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qun Gui/Unsplash
Zequn Gui/Unsplash

[사진 설명]

이 사진은 도심 속 하천 풍경을 담은 이미지입니다.

중앙에는 얕은 물이 흐르는 하천이 있고, 하천 위에는 돌다리와 작은 아치형 다리가 보입니다.

하천 양쪽으로는 보행로와 계단이 정비되어 있습니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산책하거나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양쪽 보행로 위쪽에는 나무와 초록 식물이 조성되어 있으며, 주변으로는 고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여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사진 끝]

 

전재훈의 ‘책과 함께’ 

공간 인간
유현준 지음

내게는 세 가지 중독이 있다. 일 중독, 커피 중독, 그리고 활자 중독이다. 그래서일까. 섬진강으로 꿈같은 휴가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아침 7시에 기상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경치 좋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책을 읽고 있으면,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 내 모든 욕구가 충족되는 느낌이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삼성궁과 청학동 입구에 위치한 “지금 여기”라는 카페에 들렀다. 이곳에서 돈가스를 시켜 먹고, 드립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 글을 쓴다. 앞에는 섬진강의 지류가 흐르고, 뒤로는 마을이 아늑하게 형성되어 있다. “지금 여기”라는 카페는 한 가정집 앞마당에 2층으로 지어진 아담한 목조건물이다. 조금은 특별하고 이질적인 공간이다. 카페를 하고 싶어 하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손수 마당에 지어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공간 인간을 읽었다. 건축가 유현준의 눈으로 풀어낸 역사 이야기이자, 일종의 ‘빅 히스토리’다. 나는 빅 히스토리를 좋아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수만 년에 걸쳐 인간의 기술과 능력이 차곡차곡 축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과거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젊을 때는 역사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지금의 ‘나’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역사는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역사에 몰두한 시간이 있었고, 그 결과로 복음과도시에 역사 시리즈물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동안 내가 접해온 대부분의 빅 히스토리는 경제나 전쟁 중심이었다. 목사라는 내 직업상 종교 중심의 역사에도 익숙했다. 하지만 이 책은 ‘공간’이라는 전혀 새로운 매개체를 통해 역사를 설명한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던 원시 시대부터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가 연결된 현대에 이르기까지, 총 17개의 챕터를 통해 시간의 층위를 하나하나 쌓아가는 방식이다.

공간이 지닌 힘, 권력의 집중, 대중을 장악하는 구조, 사람들 사이의 관계 형성까지, 이 책은 내 생각의 지평을 확장시켜 주었다. 무엇보다 반가웠던 점은, 오랜만에 번역서가 아닌 한국 작가의 책을 읽으며 훨씬 친숙하고 즐거운 독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유현준 작가의 책은 처음이지만, 단번에 매료되었다. 그의 다른 책들도 꼭 읽어 볼 생각이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꼼꼼히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이 책은 두세 번은 더 읽어야 비로소 만족할 것 같다. 한 번에 400쪽 분량을 온전히 소화하기엔 나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며, 역사를 공간과 관계라는 관점에서 다시 정리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이 책을 경치 좋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읽는 동안, 눈앞의 풍경과 이 카페라는 공간, 그리고 커피가 주는 따뜻함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큰 인류 역사 속의 선물이고 축복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창 너머로 흐르는 강물, 그 위에 부서지는 햇살, 손에 들린 따뜻한 커피 한 잔. 자연과 공간, 분위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곳에서 이 책을 읽는 경험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간적 감각’이었다.

책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시공간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며, 눈앞의 공간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우리 삶을 구성하고 변화시키는 주체임을 일깨운다. 나는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성능 좋은 자동차를 타고 하동까지 달려왔다. (저자는 이걸 공간의 압축이라고 부른다.) 그 자유와 속도가 얼마나 오랜 역사와 기술의 축적 위에 가능한 것인지를 책을 통해 새삼 느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공간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인공지능이 존재하는 인터넷 공간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내게 새로운 시선을 열어 주었다. 인터넷도 하나의 ‘공간’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관계 맺고 있다. 지금 이 글을 통해 책을 읽으며 느낀 감정을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불특정 다수와 나눌 수 있는 것도, 이 시대가 가진 특별한 공간의 확장을 의미한다.

작가가 그리스도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책 속에는 교회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성경의 이야기를 ‘공간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풀어낸 부분이 특히 인상 깊었다. 특히 상가교회에 주목하여 설명한 부분은, 상가교회로 시작해 지금도 이 상가 저 상가로 옮겨 다니는 나의 상황과도 맞물려 더욱 반가웠다. 책 속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상가에 교회가 들어갔다. ‘상가 교회’는 도시의 상업 시설과 종교 건축이 하나가 된 독특한 공간 구성이다. 상업과 종교의 목적을 동시에 해결해 주는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 때 숭유억불 정책으로 절이라는 종교 시설이 주거 환경에서 빠져 산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일본에 가면 도심 한복판에 절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산속 국립공원 안에 절이 있다. 이렇게 주거와 종교는 조선 518년 역사 동안 분리된 공간이었다가 기독교의 상가 교회가 등장하면서 갑작스럽게 종교 공간이 주거 공간으로 들어온 것이다. 한국 전쟁이라는 트라우마가 있는 상태에서 종교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했는데, 기독교는 승전국 미국의 종교라는 이미지와 함께 접근성 좋은 곳에 자리하게 되어 어떤 종교보다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게다가 1970~1980년대에 남녀 학생들은 중학교 이후에는 항상 따로 떨어져서 학교생활을 해야 했는데, 교회는 이성 교제가 건전하게 인정되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이 또한 젊은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요소였다. 절은 멀리 떨어져 있고 구세대의 상징이라면, 교회는 접근성이 좋을 뿐 아니라 진보와 선진과 신세대의 상징이었다. 아이돌이나 공연 문화가 없던 당시에 교회에서 기타를 치는 찬양팀 ‘교회 오빠’는 아이돌이었다.

대한민국 기독교의 성장은 건축 공간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2023년 기준 대한민국의 도시 지역 인구 비율은 92.1퍼센트다. 일반적으로 인구의 도시화 비율이 85퍼센트 넘어가면 완성 단계로 보니, 대한민국의 도시화는 완성을 넘어서 과밀 상태다. 더 이상 아파트 단지로 새로 유입하는 인구가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학교는 남녀 공학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교회는 오히려 성性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대한민국 기독교의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 종교의 본질에 더욱 순수하게 다가가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_공간 인간

에덴동산에서 인류가 시작되었지만, 인간은 그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에덴을 꿈꾸며 살아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에덴’에서 쫓아내어 골고다 언덕, 곧 하나님의 동산이어야 할 그곳에서 죽게 했다. 생명나무 대신 십자가가 세워졌고, 예루살렘은 인간이 만든 에덴이었지만 질투와 시기, 욕망이 가득한 죄악의 도시가 되었다.

공간 인간을 읽으며 이러한 대비가 새롭게 다가왔다. 에덴에서 쫓겨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의 도성에서 내쫓은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만든 고립되고 소외된 도시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도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도시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공간 인간은 나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공간 속에 살고, 공간은 우리를 만든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공간이 하나님의 도시를 닮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