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긴장(tension)은 신학적·목회적 균형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긴장입니다. 그 긴장은 11년 전 교회개척 이후에 끊임없이 다양한 옷을 입고 찾아왔습니다. 인생과 교회의 계절에 맞춰 입을 수밖에 없었던 목사의 긴장들을 런웨이에 하나씩 올리는 마음으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개척을 준비하는 목회자와 이제 막 교회를 시작한 목회자들이 마주할 긴장과 고민을 염두에 두고 글을 씁니다. _글쓴이 박용주
목회 상담(牧會相談; 목회적 대화)은 단순한 위로나 도덕적 조언을 넘어서는 복음적 돌봄입니다. 이는 단지 말씀을 전하는 자리가 아니라, 성도의 영적 상태를 깊이 살피고 복음으로 삶의 위기를 어루만지는 실제적인 사역입니다. 이 돌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형상대로 창조하셨지만, 그 형상이 죄로 인해 깊이 깨어졌다는 이중의 진실 위에 서야 합니다. 목회적 대화는 이 긴장을 직시하고, 그 사이를 복음으로 이어야 합니다. 이 긴장은 목회 현장에서 ‘공감’과 ‘맞섬’이라는 두 가지 태도로 구체화됩니다. 공감은 창조의 존엄을 바라보는 경외의 시선이며, 맞섬은 타락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책임의 태도입니다. 진정한 복음적 돌봄은 이 두 태도를 함께 품는 여정입니다.
타락 강조형 대화
타락한 죄인이 강조될 때, 상담은 내담자의 말보다 그의 죄성과 회개 여부에만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대화는 자연스레 경청보다 권면과 책망 중심으로 흐르고, 내면의 고통과 애씀, 자아 성찰은 형상 회복의 여정이 아닌 죄의 위험성으로만 간주됩니다. 이로 인해 회개에 이르도록 돕는 공감의 과정이 약화되면, 진정한 변화보다는 위선적인 순종이나 외적 활동에 치우친 신앙생활이 지속되기 쉽습니다. 목회자는 권위 있는 교사나 영적 통찰자에 머무를 뿐, 함께 울어주는 동행자가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타락 강조형 상담은 권위주의적 질서와 위계 구조가 강한 시대, 그리고 죄와 형벌 중심의 도덕 문화 속에서 특히 지지받습니다. 죄를 분별하고 바르게 책망하는 일은 분명 목회의 한 축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때 상담은 복음의 돌봄에서 멀어지고, 율법적 정죄로 기울게 됩니다.
형상 강조형 대화
하나님의 형상이 강조될 때, 목회자는 내담자를 죄의 문제가 아닌 형상 회복의 대상으로 먼저 바라보게 됩니다. 이 시선은 상담의 시작부터 달라집니다. 내담자의 말, 감정, 삶의 서사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며, 그의 존재를 존엄한 피조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단순한 상담 기법이 아니라 신학적 입장을 드러냅니다. 경청과 수용은 곧 형상에 대한 경외의 표현이 됩니다. 자아 성찰, 감정의 인식, 상처의 돌봄 역시 죄의 결과만이 아닌 형상 회복의 여정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이 관점이 과도해질 경우, 인간의 고통을 무조건 ‘형상 회복의 신호’로만 해석하는 위험이 따릅니다. 상담이 자기 연민이나 자기 합리화로 기울 수 있으며, 때로는 신앙적 언어로 포장된 자기 긍정의 논리에 복음의 진단과 구원의 능력이 가려질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분별과 회개의 요청이 약화되면, 결국 복음의 능력이 무색해지고, 돌봄이 진리의 경계를 잃을 수 있습니다.
형상을 강조하는 대화 속에서 목회자는 ‘함께 있어 주는 사람’ ‘회복을 기다리는 사람’ ‘존엄을 지켜 주는 사람’으로 비칩니다. 이는 수직적 위계보다는 수평적 관계를 선호하는 시대, 개인의 진정성과 자율성이 중시되는 문화 속에서 더욱 호응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공감의 언어가 진리의 언어와 동행하지 못하면, 복음의 긴장을 잃고 시대정신에 흡수된 채 흐릿한 돌봄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상 강조형 대화는 그 자체로 귀중하되, 타락과 죄의 현실에 대한 신학적 인식과 복음적 대응이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때 이 대화는 단순한 위로가 아닌, 참된 회복으로 이어지는 복음적 상담이 됩니다.
공감의 시대, 나의 두려움
이는 단순히 목회자 개인의 성향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의 문화와 시대정신 속에서 형성된 결과입니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존중하는 흐름 속에 있고, 이 분위기에서 ‘공감’은 미덕이 됩니다. 반면 ‘맞섬’은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태도로 오해받기 쉽습니다. 물론 이 모든 원인을 문화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안의 죄성은 본래부터 진리를 거부하고, 책망을 피하려는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것이 전부야!” “내 아픔을 알아줘!” 이와 같은 태도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욕망의 언어일 수 있습니다. 죄성은 오늘날 ‘시대정신’이라는 화장을 하고, ‘공감’이라는 도덕의 옷을 입었습니다. 이제 공감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대화의 도구와 부분이 아니라, 목적과 전부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제 공감은 도전조차 허락되지 않는, 신성불가침의 진리처럼 여겨집니다. 저 역시 모든 대화에서 이런 흐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죄하는 목회자’ ‘사랑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두려워, 진리에 맞서지 못했던 순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빙자한 침묵이 진리를 대신하는 자리, 바로 그곳에 설 때가 많았던 것입니다.
공감과 맞섬을 오가는 실제 대화
한 자리에서 교우와 대화할 때, 목회자는 공감이나 맞섬, 한쪽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공감과 맞섬 사이를 머뭇거리며, 그러나 끊임없이 오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대화중에 한 사람에게서 죄성의 고집스러움과 하나님의 형상이 지닌 존엄함이 동시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말과 눈물을 깊이 공감하며 경청할 때, 그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눈물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슬픔이고, 그의 분노는 잃어버린 의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눈물 속에서 형상의 흔적을 따라가며 공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깊은 공감의 자리에 머무르다 보면, 곧 왜곡된 형상의 욕망이 드러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형상의 왜곡이 죄를 정당화하거나 자기중심적인 구도로 하나님의 자리를 밀어낼 때, 목회자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습니다. 맞섬이라는 긴급하고도 신실한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 맞섬이 관계의 거절, 오해, 상처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다시 ‘공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맞섬으로 인해 입은 상처와 오해를 짊어진 채,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하게 됩니다.
복음은 ‘사랑 없는 진리’와 ‘진리 없는 사랑’ 사이에 놓인 나를, 진리가 흐르는 사랑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사랑이 없다는 비난을 두려워하기도 했고, 진리를 말하지 않는 비겁함을 회개하기도 했습니다. 목회자는 늘 이 경계 위에 서 있습니다. 사랑 없는 진리, 진리 없는 사랑. 그 사이 위태로운 경계에 서서, 목회자는 날마다 기도합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게 하소서.”(엡 4:15)
하나님 형상을 향한 맞섬: 삼하 12장에 나타난 복음적 책망
사무엘하 12장에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책망하는 장면은 단순한 죄의 지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로서 다윗을 존중하고, 그의 회복을 지향하는 복음적 맞섬의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나단은 “당신이 죄인입니다”라며 직설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대신, 작은 양 한 마리를 빼앗긴 가난한 자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삼하 12:1–4). 그는 다윗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유도합니다. 이는 도덕적 사고 능력과 정의감, 곧 하나님 형상에 속한 판단력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공감적 접근입니다. 또한 나단은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왕의 책임과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 너에게 네 주인의 집안을 맡기고, 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었다.”(삼하 12:7–8) 이는 단순히 죄책감을 자극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주어진 부르심과 존엄을 일깨우는 회복의 언어입니다. 결정적인 순간, 나단은 “네가 그 사람이라” 선언합니다. 히브리어 원문 “אַתָּה הָאִישׁ (’attā hā’îš)”는 짧고 강하지만, 분노로 내지른 정죄가 아닙니다. 이미 죄를 깨달은 마음에 마지막으로 건네는 정의의 한마디이자, 형상을 깨우는 복음의 칼날입니다.
이에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나단은 곧바로 응답합니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다.”(삼하 12:13) 이 응답은 단지 선언이 아닙니다. 다윗의 회개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신뢰의 표현이며, 그의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회복 가능성을 믿는 복음적 태도입니다. 나단은 정죄로 끝내지 않고, 회개 위에 복음을 덧입힙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과 살인은 사형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형벌이 아닌 은혜로운 맞섬을 허락하십니다. 그를 정죄하지 않으신 이유는 단 하나,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려는 깊은 사랑과 회복의 뜻이었습니다. 죄를 드러내되, 사랑으로 감싸는 이 장면은 형상을 향한 맞섬, 곧 복음의 방식입니다.
공감이 여는 맞섬, 맞섬이 이끄는 회복
이 장면에서 우리가 꼭 주목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근거로 한 공감이 깊어질수록, 맞섬은 정죄가 아닌 회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형상에 대한 인식은 공감을 단순한 감정적 동정이 아닌, ‘존엄을 향한 공감’으로 끌어올립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존중은, 상대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깊은 애정과 회복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공감은 맞섬을 공격이 아닌 초대의 몸짓으로 바꾸어 줍니다. “나는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믿습니다. 그래서 맞섭니다.” 이 메시지는 맞섬의 분위기와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상대를 ‘부숴야 할 죄인’이 아니라, ‘돌아와야 할 형상’으로 보기 시작할 때, 맞섬은 귀환을 위한 충격이자, 사랑의 손짓이 됩니다. 공감 없는 맞섬은 율법주의로 보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공감이 깃든 맞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입은 책망입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건넨 말(삼하 12장),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대화(요 4장),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전한 눈물 섞인 권면(고후 2:6–8, 7:8–10) 모두 이 원리를 잘 보여줍니다.
형상과 죄성 사이, 복음이 주는 용기
목회 현장에는 수많은 상처와 아픔이 쌓여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집중하게 만드는 장면들과 마주칩니다. 반복되는 죄의 행동, 뻔뻔한 자기 합리화, 공동체를 해치는 언행, 회개의 열매 없이 되풀이되는 고백들 앞에서, 목회자는 자연스레 ‘죄성’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누적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기대와 존중을 내려놓고, 문제 해결 중심의 지적과 책망에 머물기 쉽습니다. 게다가 목회자 자신도 늘 누군가의 평가 안에 놓인 사람입니다. 회중의 불신, 왜곡된 기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저항과 분노 속에서, 목회자는 점점 시야가 좁아지고 한쪽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렇게 상처와 피로가 누적되고, 관계의 긴장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형상과 죄성 사이의 긴장을 더 이상 붙잡지 못하는 자리까지 밀려갑니다. 진리를 말하는 용기보다, 침묵의 안전함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복음만이 이 긴장을 끝까지 붙들게 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완전한 교사가 아니라, 여전히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형상임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복음의 겸손은, 사람을 정죄가 아닌 회복의 시선으로 보게 합니다. 그리고 존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용기를 줍니다. 복음은 공감과 맞섬 사이의 긴장을 가능하게 하고, 그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를 붙드는 중심이 됩니다.
물론 이 길에는 늘 위험이 따릅니다. 복음을 따라 맞선다는 것은, 때로는 오해를 감수하고, 단절을 받아들이며, 고독을 견디는 일입니다. 그러나 형상을 향한 공감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그 맞섬을 사랑의 손짓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목회자는 복음을 믿는 만큼, 관계의 깨어짐을 감수하면서도 진리를 따라 걷는 용기를 선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진리 없는 사랑과 사랑 없는 진리 사이, 위태로운 외줄 위를 걷는 우리에게 복음은 끝내 추락하지 않도록 감아주는 하나님의 동아줄이 되어 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