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1950.9.23-2023.5.19)
참된 목자에서 리처드 백스터는 설교보다 성도의 실제 삶을 다루는 심방 사역이 더 어렵고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심방이 성도의 영적 상태를 살피고, 복음으로 질병을 다루는 실제적 돌봄이기 때문입니다. 팀 켈러는 이러한 과정을 “복음대화(Gospel Conversation)”라 표현하며, 설교와 심방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복음 사역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복음대화’라는 이 표현을 좋아합니다. 복음대화는 ‘심방’(복음심방)을 포함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복음적용의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심방은 목회자가 신방을 통해 교우를 직접 찾아가 돌보는 사역을 말하지만, 복음대화는 일상 언어 속에서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열려 있는 복음 중심의 소통입니다. 무엇보다 ‘대화’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상호성, 경청, 관계성은 요즘 회중에게 더 따뜻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단지 용어만의 변화는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을 일상의 모든 관계와 순간 속에서 풀어내고자 하는 목회적 관점의 확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대화는 단순한 위로나 도덕적 조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 숨겨진 내면의 우상과 자기 의를 드러내고, 복음의 빛 아래에서 그 조각들을 하나씩 드러내는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속에 다시 맞추는 섬세한 대화입니다.
저는 복음대화를 생각할 때마다 팀 켈러의 설교의 원리(연결과 종합)를 자주 떠올립니다. 그의 설교는 마치 한 사람과 마주 앉아, 마음을 깊이 들여다본 뒤 조심스럽게 복음을 건네는 대화 같았습니다. 물론 대중을 향한 설교와 개인을 향한 돌봄은 형식이 다르지만, 복음이 사람의 삶에 스며드는 방식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는 모든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믿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삶 속 모든 문제 역시 결국 그리스도를 향한 필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설교자가 본문 안의 죄를 정확하게 포착하려면 본문을 깊이 경청해야 하듯, 목회자는 개인의 고민과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느끼는 내면의 감정들–죄책감, 두려움, 무가치함, 외로움–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함께 탐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질문으로 질문에 답하다 보면, 표면적 우상(surface idols)을 넘어, 더 깊은 자리의 갈망과 근원적 우상(deep idols) 곧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발견하도록 도울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상대가 인식하지 못했던 신념과 욕망의 실체가 드러날 때, 비로소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가 품고 있는 깊은 갈망–사랑, 안정, 자존감–을 경청한 후, 그 갈망을 지금 어떤 방식으로 채우고 있는지를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만족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함께 점검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갈망을 충족시키시는지를 성경적 메시지와 자신의 삶 속 경험으로 연결해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대화를 통해 복음의 언약을 다시 붙들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팀 켈러는 “복음조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성경의 각 본문에 흩어져 있는 복음의 단편들을 뜻합니다. 이러한 조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결되어 있으며,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의 구속 이야기를 형성합니다. 이 개념은 개인적인 복음대화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삶에도 복음조각이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은 단순한 정죄가 아니라 ‘의롭다 하심’에 대한 갈망일 수 있고, 상실의 아픔은 잃어버린 안식과 완전한 사랑에 대한 기억의 조각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상 숭배조차 왜곡된 구주 갈망의 흔적일 수 있습니다. 복음조각의 시선은 상담자에게 해석의 틀을 줍니다. 내담자의 삶을 단순한 문제나 감정이 아닌, 복음을 향한 미완의 질문과 울림으로 이해하게 돕습니다. 동시에 내담자에게는 자신의 파탄 난 인생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구속 이야기로 엮일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열어 줍니다. “내 삶도 복음 이야기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깨달음은, 회개와 희망, 용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복음대화란 흩어진 복음조각을 모아 구속의 이야기로 엮어 가는 여정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나누신 대화(요한복음 3장),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신 대(요한복음 4장)는 복음대화의 전형적인 두 사례입니다. 니고데모는 경건하고 존경받는 지도자였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말씀하시며 그의 자기 의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셨습니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외면당하고 상처 입은 삶을 살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내면 깊은 갈망을 끌어올려 참된 예배자로 초대하셨습니다. 이 두 대화 모두,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내면의 우상과 깊은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을 복음의 이야기로 재해석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단지 공감하시는 데에 머무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해하시면서도 맞섰고, 위로하시면서도 정직하게 진단하셨습니다. 이처럼 복음대화는 공감과 맞섬이 함께 어우러지는 대화입니다. 단지 기분을 풀어 주거나, 이해받는 감정에 머무르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씀하셨고(엡 4:15), 그 진리는 사람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변화시키는 힘이었습니다. 오늘날 복음 없이 공감만 하는 관계는 종종 피상적 위로에 머물며, 변화 없이 감정을 소비하고 맙니다. 복음대화는 이런 피상적 관계를 넘어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으로써 진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대화 방식입니다.
복음대화의 목표는 도덕적 교정이나 심리적 위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 안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 정체성대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복음적 자기 인식의 시작이며, 회복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다시 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거울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복음은 우리를 죄책감이나 자기기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지만, 죄를 외면하거나 의지를 짜내게 만들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기 부인의 영광,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정체성과 동기의 전환을 이끌어냅니다.
이러한 복음대화는 설교와도 본질적으로 같은 흐름을 갖습니다. 설교가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되 통합하여 정직한 진단과 은혜의 해석을 선포하듯, 상담과 복음대화 역시 고통의 원인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게 하며, 복음이라는 해독제로 그 아픔을 덮고 인도해 줍니다. 복음 없는 진단은 정죄이고, 진단 없는 복음은 공허한 위로입니다. 복음대화는 이 둘을 함께 붙들고, 정체성의 회복과 삶의 방향 전환을 이끌어 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