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Stock.com/PixelsEf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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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이 사진은 도시 거리에서 찍은 인물 사진입니다.

사진 중앙에는 짙은 청바지와 노란색 반팔 티셔츠를 입은 아이가 돌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두 손으로 들고 화면을 집중해서 보고 있습니다.

아이 옆에는 분홍빛 블라우스와 붉은 바지, 베이지색 운동화를 착용한 어른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으며,

아이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자세입니다. 배경에는 베이지색 외벽의 유럽풍 건물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반쯤 가려져 있지만, 상황은 스마트폰 사용에 대한 대화를 연상케 합니다.

[사진 끝]

 

수년 동안 전 세계는 인공지능과 대규모 언어 모델(LLM)이 인간의 감독을 벗어나거나 거의 모든 면에서 인간을 능가하는 자율적인 존재로 진화할 경우에 직면할 위험에 대해서 떠들썩하게 이야기해 왔다. 경각심을 가진 업계 전문가들 일부는 인간이 이미 이러한 기계의 추론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또한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것과 같은 무서운 시나리오, 즉 파괴 목적을 위해 지능을 가진 로봇이 속임수나 방해 공작을 저지르는 시나리오에 대해서 경고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다양한 종말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중에 나는 몇 가지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발견했다. 예를 들어, AI의 실수가 의도치 않게 핵 분쟁을 촉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작 몇 년 안에 사회가 급격하고도 전면적인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예측에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더 가능성 있는 경로는 우리가 이미 역사를 통해 목격해 온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특정한 기술이 발전할 때 일부 직업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창출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산업과 경제에 일어나는 대대적인 변화 말이다. 

AI는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내 관심을 사로잡는 건 보다 더 심오한 인류학적 질문이다. "AI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AI는 인간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내가 적대적인 로봇과의 터미네이터식 전투를 떠올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AI가 우리 인간에게 미치는 미묘한 영향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AI 기술이 과연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나의 이해를 어떻게 형성할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우리의 자기 인식을 어떻게 바꿀까?

인공지능이 우리의 말과 감정을, 심지어 육체까지도 설득력 있게 모방하게 되면, 과연 인간에게만 고유한 무언가가 남을까? 우리의 행동을 모방하는 뛰어난 능력의 지각 있는 로봇보다 우리가 인간의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길까? 산업혁명 이후, 우리는 점점 더 기계와 같은 언어로 우리 자신을 묘사해 왔고, 이러한 추세는 인터넷 시대에 더욱 속도를 높이고 있다. AI가 로봇과 인간의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면, 우리의 자기 이해는 어떻게 바뀔까? 기계가 인간과 점점 더 비슷해짐에 따라, 우리 인간도 기계와 점점 더 비슷해지는 건 아닐까? 

상호확증 지루함

켈러 문화 변증 센터의 내 동료들 중에는 Biblical Critical Theory을 쓴 크리스 왓킨도 있다. 최근에 그는 놀라운 비유를 제시했다. 냉전 시대에 우리는 상호확증 파괴(MAD)의 그늘 아래에서 살았다. MAD는 평화가 상호간의 선의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상호 파멸을 의미한다는 사실 때문에 유지되는 끔찍한 균형 상태였다.

오늘날 우리는 MAB, 상호확증 지루함(mutually assured boredom)에 직면했다는 게 크리스의 진단이다. 가장 큰 위험은 우리가 점점 더 진짜 살과 피로 만들어진 인간을 지루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은 이미 기이함, 짜증, 그리고 복잡성으로 가득하다. 한마디로, 끊임없이 즐거움을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와는 경쟁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AI는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선택지를 기하급수적으로 확대하여 제공함으로 진정한 관계라는 측면에서 인간 사이의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기계와는 달리 아주 성공적으로 인간의 대화를 모방함으로써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팟캐스트에서 떠드는 각종 종말 시나리오는 별 걱정이 안 된다. 진짜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건 형제자매와의 대화보다 챗봇과의 대화를 선호하거나, 목사님보다 디지털 알고리즘의 조언을 더 신뢰하거나, 실제 연애 관계의 복잡함보다 온라인 판타지를 더 매력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이다. 스마트폰 시대는 이미 출산율 급락, 현실 세계에서의 상호작용 감소, 외로움 증가, 그리고 어쩌면 가장 걱정스러운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근육 기억 상실로 인해 더 이상 친밀한 우정을 새로 시작하거나 유지할 수 없게 된 지각능력이라는 수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이러한 역학 관계는 교회 생활에도 고스란히 스며든다.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교회 신자들에게서 지루함 또는 실망감을 느낀다. 더 풍부한 영적 성장을 약속하는 더 깊은 공동체는 오히려 온라인 설교, 디지털 공간, 또는 AI 기반 앱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만나는 평범한 신자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두신 사람들을 잊어버린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디지털이 제공하는 내용에 비하면 지루하고 따분하기 때문이다. 

이웃 속에서 경이로움을 회복하기

우리 시대의 진정한 위험은 인간을 적으로 만드는 로봇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무관심이다. 지성을 가진 로봇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인간이다.

디지털 시뮬레이션에 매료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영원한 존재인 인간에게 지루함을 느낀다. G. K. 체스터튼은 말했다. "경이로움이 부족해서 이 세상에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다. 문제는 경이로움을 갈망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 시대는 셀 수 없이 많은 경이로움을 제공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경이로움을 갈망하는 마음이다. 특히 평범한 사람들, 우리와 함께 살고, 먹고, 일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영광에 대한 경외심이 더 이상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몬 베유(Simone Weil)는 한때 주목(attention)을 "가장 드물고 순수한 형태의 관대함"이라고 묘사했다. 끝없는 쏟아지는 디지털 자극들이 우리의 집중력을 방해하려는 이 시대에,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유혹은 인색함일지도 모른다. 전심을 다해서 타인에게 주목하지 아낌없이 시간을 쓰지 못하는 관대함의 실패다. 우리는 점점 더 인간관계의 지루하고 짜증나는 측면 너머를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아니,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 속에서는 더 이상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받을 능력이 남아있지 않게 된다.

이 문제는 복음의 핵심을 찌른다.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 영원히 탐구해도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인간은 하찮은 존재이다. 하나님의 위엄에 비하면 인간은 작은 벌레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 잠시 생각해 보자. 가장 매혹적인 존재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은 피조물에게 아낌없는 관심과 보살핌을 베풀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세심함을 보여주도록 부름 받은 이유는 우리 모두가 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신성한 형상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AI 시대에 걸린 중차대한 문제이다. 진정한 인간관계, 즉 지역 교회의 혈육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그리고 비록 개인의 자유와 충돌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우정이 가져다주는 영광을 인공지능의 매혹적인 효율성과 맞바꾼다면, 우리는 사랑의 선물을 포기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보고 음미하는 대신 교묘한 말솜씨를 자랑하는 디지털 환상의 친밀함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인간성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진정한 우정과 성도간의 교제가 내포한 아름다운 어수선함 대신 알고리즘 상호작용을 선택한다면, 로봇과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상만큼이나 비극적인 세상, 광범위한 수준으로 사랑이 사라진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눈부신 기술 세상이 제공하는 부와 편안함과 효율성으로 가득하지만 사랑 없는 황무지와 같은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라. 서로를 향한 지루함이 넘칠 때 우리가 만날 곳이 바로 그런 세상이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AI와 관련해서 과연 어떤 종말론 시나리오가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인간성을 잃고 싶지 않다. 그것만은 확실하게 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해야 할 이웃에 대한 관심을 무디게 하거나 경이로움을 희미하게 하는 모든 삶의 방식이나 반짝이는 모든 신기술에 저항해야만 한다.

출처: AI and the Threat of Mutually Assured Bored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