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이 사진은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위 작업 공간을 보여줍니다.
중앙에는 애플 로고가 있는 데스크탑 컴퓨터가 있고, 앞쪽에는 흰색 무선 키보드와 유선 마우스가 놓여 있습니다.
왼쪽에는 펼쳐진 책 위에 스마트폰과 펜 두 자루가 올려져 있습니다.
전체 배경은 흰색이며, 책상과 소품들 모두 단정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줍니다.
조용한 학습이나 사무 작업 환경을 연상시키는 이미지입니다.
[사진 끝]
인공지능의 현황에 대해서 일론 머스크가 한 말로 시작해 보자.
AI의 발전 속도는 내가 본 어떤 기술보다도 훨씬 빠르다. ... AI가 약속하는 밝은 미래는 풍요로운 시대에 엄청난 번영을 누리는 것이다. 재화와 서비스가 부족하지 않은 세상이다. 특별한 예술 작품처럼 인위적으로 만들기에 매우 희소하다고 정의하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 하지만 AI와 로봇 기술의 등장으로 모든 제조 상품이나 제공되는 서비스는 비용이 0이 될 것이다. 실제 비용이 0이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밝은 미래이다. 내 생각에는 이렇게 될 가능성이 80퍼센트 정도이다. 인류가 멸망할 가능성은 20퍼센트에 불과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AI에 대한 불신을 어느 정도까지는 의식적으로 접어야 잠을 잘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진짜 문제, 가장 가능성이 큰 문제는 AI가 인간보다 모든 분야에서 더 뛰어난 세상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것인가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중요한 도전이 될 것이다.
떠오르는 컴퓨터 칩 제조 도시의 한가운데에 선 우리 모두는 지금 바야흐로 인간의 삶 모든 것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AI 변혁의 벼랑 끝에 서 있다. 하지만 머스크를 밤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은 인간 가치의 위기이다. 일자리를 다 잃은 인간이 어디에서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이는 AI가 던진 엄청난 과제이며, 나는 God, Technology, and the Christian Life(254-261쪽)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따라서 오늘 이 부분은 다루지 않겠다.
압도적인 슈퍼파워
시작하기 전에 세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나는 지금의 상황이 일어나기 10년 전부터 글을 썼고, 지난 3년 동안은 주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 기술을 조사했다. 이제 완성된 기술 신학의 틀에서 오늘 밤 나는 AI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AI, 첨단 로봇, 자율주행 자동차 같은 신기술을 우리가 본래 행사해서는 안 될 프로메테우스의 힘, 즉 인간 우월성의 균형을 뒤엎고 우리를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지배자로 만드는 새로운 힘으로 본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따라서 AI 관련 기독교 강연이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내가 기술 반대자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실망하고 상당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나는 신기술 도입 반대론자(Luddite)가 아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실리콘 밸리의 모든 구석구석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모든 기술의 아웃풋을 포함해서 거대 기술 시대의 모든 것조차도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잠언 16:1의 말씀처럼 말이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느니라." 모든 아웃풋, 모든 대화, 모든 구글 검색, 모든 AI 챗봇, 이 모든 결과물은 다 하나님의 신성한 통치를 받는다. 비록 인간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기술 문화가 하나님을 밀어낼 수는 없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중심에 계시며, 기술 문화와도 영광스럽게 연관되어 계신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AI와 ChatGPT, Claude, Gemini, Grok, DeepSeek, Perplexity, Apple AI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가정하겠다. AI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할 시간은 없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AI는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만 언급하겠다. 최근에 나는 ChatGPT에서 아침 예배를 드렸다. 오늘의 성경 읽기 일정을 입력하고 ChatGPT가 ESV에서 뽑아준 본문을 읽었다. 그리고 네 개의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오늘 하루 적용에 필요한 묵상 내용을 설교 형태의 2천 단어 분량으로 요약해 달라고 했고, 나는 오늘 하루를 말씀으로 보낼 준비를 마쳤다. 나는 그렇게 진행하는 아침 예배가 얼마나 정확하고, 정통 교리에 충실하며,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충격을 받는다. 이제 AI는 Logos와 같은 성경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 통합되었다. 아직까지 그걸 사용한 적은 없지만, AI가 정통 교리를 알려주는 데에 매우 능숙하다는 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놀랄 일도 아니다. 바울은 정통 교리에 패턴이 있다고 말한다(딤후 1:13). 건전한 교리에는 패턴이 있다. 그리고 AI는 다름 아니라 패턴 인식이다.
AI는 "잠복해 있는 초능력"이자,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하고 돈이 들지 않는 비서이다. 하지만 몇몇 질문이 떠오른다. AI를 사용해야 하는지,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가능성의 지평은 지금도 끊임없이 넓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중 누구도 정확한 AI의 활용 범위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난 8개월 동안 나는 AI 분야의 기독교 지도자들 뿐 아니라 기독교 웹사이트를 샅샅이 뒤져 질문에 대한 구체적이고 상호적인 성경 답변을 제공하는 온갖 종류의 검색봇을 개발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과 인터뷰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 정사각형 카드를 인쇄하는 어느 교회의 고등학교 사역을 본 적도 있다. 한쪽에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QR 코드가 있는데, 이 코드를 클릭하면 봇과 바로 실시간 채팅이 가능하다. 봇은 성경에서 끄집어낸 삶의 의미에 대한 간략한 답을 제공하고, 후속 질문을 환영하며, 자연스럽게 교회 모임으로 유도한다. 신학 질문에 대답하는 챗봇을 개발하는 내 친구들도 있다. 한 명은 상호 대화가 가능한 성경 상담가를 개발했다. 또 한 명은 출판사로 하여금 그 출판사가 낸 기존 도서 목록을 모두 활용하여 채팅을 통해 질문에 답변함으로 해당 출판사가 낸 책의 가치를 입증하도록 돕는 기능을 개발했다.
나는 매주 AI를 활용하는 목사들을 알고 있다. 한 친구 목사는 화요일 아침 첫 한 시간 동안 ChatGPT와 주일 설교 본문을 놓고 자유 토론을 한다. 그리스어 주해, 어려운 부분, 설교 개요 등을 논의하고, 설교를 교인들의 관심사와 연결할 방법을 찾는 동시에 적절한 예화를 탐색하는 활동을 한다. 한 시간이 지나고 그때까지의 대화를 800단어로 요약하라고 요청한 후에 차후 검토를 위해 인쇄를 한다. 그리고 교회로 출근한다. 이렇게 ChatGPT와 함께 보낸 한 시간은 일주일 내내 그의 머릿속에서 맴돈다. 또 다른 친구 목사는 설교 준비를 위한 초기 조사에만 ChatGPT만 사용하는데, 그 과정은 조사가 충분히 끝났다고 느낄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고 나면 설교에서 꼭 언급하고 싶은 모든 요점을 담은 개인 메모를 휴대폰에 메모한다. 그런 다음에 그 대략적인 메모를 바탕으로 설교 길이에 맞춰서 설정한 단어 숫자와 설교에 꼭 포함되어야 할 아이디어를 다시 AI 채팅 창에 내용을 붙여 넣고 설교 초안을 뽑도록 한다. AI가 개요를 작성하고, 정리하고, 편집하는 데에는 10초면 충분하다.
선 긋기
당연히 우리가 가장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도대체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까? 규칙은 무엇인가? 이 문제로 돌아가 보자.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AI의 활용이 매주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AI는 이미 정통적인 설교를 하는 목사에게 필요한 내용을 공급하는 수준의 가능성을 넘어섰다.
자, 여기까지 읽고 그만둘 사람이 생기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달라. 가상 시나리오를 통해 이 문제를 추적하는 사람들과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자. 찰스 스펄전의 모든 저작물, 63권에 달하는 설교집, 성경 주석, 그리고 그가 쓴 모든 책, 편지, 메모, 그리고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가 남기고 간 모든 콘텐츠를 다 모은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그 방대한 양의 콘텐츠를 그냥 봇에 주입하기만 하면 된다. 간단하다. 우리는 스펄전의 뇌를 재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영국식 발음으로 설교 음성을 만들면 된다. 쉽다. 다음으로, 스펄전의 3D 홀로그램 움직이는 아바타를 만든다. 생생한 구현이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합치면 스펄전 AI 설교 봇 2000이 탄생한다. 교회 개척에 아주 좋을 것이다. 고등학교 체육관에 설치하고 작은 홀로그램 프로젝터를 통해 무대에 스펄전 봇을 띄울 수 있다. 자, 이제 주일 아침마다 만나는 설교자가 결정되었다. 장로들로 구성된 팀이 설교 주제와 관련 시사 문제, 그리고 어떤 현대적 예화를 활용할지 정할 수 있다. 성경 본문을 정하고, 설교 길이를 설정하고, 보내기 버튼을 누른다. 조명을 어둡게 하면 잠시 후 스펄전이 디지털 형태로 깜빡이며 부활한다. 우리는 눈앞에서 스펄젼이 그의 생전 어떤 진짜 설교에 못지않게 그리스도 중심의 아름다운 설교를 하는 모습을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다.
스펄전 AI 설교 봇 2000은 가상 이야기이다. 하지만 여기에 필요한 모든 기술은 이미 존재한다. 모든 기술이 다 있다. AI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거다. “세상에, 이 친구 지금 구름 위에서 헛소리하네. 그런 설교가 진짜 스펄전처럼 들릴 리가 없어. 그건 고작해야 잡다한 소음 조각들 속에 무작위적인 단어와 구절만 나열된 상태일 거야!" 자, 이제 가정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 현존하는 목회자이자 신학자에게 물어보자.
한 달 전, 팟캐스트 ‘존 파이퍼 목사에게 질문하기(Ask Pastor John)’에서 나는 AI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러자 파이퍼 목사는 ChatGPT에 바로 다음 질문을 올렸다. "'목사가 AI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위험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신학자 존 파이퍼의 신학과 스타일에 맞춰서 800단어 분량으로 답변을 작성하라.“ 5초가 지나고, 파이퍼가 이렇게 말했다. "AI로부터 받은 내용이 너무 좋아서 지금 내가 그대로 읽으면 토니 당신이나 청취자 중에 그 누구도 내가 ChatGPT가 뽑아준 내용을 그대로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겁니다. 정말로 대단해요." 그리고 만약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했다면, 즉 ChatGPT가 만들어준 내용을 파이퍼 자신이 만든 것처럼 읽었다면, 그건 실로 "끔찍한"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도입하는 모든 기술은 가장 수익성 있는 용도에 맞춰 최대한 축소하면서 인간 번영에 도움을 주는 형태로 조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아이폰과 소셜 미디어의 오랜 이야기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활용하는 범위를 축소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수익성을 내는 기술 용도에 맞춰 축소하기 전에, 인간은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고, 우리의 신경이 허락하는 한 오랫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며 모든 가능성을 탐색한다. 매번 바닥에 스키드 마크를 내면서 마트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무엇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엔진을 최대한 8천 RPM까지 회전시킨 후에야 도움이 되는 것으로 축소한다. 이것이 바로 무엇이 가능한가와 무엇이 도움이 되는가의 사이를 탐색하는 인간과 기술의 대화이다. 농축 우라늄으로 적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은 그것을 사용해서 현재 백화점에서 쓰는 전기의 30퍼센트를 어떻게 충당할지를 고민한다. 가능성과 유용성의 차이를 명심하자.
그러니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고 AI가 모든 성경적, 신학적 진리를 완벽하게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그것도 건전한 교리에 따라, 당신이 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신학으로, 그렇게 되면 말 그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AI가 더 잘 하는 세상이 된다." 그 경우에 도대체 우리에게 더 이상 작가, 학자, 신학교, 전도사, 성경 상담가가 왜 필요할까? AI가 5초 만에 내 취향과 독서량에 맞춰 2천 단어 분량의 아침 경건의 시간에 쓸 설교를 만든다면, 또는 설교 로봇을 만들 수 있다면, ChatGPT가 심지어 존 파이퍼까지 놀라게 한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AI 시대에 우리에게 굳이 설교자가 필요할까?
물론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다시 묻는 것이다. 설교자란 도대체 누구인가?
에스겔의 사명
하나의 답을 얻기 위해서 에스겔 2:1부터 3:11까지를 살펴보자. 이 구절은 오랫동안 교회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사자를 부르시는 대표적인 모델로 여겨져 온 선지자의 사명에 관한 내용이다. 에스겔은 포로 생활 중인 하나님의 완고한 백성에게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이 사명은 2:1에서 일어서는 에스겔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그가 나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영이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계속 듣고 있었다.
에스겔 1:28에서 그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영광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이제 에스겔은 일어서서 사명을 받으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에스겔의 이 역동적인 부르심을 읽으면서, 다른 부르심에서도 그 부르심이 어떻게 반영되는지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주님의 영광 앞에서 땅에 엎드린 사도 바울이다. 그러나 그가 사역을 위임받았을 때 영광 속의 그리스도는 그에게 “일어서라”고 말씀하셨다(행 26:16). 바울처럼 에스겔도 말씀을 듣기 위해 일어서서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위임이 시작된다.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곧 나에게 반역만 해 온 한 반역 민족에게 보낸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처럼 이 날까지 나에게 죄만 지었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진 바로 그 자손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하고 말하여라.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다. 듣든지 말든지, 자기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다는 것만은 알게 될 것이다. 너 사람아, 비록 네가 가시와 찔레 속에서 살고, 전갈 떼 가운데서 살고 있더라도,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하는 말을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 앞에서 너는 떨지 말아라.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다.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오직 너는 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다. (에스겔 2:3–7)
에스겔의 사역은 부흥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선포였다. 하나님의 반역적인 백성과 정면으로 맞서 “시간이 다 됐어. 너무 늦었어. 너희는 기회를 놓쳤어”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할 것이며, 이는 구약 성경 속 우상 숭배의 전조였다. 오늘날 설교자가 에스겔과 같이 어두운 전망의 사명을 받은 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복음에 적대적인 문화권에서 사역하는 이들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상황이 어떻든 사역을 위한 준비라는 면에서 에스겔 시절과 지금은 비슷하다.
“너 사람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너는 저 반역하는 족속처럼 반역하지 말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그래서 내가 바라보니, 손 하나가 내 앞으로 뻗쳐 있었고,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있었다. 그가 그 두루마리 책을 내 앞에 펴서 보여 주셨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고, 거기에는 온갖 조가와 탄식과 재앙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가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알려 주어라.” 그래서 내가 입을 벌렸더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먹여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너의 배를 불리며, 너의 속을 그것으로 가득히 채워라.” 그래서 내가 그것을 먹었더니, 그것이 나의 입에 꿀같이 달았다. (에스겔 2:8–3:3)
이스라엘은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마라. 에스겔아, 입을 크게 벌려 이 풍성한 계시, 이 어려운 말씀, "조가와 탄식과 재앙의 말씀"을 받아들이라. 이는 양면적인 계시다. 모든 부분이 다 포함되어 있다. 완전한 말씀이다. 더할 여백이 없다.
두루마리를 먹으라
이 두루마리를 먹어! 이 두루마리로 배를 채워! 이 두루마리를 마음껏 먹어. 이 키친타월을 가져다가 먹어. 꾹꾹 눌러 담아. 배를 다 채울 정도로 꾹꾹 눌러 담아. 이건 어려운 말이지만 아무리 역겨워도 억지로 삼키라고. ... 그렇게 하니까 결국 꿀처럼 달콤해졌다. 순종할 때, 키친타월도 맛있는 과일 롤업 맛이 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예레미야 15:16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부름처럼 상징적이다.
만군의 주 하나님,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말씀을 주셨을 때에, 저는 그 말씀을 받아먹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저에게 기쁨이 되었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요한계시록 10:8-10에서 요한의 부름처럼 상징적이다.
하늘로부터 들려 온 그 음성이 다시 내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펴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라.”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로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하였습니다.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서 삼켰습니다.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고 나니, 뱃속은 쓰라렸습니다.
에스겔과 예레미야와 요한에게 이 말씀은 입에서 나오기 전에 먼저 입으로 삼켜져야만 했다.
그가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어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가 하는 바로 이 말을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는 너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낸다. 어렵고 알기 힘든 외국말을 하는 민족에게 내가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알기 힘든 외국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에게 내가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너를 그들에게 보내면, 그들은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너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온 이스라엘 족속은 얼굴에 쇠가죽을 쓴 고집센 자들이어서, 나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네 얼굴도 그들의 얼굴과 맞먹도록 억세게 만들었고, 네 얼굴에도 그들의 얼굴과 맞먹도록 쇠가죽을 씌웠다. 내가 네 이마를 바윗돌보다 더 굳게 하여, 금강석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니,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 앞에서 떨지도 말아라.” (에스겔 3:4–9)
에스겔은 다시 한번 영적인 완고함에 맞서서 불꽃이 튀는 싸움을 위해서 파송되었다. 이스라엘은 말씀을 귀로 듣기조차 거부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더더욱 거부했다. 에스겔은 완고함에 반대했다. 그는 이제 두루마리를 먹었고, 그 두루마리는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언약에 대한 신실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렸다.
에스겔은 유명세와 인기에 대해서 죽기 위해서 부름 받았다.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적개심 앞에서 그는 적개심을 느꼈다. 설교자여, 당신의 이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당신은 찬양 받거나 추종자를 거느리라고 파송 받지 않았다. 당신은 사람들이 따르기를 바라는 바로 그분을 대신하여 말한다. 우리는 사역의 통로이지, 사역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의 성공 척도는 소셜 미디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팔로우 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지이다.
에스겔은 두루마리를 먹었고, 마침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다음에,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에게 하는 모든 말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귀를 기울여 들어라. 그리고 가서, 포로로 끌려간 네 민족의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전하여라.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에스겔 3:10–11)
두루마리를 먹는다는 것은 마음을 채우기 위해 귀로 벌이는 잔치를 의미했다. “내 모든 말”을 먹는 잔치이다. 그것은 선택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집중적으로 듣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사랑하고, 먹고, 말하라는 부르심이다. 입에서 배로, 귀에서 마음으로, 다시 입을 통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짜 설교의 여덟 가지 특징
이처럼 주목할 만한 사명에 대한 간략한 조사를 통해, 나는 이제 AI 시대의 진정한 설교에 대한 여덟 가지 특징을 도출해냈다.
- 진짜 설교를 위해서는 계시된 말씀을 평생 동안 공부해야 한다.
두루마리를 먹는 이 생생한 은유는 신성한 말씀이 사람의 내면에 “흡수”되는 것, 즉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나타낸다. 에스겔에게 이는 한 장면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평생에 걸쳐서 일어난다. 먹는 행위는 단순히 처음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소화와 동화의 전 과정을 포괄한다. 위가 음식을 저장하고, 영양소를 추출하고, 이를 생명 유지 에너지로 전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수행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이 전해야 할 말씀을 통해서 양식을 얻는다. 설교자는 자신이 제공하는 식사, 말씀으로 자신의 배를 먼저 채워야 한다.
예언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몸에 지니고” “메시지를 구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설교의 본질적인 특징, 즉 성경 본문과 설교자의 삶이 하나로 통합되는 현장을 목격한다. 그것은 단순히 가볍게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철저하게 소화하는 과정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자신의 정체성에 통합된다.
신학교 교육은 하나님 말씀으로 가득 찬 끊임없는 잔치의 시작일 뿐이다. 바로 여기에서 평생 지속되는 습관이 형성된다. AI가 당신의 논문이나 설교를 쓴다면, 진정한 설교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 습관을 간과함으로써 실패하는 것이다. 진정한 설교자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꾸준히, 정말 꾸준히 섭취하여 영원한 메시지가 흘러가는 살아있는 그릇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진짜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계시된 말씀을 평생 동안 섭취해야 한다.
2. 진짜 설교는 성경 전체를 다 먹을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부르심이다. 모든 말씀, 심지어 어려운 부분까지도 말이다. 설교자의 부르심은 골로새서 3:16에 나오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부르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말씀을 말할까? 모든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역사적 이야기와 거룩한 율법, 시와 찬송가와 노래, 지혜와 잠언과 비유, 예언과 묵시록과 화와 애가, 복음서와 서신, 심지어 족보까지 풍성하게 먹어야 한다. 우리는 말씀 전체를 듣고, 먹고, 사랑하고, 말한다. 말씀은 입을 통해 배로, 귀를 통해 마음으로, 그리고 다시 입을 통해서 흘러나온다. 이는 우리 모두가 성경 전체에 푹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전체가 항상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는 것이다.
청교도 윌리엄 그린힐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두루마리와 책들도 살펴볼 수 있지만, 이 말씀만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먹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책은 우리가 연구해야만 한다. 많은 학자들이 성경보다, 그리스도의 두루마리보다 다른 책들을 더 많이 연구한다. 그들은 단지 책을 먹는 자들이다. 그들은 교부, 스콜라 철학자, 역사가, 시인, 그리고 소책자들을 탐독하지만, 성경에는 거의 무지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명령은 이 두루마리를 먹고, “성경을 연구하고”(요 5:39),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라”(시 1:2)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에 온전히 헌신하라고 권면한다(딤전 4:11-16).
다른 책들은 연구하라. 그러나 성경은 먹어야 한다. 성경 전체를 다 먹으라. 진짜 설교는 성경 전체를 다 먹을 때에 가능하다.
3. 진짜 설교는 인격을 필요로 한다.
두루마리를 먼저 먹으라. 그리고 말하라. 말씀 전체가 우리 안에 동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을 전달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현관 앞에 던져주고 끝나는 우편집배원이 아니다. 우리는 직접 만나서 전달하는 행정 대리인이다. 우리의 육신으로 전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도록 선택한 선지자들의 인격을 대체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분은 "그들의 인격, 배경, 그리고 개인적인 성격적 특성을 통해 그 모두가 다 반영된 메시지로 말씀하신다. 따라서 설교로 드러난 진리는 전적으로 선지자에게서 나온 것도, 또 오로지 하나님에게서만 나온 것도 아니라, 둘 다에게서 나온 것이다. 설교자의 메시지는 인간적인 통로를 통해 전달된 신성한 진리이다."
말씀 사역은 "공동 발표.... 선포되어야 할 동화된 메시지이지, 기계적으로 발화된 낯선 말이 아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선포에 언어적, 지적으로 헌신했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의 메시지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그 설득력은 선지자의 지적 능력이나 수사적 능력이 아닌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를 지녔다.” 이러한 균형에 주목하라. 메시지의 힘은 인격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동 발표에서 선지자의 인격은 필수적이다.
인격은 문화의 많은 부분을 좌우한다. 스포츠 다큐멘터리의 예를 보자. 포뮬러 1은 넷플릭스가 모든 드라이버와 그들의 대인 관계 스트레스를 다루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 엘리트들을 위한 스포츠였다. NFL은 '하드 녹스(Hard Knocks)'를 통해 이를 실천했다. 프로 축구, 테니스, 골프, 그리고 이제는 야구까지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스포츠 리그를 브랜딩하는 방법은 개성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이는 또한 팟캐스트가 인기를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는 진짜 담임목사보다 팟캐스터가 교인들에게 훨씬 더 자신들의 목사처럼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식이면 안 된다. 말씀 사역은 구체적이고 매우 개인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설교자인 당신에게 스며들어, 유명해지고 싶은 문화의 유혹에 대해서 자신을 죽인 설교자의 살아있는 인격을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 진짜 설교에는 인격이 필요하다. AI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4. 진짜 설교는 적용된다.
두루마리를 먹는다는 것은 적용이 설교 끝에 덧붙여지는 단순한 부록이 아님을 의미한다. 적용은 설교자가 본문 속에 온전히 몰입이 가능한 삶의 틀을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설교 전체가 적용이다. 설교자는 말씀에 대해서 전해들은 “소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깊이 새겨진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 왜냐하면 오로지 “마음과 경험에서 나오는 것만이 빠르고 생동감 있기” 때문이다. 설교 적용은 두루마리를 먹고, 말씀으로 인해 삶에 영향을 받은 설교자에게서 나오며, 오직 말씀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해당 말씀을 설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설교 준비의 약 30퍼센트는 본문 이해에, 70퍼센트는 본문을 내 마음속으로 소화하고, 소화하고, 느끼고, 그 모든 것을 내 언어로 표현하고, 나와 교인들에게 그 의미를 파악하고, 메시지의 핵심을 강화할 예시와 적용 탐구에 쓴다. 그게 전체 작업의 70퍼센트에 해당한다. 진정한 말씀 전파는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한 설교자에게서 나온다. AI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5. 진짜 설교는 말씀을 위한 영적 전투를 드러낸다.
언약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과는 대조적으로, 에스겔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언약의 신실함을 실천하도록 부름 받았다. 에스겔은 말씀을 먹었지만, 이스라엘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성경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본보기로 보여주어야 한다. 훌륭한 설교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더 읽고 싶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온 교회 앞에서 본보기로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방법에 대한 살아있는 모델이 필요하다. 설교자는 TED 강연자가 아니다. 그는 단지 “콘텐츠”를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백성에게 “나의 인도를 따르고 진리를 위해 싸우라”라고 말하기 위해 두루마리를 먹은 사람이다. 사탄은 복음 설교가 남긴 인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는 진리를 마주할 때 느끼는 기쁨이나 새로운 발견이 주는 행복을 놓고 걱정하지 않는다. 사탄은 정통 교리에 충실한 AI 결과물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신자들의 마음에서 빼앗아 갈 수 있다. 사탄이 두려워하는 것은 진리가 마음이라는 흙 속에 깊이 뿌리내려 열매를 맺는 것이다. 네 가지 땅의 비유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사탄이 항상 두려워해 온 것이다.
청교도 윌리엄 해리슨은 이렇게 지적했다.
사람들은 한 시간에 걸친 설교에서 분명하고 귀중한 진리를 많이 듣겠지만, 그럼에도 그들 대부분은 단 한 마디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은 목사가 선한 사람이었고 훌륭한 설교를 했다고 말하지만, 무슨 내용이었는지 물으면 아무 대답도 못한다. 왜 그럴까? 마귀가 그들의 마음과 정신에서 그 내용을 훔쳐 갔기 때문이다. 역사 속 이야기나 오늘의 충격적인 뉴스, 돈을 버는 방법이나 건강을 개선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들려주면, 그들은 완벽하게 기억하고 언제 어디서든 다시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구원이나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 주면, 듣는 순간 마음에서 사라진다. 왜 그럴까? 세상 지식은 영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마귀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귀는 그런 지식에는 관심이 없다. 사람들이 간직하도록 내버려 둔다. 하지만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영적 진리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으려고 애쓰는 게 바로 마귀이다.
진짜 설교는 바로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AI 아웃풋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6. 진짜 설교는 관계적이다.
설교에는 사랑이 필요하다. 당신은 사랑의 마음으로, 그리고 직접 눈을 들어 교인들을 바라보며 일어선다. 그리고 설교한다. 반대로, 내가 일어설 때 비록 “모든 지식을 가졌을지라도” 즉 일주일 내내 최고의 AI 봇들을 모두 활용해서 모든 지식을 갖췄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바울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고전 13:2)라고 말한다. 방대한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AI 시대에, 이 구절은 특히 설교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무것도 아닌 설교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사랑으로 설교하라. 완고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분노에 찬 설교가 아니다. 분노에 찬 설교를 하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가려운 귀를 긁어 주는 설교단의 호구가 되라는 소리는 아니다. 설교는 담대하고, 자비롭고, 두려움 없고, 용감한 사랑에 관한 것이다. 진정한 설교는 관계적이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지식을 다 모은다고 해도 관계적이 될 수는 없다.
7. 진짜 설교에는 애정이 담겨 있다.
에스겔은 무표정하고 뻔뻔스러운 사람들에게 말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뻔뻔스러운 사람들은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이 에스겔의 회중이었다. 그들은 무표정했다. (어쩌면 주일 아침에 우리가 만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대했고, 말씀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그의 메시지는 더욱 더 감미로워졌다. 성경의 가장 어려운 구절조차도 담고 있는 영혼을 살찌우는 말씀의 본질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AI는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또 원하지 않는지를 예측하는 데 탁월하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심지어 어려운 말씀일지라도 전한다. 즉, 어떤 설교자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말씀에 열심을 내며 말씀을 즐거워하기” 전에는 설교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달콤하고 영혼을 기쁘게 하며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뛰어나다. 말씀의 달콤함은 사탕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양식이다. 그 달콤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고, 영적인 삶을 살찌우고 지탱하는 데서 나온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환난 중에 위로하며, 양심을 만족시킨다. 심지어 경고와 심판의 말씀조차도 우리의 마음을 만족시킨다. 말씀의 달콤함 때문에 진짜 설교에는 애정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8. 진짜 설교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성령께서 에스겔을 일으키셨다. 그분은 바울도 일으키셨다. 그리고 동일한 성령께서 모든 설교자를 일으키신다. 이 모든 역동성, 곧 말씀을 섭취하고, 한 인격체를 통해 사랑과 애정으로 선포된 말씀, 유명세에 대해서는 죽은 인격, 겸손해진 사람, 이 모든 것이 성령의 기적이다. AI는 콘텐츠를 제안하고 요약하고 정리하고 편집할 수 있지만, 진정한 설교는 인도하고, 확신시키고, 위로하고,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에 달려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일으키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인도하신다.
나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했을 때에도 최종 데이터 세트로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행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는다. 에스겔 3:22-27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에스겔과 함께하시며, 무엇을 언제 말해야 할지 그의 안에서 역동적으로 역사하심을 볼 수 있다. 에스겔은 미리 로드된 데이터에서 영감을 받아 설교를 쏟아내는 영혼 없는 기계가 아니다. 그는 사역의 모든 굴곡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진정한 설교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여덟 가지 거룩한 우선순위는 AI 가능성의 시대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토대를 제공한다.
우리 자신을 알기
AI의 초능력에는 우리가 반드시 밝혀내야 할 위험이 따라온다. 감시 문화, 사생활 침해, 인간의 정체성을 데이터로 축소하기, AI 봇으로 인간관계를 대체하기, 인간 노동력의 탈숙련화, 그리고 온라인 허위 정보의 확산이 초래하는 위험 등이다. 이러한 모든 우려는 현실이며, 최근 바티칸은 AI가 사회를 비인간화하고 인간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또 다른 측면도 있다. AI가 등장하기 훨씬 전, 영국의 과학자이자 소설가, 그리고 대중 지식인으로 변신한 C. P. 스노우는 자신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는 인간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두 문화”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첫 번째인 “인문학 문화”는 예술가, 작가, 철학자들이 예술 작품, 문학 작품, 철학적 탐구를 통해 인간성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투영하고 그 결과 창의성과 성찰이라는 방법으로 인간 조건을 탐구하는 영역이다. 우리는 인문학을 통해 인간다움의 의미를 배운다.
그러다가 “과학 문화”가 등장했다. 이는 연구자들이 경험적 탐구, 즉 과학, 실험, 면밀한 관찰, 그리고 데이터를 활용해서 현실에 대한 가설을 체계적으로 검증하고, 그 결과 인간 본성과 세상을 이해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기술학자 케빈 켈리는 지난 50년 사이에 인간이 자신에 대해 발견하는 방식에 세 번째의 독특한 지적 문화가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메이커(maker) 문화”라고 부른다. 이제 “인문학 문화”와 “과학 문화”에 이어서 “메이커 문화”라는 게 등장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합성해서 재창조하려고 시도함으로 스스로를 탐구한다. 인공적인 생명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함으로 삶을 연구한다. 시뮬레이션된 사회를 구축함으로 사회적 추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심화한다. MIT, 스탠퍼드, 옥스퍼드 모두 AI를 기반으로 정치학 및 사회학 실험을 진행 중이다. 또 다른 연구실에서는 두 발로 유연하게 걷는 두 발 로봇을 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걸을 때 뼈와 관절, 근육이 어떻게 함께 작용하는지 더 깊이 이해하게 굉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인공적으로 지능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함으로 지능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기술은 단순히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위협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더 깊은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인공지능에 대한 모든 시도는 수십 년간의 전통적인 신경생물학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인간 지능의 신비와 위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발걸음이다. 지능처럼 복잡한 것을 복제하려다 실패할 때, 바로 그러한 한계와 실패가 인간 지능의 진정한 복잡성과 고유성을 드러낸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인간 존엄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기술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하인 또는 우상?
나의 첫 질문, “설교자가 앞으로도 계속 필요할까?” 이제 우리 모두가 답해야 할 더 나은 질문으로 대체된다. 스펄전의 AI 설교 봇 2000이 가능하고, AI가 10초 만에 설교 전체를 작성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다시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간다. 설교란 무엇인가? 그리고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기술적으로 설교를 모방하려는 시도는 진짜 설교에 대한 정의를 그 어느 때보다 부각시킨다.
다음 사실은 명확하다.
• 개성 없이 로봇처럼 말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 아무런 확신 없이 정통 교리에 맞는 말을 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 하나님에 대한 애정이 실종된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 개인적으로 보호를 받으며 말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 교인들의 필요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사랑이 실종된 사역에 기초한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 교인들에게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 진정으로 듣기 위해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설교를 듣는 것은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다.
•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설교를 듣는 것은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다.
• 노트에 메모를 잔뜩 해도 그 진리가 소화되고 영혼에 새겨지도록 노력할 의도가 없을 때에는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다.
AI 시대에 우리는 인간의 진정성에 대한 새로운 명확성을 추구한다.
기술은 훌륭한 하인이면서도 끔찍한 신이다. 자기 과시를 위해, 혹은 게으름 때문에 AI를 찾는다면, 당신은 AI 안에서 새로운 우상을 만날 것이다. 그 우상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경고했던, 귀도 눈도 입도 없는 멍청한 우상이 아니다. 당신은 듣고 보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우상에 갇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AI는 우상이 아니다. 꼭 그런 건 아니다. 제대로만 사용하면, AI는 설교자를 위협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교자도 AI를 위협하지 않는다. 이 여덟 가지 신념을 염두에 두고, 그리고 감히 말씀드리건대, 현재의 형태와 지금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래의 형태에서도 현명하게만 활용될 때, AI는 훌륭하고 신실한 설교자들을 더욱 뛰어나게 만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