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Tissot, Jesus Wept (Jésus pleura, 부분)/Public Domain
James Tissot, Jesus Wept (Jésus pleura, 부분)/Public Domain

 

[사진 설명]

왼쪽에는 흰 옷과 터번을 쓴 인물이 바위 위에 앉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인물은 깊은 슬픔이나 기도를 표현하는 자세입니다.

오른쪽에는 어두운 옷을 입고 바닥에 앉은 여인이 두 손을 모은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뒤쪽에는 여러 명의 남녀가 침묵하거나 기도하는 듯한 자세로 서 있습니다.

배경에는 돌담으로 된 고대 도시 건물이 흐릿하게 그려져 있어 중동 지역의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는 비통함과 경건함을 함께 드러냅니다.

[사진 끝]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는 유난히 많은 죽음이 등장한다. 주인공 오애순의 삶에 갖가지 죽음이 들이닥친다. 아버지의 죽음. 살아남기 위해 재혼을 선택한 엄마의 죽음. “살지만 명치끝에 자식을 백혀(박아) 놓고 사는 것”일 뿐인 사랑하는 자식의 앞선 죽음. 무쇠처럼 곁을 지켜주던 남편의 죽음... 이 모든 죽음이 그녀의 몫이었다.

그때마다 그 죽음 앞에서 오애순은 꾹꾹 눌러왔던 설움들을 토해내듯 운다. 동네 사람들은 그저 그녀의 곁에서 “울기라도 해야지 실컷 울라” 한다.

다윗도 그랬다. 압살롬의 죽음을 들었을 때, 그는 통곡했다. 왕의 체면 따위는 없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 대신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그 울부짖음 속에는 자식을 향한 애통뿐 아니라, 죄와 그 결과(삼하 12:10), 깨진 관계로 인한 인간의 한계에 대한 통절한 고백이 담겨 있다.

요즘의 죽음은 이에 비하면 호사롭고 쉽다. 장례식장은 슬픔보다는 오랫동안 못 보던 얼굴을 보고 안부를 묻는 장소가 되었다. 장례 일정은 상조 회사의 패키지에 따라 착착 진행된다. 종교 일정까지 채워 준다. 상주는 고생 없이 편안하게 잘 가셨다며 아쉬움이 없다. 역사상 늙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로 길었던 적은 없었으니 어쩌면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죽음이 유가족에게 긴급성과 필연성을 안겨서일까? 장례 예배 후에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를 여럿 보았다. 이럴 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외에도 성경에는 나오미, 나인성 과부, 나사로, 아들의 죽음을 두 번이나 겪는 다윗, 한꺼번에 자녀를 몽땅 잃는 욥 등등이 등장한다. 나인성 과부와 나사로 죽음 사건에서의 마을 관객은 예수님이시다. 오애순의 바닷가 마을 사람들과는 사뭇 달리 예수님은 인생에 죽음이 존재한다는 실존 앞에서 비통해하시며 우신다. 또 여인에게 ‘울지 말라’ 하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비통이지, 죽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관에서 무덤에서 그들을 불러일으키시며 적극적으로 개입하신다(눅 7:11-17, 요 11:35). 우리는 원래 하나님을 닮아서 영원히 살도록 설계되었다. 창조 계획에 없던 죽음이 끼어든 것이다. 장애물은 본질이 아니므로 걸려 넘어지지 말고 뛰어넘으면 된다.

죄를 슬퍼하고 탄식하고 회개할 때, 성경에는 ‘애통’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일찍이 프로이드는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한 후 분리의 슬픈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고 정서적 애착을 철회하는 고통스러운 애도 과정을 이야기했다.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과 그 대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애도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설명은 이렇다. 현실을 받아들여, 감정 표현이 자유롭게 일어나서 대상의 분리가 잘 되면, 이제 다른 대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홀로서기가 이루어지면 독립이 되는 것이고, 역으로 상실의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면 좌절과 혼란과 회피의 악순환 속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어려서는 종종 긴 상여 행렬을 보았다. ‘아이고 아이고’ 큰 소리로 대신 곡을 해 주는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보니 개인의 슬픔을 넘어선 공동체의 슬픔으로 받아들여진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부락, 마을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로 안겨진 시대가 되었다. 애도에도 그 현상이 나타나 가족의 죽음 이후 ‘자기 돌봄’의 필요를 말한다. 그래서인지 마음으로 떠나보내고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애도 전문 상담과 상담센터들이 생겨난다. 뒤이어 대상을 잃었다는 상실, 정서적 단절의 고통을 새로운 적응과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 애도 프로그램도 함께 들려온다. 충분히 상담 프로그램으로 상용화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

출판을 위해 오애순의 글을 검토하던 편집장은 그 많은 죽음과 처절한 삶을 대하는 한 여인의 인생을 “장하다” 평했다. 그 여인이 꾸역꾸역 걸어온 삶의 여정 앞에서 더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오애순이 죽음 앞에서 실컷 울어 재끼고 자신의 성품과 기질이라는 내적 요소로 당당하게 삶을 위해 걸어갔다면, 성도가 대하는 죽음은 차원이 다르다.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지만(시 90:7,11), 그리스도께서 대신 달리셨으므로(갈 3:13) 성도의 죽음은 형벌이 제거된 죽음이다(시 116:15). 그래서 성도의 애통은 죄의 삯이라는 죽음의 본질에 직면하는 비통이다. 그러나 성도의 죽음은 또한 소생할 수 없는 영원한 종말이 아니다. 주와 더불어 영원히 거하기 위한 죽음이다(롬 8:11, 살전 4:16-17). 구원의 완성이며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소망했다(고후 5:8). 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죽음에게 자리를 내어준 비통은 예수의 부활로 승리가 될 뿐 아니라 죽음은 조롱이 된다(고전 15).

애도는 상실감, 비탄, 실존적 공허, 허무에 초점을 둔다. 잃은 것, 사라지는 것, 없는 것에 초점을 둘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서 영원히 살지만, 하나님을 닮아서 감정도 가졌다.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할 때 내적인 감정을 사용하여 나와 세상을 연결한다. 내면은 미묘하고 복잡하여 내 감정, 삶을 움직이는 요인은 파악하기 힘들 때가 많다. 먼저 간 사람의 입장에서는 육신의 장막을 벗은 자유함이고, 주님의 품에 안긴 영원한 안식이다. 그렇다면 상실감, 비탄은 나의 개인적인 감정일까? 놓지 못하는 섭섭함과 원망, 지속적인 상실감과 비통의 여정은 조심스럽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시작된 ‘자기애적 슬픔’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을 수 있고, 장차 이루어질 일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의 상태가 향상되기를 추구한다(잠 4:23). 바울은 소망이 없는 자들과 같이 슬퍼하지 말라 한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한다(살전 4:13). 그래서 팀 켈러 목사도 슬픔 가운데 소망이 공존하므로 성도는 소망이 있는 애도, 곧 슬픔의 방식이 달라야 한다고 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인간에게서 시작하는 상실이라는 슬픔을 부여잡고 있다면,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홍역과 천연두로 죽음이 잦았던 과거에 견주면 이제 죽음은 멀고, 코로나를 겪었어도 다수의 죽음은 나의 현실이 아닌 통계치일 뿐이다. 오래 살기 때문에 죽음의 도래를 예상하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현세적인 삶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세속적인 마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의 동기 목사에게 교회에 애도 상담 프로그램이 필요한지, 심방 경험에 비추어 말해 달라고 했다. 성도의 슬픔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 우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가 되물었다. “죽음에 대한 성경적 정리가 명확히 안 되어 분리와 단절, 상실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마치 패키지는 있는데 실행파일이 안 열리는 것과 같은 것 아닌가요?” 패키지에 맞는 실천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알아들었고, “내년 부활절 설교에 죽음의 완성, 부활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들려주면 되겠네요”라고 응수했다.

예수의 죽음은 그가 땅을 떠나셨기에 우리에게 유익이 되었다. 그가 떠나시므로 내 안에 그가 살아 계신다. 더구나 약속대로 그가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새 몸을 입는다. 더 결정적인 것은 갈구했지만 모형이기에 온전하지 못했던 우리의 ‘더불어’의 삶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온전해진다.

‘주님 품으로 돌아간다.’ 죽음에 대한 우리 성도의 시각은 이것이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우리의 슬픔은 변하여 춤이 된다. 베옷을 벗고 기쁨으로 띠를 띄우시는 이로 인해 노래한다. 불시에 닥친 장성한 자녀들의 죽음 앞에서, 욥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기에 알몸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주신 자도 거두신 자도 여호와시라며 그의 이름이 찬송 받기를 원했다.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며 울부짖고 금식하던 다윗은 그 아들이 죽자 금식을 멈추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한다(삼하 12:20). 처음부터 자기 것이 아니었기에 상실은 보이지 않고 찬송이 대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