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이 사진은 실내 고전 건축 양식의 공간에 설치된 흰색 대리석 흉상들이 나란히 진열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흉상들은 모두 중세 또는 고대 인물의 얼굴을 묘사하고 있으며, 오른쪽을 향해 같은 방향으로 놓여 있습니다.
흉상 아래에는 어두운 목재 받침대가 있고, 받침대는 초록색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배경은 높은 천장과 어두운 목재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엄숙하고 학구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장소는 박물관 또는 도서관의 전시 공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진 끝]
지난 글에 이어 앞으로 기독교 윤리의 탁월성이라는 역설을 세 가지 관점에서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첫째, 현대 윤리가 추구하는 이상과 그 한계. 둘째, 세속 윤리가 도달하는 논리적 귀결. 셋째, 율법의 용법을 통한 기독교 윤리의 탁월성. 이 세 가지 주제를 통해, 기독교 윤리가 지향하는 윤리적 탁월성이 인간의 노력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전능함과 자비에 근거함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번에는 그 첫 시간으로 인간 사회가 추구하는 윤리의 최종 지향점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가능한 윤리”
근대적 윤리는 16세기 르네 데카르트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의 윤리가 ‘신’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데카르트 이후로는 인간의 ‘자아’가 윤리의 중심이 되었다. 물론 데카르트 역시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한 절대자, 즉 하나님을 상정하긴 했지만, 그의 하나님은 인간의 사유에 개입하지 않는 이신론적 존재에 가깝다. 흔히 알려진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의 사유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표현이다. 이 명제의 본래 맥락은 『제2성찰』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모든 것을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재어 보게 되면, 나는 존재한다, 나는 현존한다는 이 명제는 마침내, 내가 그것을 발화할 때마다 심지어 정신에 떠올릴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1]
데카르트는 감성과 이성을 모두 의심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것들이 자신을 속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속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서도 자신이 존재해야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바로 ‘나’의 존재였다. 이 지점에서 데카르트는 사유의 새로운 문을 연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함으로써, 불확실하거나 거짓된 것들을 제거하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아의 존재에 도달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나는 이제, 내가 이 사유들에 이르기 전 그 당시에 나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믿었는지를 다시 한 번 성찰할 것이다. 그런 다음, 제시된 근거들에 의해 조금이라도 약화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에서 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만이 정확하게 남을 것이다.[2]
결국 데카르트는 절대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준거점을 ‘나’에게서 찾는다. 그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곧 ‘의심한다’는 뜻이며, 의심이란 진리를 가려내려는 행위다. 그러나 이 모든 사유의 시작점에는 항상 ‘나’의 존재가 놓여 있다. 의심조차 할 수 없는 존재, 바로 그것이 ‘나’이기 때문이다.[3]
찰스 테일러는 그의 『자아의 원천들(Sources of the Self )』에서 데카르트의 자아 개념을 개인화되고 철저히 주관적인 것으로 본다. 데카르트가 구축한 근대적 이성 역시 도구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윤리를 피할 수 없다고 그는 지적한다.[4]
20세기를 대표하는 윤리학자 알라스데이어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흐름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계몽주의 이후의 윤리를 ‘정의주의(情意主義, emotivism)’라고 부른다. 감정과 정서에 따라 도덕 판단이 달라진다는 입장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의주의는 모든 가치평가적 판단, 더 정확히 말해 모든 도덕적 판단은 선호의 표현들, 태도 및 감정의 표현들과 다를 바 없다는 학설이다. ... 그러므로 정의주의는 모든 가치 판단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만약 그것이 옳다면, 모든 도덕적 불일치가 합리적으로 끝없이 계속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5]
이러한 비판들을 따라가다 보면, 현대 윤리학은 더 이상 단단한 규범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가능성의 윤리(ethics of the feasible)’다. 한때 칸트의 정언 명령이 “너는 해야 한다”고 외쳤다면, 오늘날의 윤리는 “우리는 할 수 있다” 또는 “나는 아마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가능성 위에서 논의된다. 그래서 현대 윤리는 실현 가능성과 대중적 만족, 즉 경제적 합리성과 공리주의적 기준 속에서 공동선과 정의, 지속가능성을 재단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윤리는 본성상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하나는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가변성’이고, 다른 하나는 실현 가능한 것만을 추구하는 ‘실현 가능성’이다.
인간 가능성에 대한 긍정과 자기 구원의 서사
계몽주의 이래 인류는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의 서사를 살아왔다. 이 진보의 신념은 특히 20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뒤, 인간에 대한 낙관과 낭만주의적 윤리를 돌아보는 반성과 함께 잠시 멈칫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디지털 혁신과 유전공학의 발전, 그리고 인간의 형상을 닮아가는 휴머노이드 로봇과 인공지능 기술은 다시 한 번 인간 향상의 이상을 부활시키고 있다. 특이점(singularity) 즉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그 미래에 대한 낙관은,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과학과 교육, 정치의 개혁을 통해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낙관주의는 윤리 담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해체하고 성의 경계 또한 흐릿하게 하여 인간 스스로 창조된 성을 선택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LGBTQ+와 같은 무한이 많은 성의 공존을 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 환경윤리는 탄소 중립이나 신기술을 통해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낙관하며, 생명윤리는 인간 수명 연장만이 아니라 병 없는 삶을 약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 ‘신’의 자리는 점차 좁아진다. 하나님은 더 이상 윤리의 중심이 아니라, 때로는 불필요한 존재로, 때로는 제도 개선의 영적 조력자 정도로 축소된다. 결국 오늘날의 윤리는 인간 스스로 세운 ‘자기 구원의 설계도’가 되었다. 그러면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상승이 아니라 자기의 합리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1. René Descartes,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이현복 역(서울: 문예출판사, 2021), 45.
2. Ibid., 46.
3. Charles Taylor, Sources of the Self: The Making of the Modern Identity ( Cambridge, Mass: Harvard Univ Pr, 1989), 143-158.
4. Ibid.
5. Alasdair MacIntyre, After Virtue: A Study in Moral Theory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4), 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