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이 사진은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치대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화면 중앙에는 거칠고 부풀어 오른 반죽 덩어리가 놓여 있으며, 두 손이 반죽을 누르고 있습니다.
손에는 밀가루가 묻어 있고, 오른손 약지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습니다. 배경은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어 초점이 반죽과 손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 장면은 제빵이나 요리 과정 중 하나를 보여주는 이미지입니다.
[사진 끝]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우리 삶의 장에서 사람들과 사건들과 사물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파악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신적 신비는 단지 역할적 또는 정신적 개념들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 안에서 현시된다. 경외의 성향은 삶의 장에서 신적 신비가 이루는 현현과 공명을 이루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현현을 예배 의식을 통해 경험할 수 있지만, 자연과 우주, 예술과 과학, 여러 학문 영역을 통해서도 파악하고 경험할 수 있다. 경외의 성향은 신적 신비의 현현인 사람들과 사건들과 사물들을 통해서도 촉진될 수 있다. 이는 마치 사랑받는 사람의 눈에서 사랑하는 사람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경외의 성향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물들의 분리를 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동적 특징이 있다.
우리는 실제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감각적인 것들에서 신적 신비를 경험하며 경외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우리는 경외 성향의 이러한 특징을 성경에서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정말로 죽음을 정복했을까 반신반의했던 도마는 예수님을 향해 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다(요 20:25). 하지만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확인한 후에 경외심에 휩싸이게 된다. 그는 경외심에 휩싸여 무릎을 꿇었다.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여”(요 20:28).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여정에서 창조주의 눈을 통해 사람들과 사물들과 사건들에서 펼쳐지는 신적 신비와 진선미를 보며 경험할 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더 충만해 질 수 있다. 창조 세계가 은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보도록 하는 망원경처럼 역할하기 때문이다. 폴 트립에 따르면,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의 영광에 매료되면 자연히 경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의 온갖 아름답고 놀라운 것들, 곧 피조물의 형상, 소리, 색채, 질감, 촉감은 “영광의 망원경” 역할을 하도록 창조되었다.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위대하고 강력한 것은 무엇이든 “영의 망원경” 역할을 한다”(폴 트립, 경외: 뒤틀린 삶을 바로잡는 힘, 80).
또한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 곧 존재론적 동역자가 아니라 실천적 동역자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라고 교훈한다(시 119:91).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인간과 소나무, 벼, 장미와 같은 사물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다. 나아가 인간은 주어진 은사나 재능을 통해 하나님 나라 창조 사역 참여할 때 하위 창조자들이 된다.
경외의 성향은 자연법과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경외의 성향은 존재 자체 안에서, 창조 안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것 안에서도 창조적 아름다움과 경이를 느끼게 한다. 경외의 성향은 근본적으로 진선미를 경험하는 발단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법에서 펼쳐지는 진선미를 경험하며 하나님께 노래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 곧 인간과 자연 체계 등을 통해서도 거룩한 뜻을 펼치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에 따르면, 기독교적 관점에서 자연법은 자연으로부터(from Nature) 기원하는 법칙이 아니라 자연 위에(upon Nature) 부과된 법칙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은 위로는 궁창과 아래로는 대지에도 있으며, 이 세계는 이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 이 계명들은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체와 동맥과 정맥을 통하여 흐르는 피와, 호흡기관인 우리의 허파에도 하나님의 계명이 주어져 있다(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96). 이런 맥락에서 경외의 성향이 인간과 창조 세계 속에 진선미를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창조자가 설계한 자연법의 응징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이 설계한 실정법을 위반하면 법의 심판을 받지만, 자연법을 위반하거나 무시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경외의 성향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충만하게 하나님을 예배할 뿐 아니라 창조 세계의 진선미를 더 충만하게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진선미와 신적인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경외의 성향은 신적 신비를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창조 세계 안에서 진선미를 바르게 향유해 내는 힘으로도 작용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경외의 성향은 창조 세계의 신적 진선미 안에서 인식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축하하고 노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힘으로도 작용한다. 바로 경외의 성향은 창조 세계 안에서 진선미를 축하하며 경험하게 하는 힘으로도 작용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곧 신적 신비 자체를 사랑하는 것과 진선미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엄격하게 분리될 수 없는 특징이 있다.
깊은 차원에서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 때문에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이다(롬 12:1-2).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직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장사하는 사람, 소매상인, 식당에서 밥을 짓는 사람, 제과점에서 빵을 만드는 사람들의 일상적 아름다움을 경시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극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바른 경외의 성향이 아니다. 경외는 세상을 외면하는 성향이 아니다. 오히려 경외의 성향은 일상 안에서 드러나는 신적 진선미를 통해 자란다.
무엇보다 경외 성향은 신적 신비의 아름다움을 먹고 자란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신적 현현인 사람들과 창조 세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우리가 신적 현현인 사람들과 창조 세계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신적 신비의 육화된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경외의 성향은 육화된 아름다움을 축소하거나 빈곤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풍요롭게 경험하게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신적 현현 또는 진선미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과 창조 세계를 통해 드러내는 진선미를 축소하거나 위협하는 분이 아님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렇게 되게 하시는 과정이 인간을 혼란스럽게 할지라도, 신적 신비의 계시와 은혜는 모호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오직 영의 세계를 내세워 창조 세계의 진선미를 무시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분별하게 하시고,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진선미를 기준으로 영의 세계와 아름다움을 알아보게 하신다. 우리는 신적 현현을 통해서도 경외의 성향을 길러 가야 할 뿐만 아니라 감사와 기쁨을 회복하는 것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