄다.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기’ ‘자기를 사랑하기’ ‘하나님과 화해하기’ 같은 메시지가 쏟아진다. 그리고 자문한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면 실존의 문제가 해결될까? 우리는 이미 십자가 위에서 용서받았는데, 주님이 하신 일에 ‘자기 용서’를 보태야 하는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는 어디까지 해야 충분할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느새 자기를 충분히 사랑한 후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변질됐다. 사실 우리는 이미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수치와 불안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과 화해하자’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마치 하나님과 내가 대등한 관계에서 갈등하고, 화해하는 것처럼 들린다. 결국 나는 다시 구제 불능의 ‘어그러진 마음’으로 돌아오고, 차라리 지루한 책상이 나에겐 쉼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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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위로받고 싶다.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외치라”는 하나님의 위로가 내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처한 상황에 맞는 필요한 말이 마음에 와 닿는 위로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기운은 시드는 꽃과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자의식을 추구해야 할까? 어떤 의미와 가치를 좇아야 할까?
심리학자들은 오늘날을 불안과 우울, 트라우마의 시대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자기 욕구’와 ‘의미 찾기’를 제시한다. 하지만 나는 되묻고 싶다. 혹시 그 욕구와 의미를 찾으려다 오히려 불안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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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로운 것을 또 해야 한다는 부담이 싫다. 그래서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을 꺼내 쓰는 방식이 더 좋다. 땅의 티끌을 되에 담고, 산을 저울로 달 수 있으며, 열방을 물방울처럼 여기시는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신다. 이 믿음이 내가 택한 최고의 전략이다.
나는 게으르다. 뒹굴뒹굴하며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동안 하나님의 기대와 가치에 미치지 못했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또는 내가 욕심내며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한계를 넘어서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가치로 짜이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마음처럼 쉽지는 않다. 말씀을 통해 그 길을 촉구 받고 싶지만, 목사님은 어찌하여 대중심리학의 언어로 “평강할 수 있다!”고만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문제는 설교가 아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 채널을 갈아타며 위로를 소비하려는 내 방식이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