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은 끝없는 추측의 대상이었다. 특히 그 짐승에게 있다는 "표"와 관련해서는 더 그렇다. 올바르게 본다면, 짐승은 매우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사실 짐승이 없이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기 어렵다. C. 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 마지막 권에서 짐승(쉬프트)을 등장시켰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실제로 두 짐승이 등장한다(11절). "용"(2절)과 함께 이들은 궁극적으로 불경건한 삼위일체를 이룬다. 하지만 "짐승"이라고 불리는 것은 첫 번째 나오는 대상(1-10절)이다(16:13; 19:20; 20:10). 11장 7절, 하나님의 두 증인과 전쟁을 벌이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요한계시록의 반복적이고 요약적인 성격을 반영하듯, 13장은 한 바퀴 돌고 다시 다른 관점에서 짐승을 묘사한다.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정경 간 연관성에 비추어 볼 때, 짐승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의 백성을 박해하는 강력한 인간 왕국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역사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지만 특히 마지막 시대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권세 잡은 인간 왕국
이 짐승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규칙은 요한계시록 13장을 빠르게 전개되는 새로운 뉴스 사이클로서가 아니라 구약 성경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다(물론 전자가 적용에 도움을 준다). 다니엘 7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한의 짐승과 다니엘의 꿈 사이의 유사점을 알아차린다. 다니엘은 꿈에서 네 짐승을 보았다.
사자와 같은 자(4절),
곰과 같은 자(5절),
표범과 같은 자(6절),
열 뿔이 있는 자, 그리고 “큰 말을 하는 입”이 있는 작은 뿔이 있는 자(7-8, 19절).
다니엘과 달리 요한이 본 건 하나의 짐승이다. 하지만 그건 다니엘의 네 짐승을 섞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1-2절에서 요한은 이 짐승을 이렇게 묘사한다.
표범과 같고(다니엘의 세 번째 짐승),
곰의 발 같은 발을 가졌고(다니엘의 두 번째 짐승),
사자의 입 같은 입을 가졌고(다니엘의 첫 번째 짐승),
열 뿔과 거만하고 모독적인 말을 하는 입을 가졌고(다니엘의 네 번째 짐승과 그 작은 뿔, 5절 참조).
다니엘의 네 짐승은 “네 왕”(7:17)으로 명시적으로 언급되는데, 여기에는 그들이 다스리는 “나라들”(23-24절)도 포함된다. (해석자들 대부분은 이 네 왕이 2장 속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타난 네 나라와 일치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따라서 다니엘서를 고려할 때,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도 다름 아니라 강력한 나라, 즉 “보좌와 큰 권세”(2절)를 가진 나라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권세는 너무나 커서 “모든 족속과 백성과 언어와 나라”(7절)에까지 미친다. 그 권세는 열 뿔(일반 짐승의 다섯 배)로 상징된다. 원문의 문맥을 생각할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로마 제국을 암시한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의 백성을 핍박함
다니엘의 “작은 뿔”처럼, 짐승은 “거만하고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는 입을 받았다”(계 13:5; 6절 참조; 단 7:25; 살후 2:4). 짐승에게 권능을 준 고대의 용처럼, 짐승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한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묘사한 “불법의 사람”과 매우 유사한 표현을 발견한다. 따라서 불법의 사람이 사실상 짐승이라는 것을 거의 확실하게 알 수 있다(살후 2:1-12).
짐승은 하나님만이 아니라 그의 백성도 미워한다.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기도록 허락받았다”(계 13:7; 단 7:21). 짐승과 그 추종자들은 폭력(계 13:15)과 경제적 처벌(17절)이라는 위협을 통해 사람들을 거짓 예배로 몰아넣는다. 결국 저항하는 자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뿐이다(8절).
이 짐승은 시민 정부의 목적을 완전히 뒤집어엎는다(벧전 2:14; 롬 13:3-4). 악을 처벌하는 대신, 악을 행하고 조장한다. 선을 칭찬하는 대신, 선을 행하고 우상 숭배를 거부하는 자들을 핍박한다. 어린 양은 가이사의 것만을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명령하지만, 짐승은 하나님의 것까지도 다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명령한다(즉, 예배: 계 13:5-6, 15; 막 12:17).
역사를 통해서 보기 (특히 말세의 시점에)
이 모든 것은 말씀을 서로 비교할 때 아주 명확해진다. 하지만 짐승은 역사적으로 언제 나타났을까? 요한은 지금 2,000년 전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걸까? 아니면 말세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이나 세력일까? 답은 둘 다인 것 같다.
한편으로, 바울이 묘사한 짐승, 즉 “불법의 사람”(아마도 한 개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우리가 그에게로 모이는 때”(살후 2:1)에 등장한다. 그의 나타남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필수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림은 그의 종말을 의미한다(3, 8절). 따라서 이 짐승의 등장은 종말의 사건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2,000년 전에 바울은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 중”(7절)이라고 주장했다. 신약 신학의 많은 부분과 마찬가지로, 짐승에게도 “이미, 하지만 아직은 아닌”이라는 측면이 있다. 요한이 이렇게 말했듯이. “어린이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요일 2:18).
실질적으로, 이는 역사 전반에 걸쳐 등장한 다양한 짐승의 화신들을 우리가 식별할 수 있게 해 준다. 초기 교회에는 네로와 로마 제국이, 20세기 러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련이, 현대 미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국 정부가 그 화신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결혼을 재정의하여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저 끔찍한 오버게펠(Obergefell) 판결을 생각해 보라. 이 판결에서 [소수 의견을 낸] 로버츠 대법원장도 “우리는 도대체 누구라고 이런 결정을 내리는가?” 하고 되물을 정도였다.
또한 이런 사실은 짐승의 형상이 정말로 마지막 존재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정부나 그 수장이 법적 또는 경제적 제재를 휘두르며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도록 요구할 때마다 그들은 짐승이 되었고, 우리는 저항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어쩌면 최후의 적그리스도는 뻔뻔스럽게도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모든 충성 요구, 즉 가족, 교회, 혹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국가에 대한 충성 아래로 종속시킴으로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 궁극적인 충성의 요구는 경배의 요구이고, 궁극적인 충성을 바친다는 건 결국 경배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경계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면,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은 항상 짐승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