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이 삽화는 밤하늘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한 소녀가 등을 돌린 채 붓을 들고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있습니다.
그녀는 갈색 머리에 긴 치마와 상의를 입고 있으며, 바람에 치마가 약간 휘날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바라보는 하늘은 진한 남색과 파란색의 물결무늬로 그려져 있으며, 별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하늘의 일부는 베이지색 배경 위에 물감처럼 퍼져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소녀가 붓으로 밤하늘을 그리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진 끝]
예술은 영적인 영역이다. 저명한 예술신학자들의 이 결론은 오늘날 예상치 못했던 여러 경로를 통해 인정받고 있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챗GPT는 ‘예술이 영적인가?’라는 질문에 여덟 가지 이유를 들면서 동의하고 있고, 무신론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대표 저서 사피엔스를 통해 ‘원시시대 인간이 예술 활동을 시작하게 된 원인이 종교에 있다’고 인정했다. 기독교 영성을 거부했지만, ‘영성’을 열정적으로 구현하는 뉴에이지 예술 운동은 어떤 식으로든 ‘예술이 영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 주장은 사회주의 국가의 예술관 속에서도 반증된다. 20세기 초반 러시아 예술가 블라드미르 타틀린은 ‘물질의 본능’에 따라 예술을 구축하려 했다. 원재료들을 기계적이며 기하학적 형태로 구성해 ‘구축주의’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는 ‘영적인 예술을 반대’하고 ‘물질적 욕구와 열망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구축하고 체계화하려는 유물론적 사명’의 예술이었다. 전체주의 사회에는 이렇게 ‘오직 국가와 당의 사상을 대중에게 심어 주고 선동할 수 있는’ 목적과 사명을 지닌 작품만을 탁월한 예술이라고 평가했고, 지금도 개인의 창조성과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마치 예술이 영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진짜 예술 활동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금지하는 듯하다.
‘영적인 예술’을 자신의 모든 삶으로 증명하는 예도 있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져 있는 한국의 대중음악인이자 화가인 유나얼은 ‘소울 뮤직(Soul Music)’ 즉 한국의 ‘영적 음악’이라는 장르 자체를 만들고 선두로 달려온 인물이다. 그는 2018년에 ‘사운드 독트린(Sound Doctrine)’이라는 제목의 음악앨범을 선보였는데, 사운드 독트린은 성경(KJV)에 등장하는 용어로(딛 1:9), 한국어로는 ‘건전한 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경 말씀에 따라 바르게 사는 것’을 뜻하는 ‘건전한 교리의 삶’을 바탕으로 ‘선하고 건강한 음악’을 추구한다는 그는 이 앨범을 통해 “오직 너는 건전한 교리에 합당한 것들을 말하여(딛 2:1)”라는 말씀에 음악적 응답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대중음악과 미술의 경건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한 한국의 대표적 예술인으로, ‘예술은 영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세계가 인정하는 ‘자신만의 창조적 보컬 소울’을 완성했다.
이렇게 ‘예술이 영적’이라는 말은 곧 두 가지 진실을 내포한다. (1) 예술의 유일한 주체인 ‘인간은 영적이라는 것’ 즉 육체와 정신적 산물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 (2) 그리고 ‘영적인 일’은 마치 탁월한 예술처럼, ‘집단주의적이고 정해진 행동양식과는 거리가 먼, 창조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육체를 가진 영적인 인간, 진짜 나는 누구인가?
역사 이래 손꼽히는 천재라고 평가받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욕구가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자기만의 생명력과 지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표현이다. 다빈치는 자신의 몸의 일부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나대며, 고집스럽게 독자적인 다른 생각을 품는 경우가 많아, 마치 자신만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을 했다.
‘자신의 육체를 온전히 마음대로 움직이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마음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마음 속 갈등과 혼란에 ‘곤고한 자(롬 7:24)’라며 탄식했고, 예수님이 선별한 수제자들도 육체의 잠을 이길 수 없어 가장 중요한 때에 기도하지 못했다(마 26:38-41).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누가 진짜 나인가’에서 시작했다. 정신과 육체, 욕망과 의지, 또는 제3의 목소리와 공정한 관찰자 사이에서 ‘진짜 나를 규정하는 주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말이다. 본능의 목소리와 도덕적 목소리 중에 누가 나인가? 의지를 정하는 나와 욕망대로 행동하는 나, 둘 중에 진짜 나는 누구인가? 끝날 수 없는 철학적 사유의 주제였다.
철학을 알지 못해도 시인은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노래하고, 오늘도 현대인은 ‘나를 이기는 법’ ‘나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 관심이 많다. 당장 식단을 하고 몸을 관리해야 하는데 건강을 해치는 탄산음료를 마시고 있는 나의 모습을 마주할 때, 내가 나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내 뜻과 마음대로 되지 않는 또 다른 나와 마주한다.
늘 자기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현대 철학자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셀 푸코와 같은 탈구조주의자들은 대중에게 세련된 생각의 방식을 선물했다. 옳고 그른 두 개념의 대립에 의해 좋고 나쁨을 말하려는 것을 일단은 미루고, ‘회색지대에서 리얼리티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즉, 나 자신을 이루어 가는 것은 절대자나 절대선과 같은 옳고 선하고 아름다운 선택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차이를 이해하고 제3의 타자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세련된 태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오늘날까지 자신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큰 집단사유의 흐름이 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 또는 세상의 영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다(로마서 8장). 세상의 영이란 하나님의 영이 아닌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악한 영적 세력들이며, 하나님을 떠나 육의 세계에 속한 삶을 살도록 미혹하는 영으로 설명된다(고전 2:12; 요일 4:5-6).
어린 시절 귀신 들린 여자가 지역교회 목사의 사택이었던 우리집에 와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화 <엑소시스트>에서나 나올 법한 괴상한 목소리를 내다가 거품을 토하고 회복된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인해 악한 사탄의 존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벌벌 떨며 항복하고 나간다는 성경 속 말씀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 회복된 젊은 여자와 오랫동안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한 사람이 악에서 놓여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고 경험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한 송이 꽃이 피어나는 일 같았다. 사회가 정한 이론과 기준에 맞춰 집단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빚은 단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빚어지는 일이었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대해 많은 관계적 위치를 부여한다. 하나님의 자녀(아들), 예수님의 제자, 주인의 성실한 청지기, 예수님의 친구(요 15:14), 믿고 가업을 맡긴 종, 하나님 군대의 병사, 거룩한 백성, 왕 같은 제사장, 그가 주신 사명을 가지고 상을 받기 위해 경기를 뛰는 운동선수, 포도나무 원줄기에 붙은 포도나무 가지, 그가 치고 먹이는 양, 신랑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신부 등이 그렇다. 많은 비유적 표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직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용어들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니면 그의 친구인지, 아니면 그의 종인지, 아니면 그의 군대에서 훈련받는 병사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하신 중재사역을 하는 제사장인지, 아니면 일인다역을 해야 하는 복합적인 위치의 사람인지에 대해 말이다. 내 육체를 가지고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와 환경에 대해 판단과 사유를 하는데 성령님이 통제하시고 주인 되신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죽여야 하는 자아는 무엇이고 지켜야 하는 정체성의 본질은 무엇인지, 왜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인지, 내가 하나님 것이라면 나라는 개체 의식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이 끝나지 않을 질문들 속에 얻은 몇 가지 결론이 있다. (1)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상상하고 펼쳐 나가는 ‘나다움 찾기’는 ‘예술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지난 주 관람했던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천상의 연주보다 다이내믹하고 섬세하며, 눈을 뗄 수 없는 화려한 케이팝 공연보다 흥미롭고 흥분되며, 나얼의 음악세계를 연구하는 것보다 재미있고 희열을 느낀다. 그 이유는 (2)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사회가 제시한 방향에 순응하는 과정이 아니라, 다수가 선택한 것을 취하는 일이 아니라, ‘단독으로 창의적이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3)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는 나다움은 그 어떤 정해진 이론도 없고 딱딱하게 사상화 되어 있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고, 이것이 큰 선물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무엇보다 (4) 갖가지 관계적 비유와 이야기들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잠시 느껴보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식을 낳아보니 탯줄에서 떨어져 나가도 그 자녀는 여전히 나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 아기의 깨끗한 몸을 위해 매일 씻겼고, 아이가 커가며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면 좋겠다는 생각에 매일 가르쳤다. 자녀가 사춘기가 되니, 그의 마음을 내가 어찌할 수 없고 그의 결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한다. 그러나 여전히 뜨겁게 바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신의 존재의 소중함을 언제나 인식하고 감사하기를, 우리의 관계와 함께하는 시간 속에 늘 즐거워하기를, 대중과 집단적인 사고에 함몰되지 말고 언제나 유일무이한 존재로의 창조적 도전을 하길, 아무리 힘들고 외로워도 강하고 담대하게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창조주의 날개 아래 거하고 사랑받는 자녀가 되길, 사랑의 사람이 되길, 그래서 영원히 기쁘게 살기를, 바라고 기도할 뿐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두가 그의 안에서 한없는 존재적 기쁨을 누리기를 소망하며, Soli Deo glor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