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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목 교부들이 교회 금식에 답하다
분류 성경과 신학
작성자 전체관리자 작성일 2024-05-29
첨부파일
교부들이 교회 금식에 답하다
by 최창국 2024-05-29

한국 교회는 금식을 물만 먹고 하는 것으로 흔히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반드시 금식은 물만 먹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경에는 단지 물만 먹고 하는 절식 형태의 금식보다는 어떤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고 하는 부분 금식과 큰 위기 가운데 주로 했던 절대 금식이 소개되고 있다. 먼저 고기 등과 같은 음식을 먹지 않고 한 부분 금식이다. 대표적인 예가 다니엘이다(단 10:1-3). 다니엘은 주로 부분 금식을 하였다. 그때 그는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었다. 다니엘이 고기를 먹지 않고 부분 금식을 주로 하게 된 이유는 바벨론의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믿음의 표시이기도 했다. 

 

성경에는 절대 금식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에스더이다.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 때 하만이 유대 민족을 말살하려는 계략을 세웠다. 유대인으로서 왕후가 된 에스더는 민족의 수난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수산에 있던 유대인들과 더불어 사흘간 음식을 먹지 않고 금식 기도를 하였다. 에스더는 민족의 위기 앞에서 모든 음식을 먹지 않고 생명을 걸고 절대 금식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와 함께 절대 금식을 한 유대 백성에게 응답하셔서 모든 위기와 상황을 바꾸어 유대 민족이 생존하도록 반전의 역사를 이루셨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물만 먹고 하는 금식보다는 부분 금식이 주로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한 예가 있다. 어느 날 “교부 요셉이 교부 포에멘에게 물었다. ‘금식은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포에멘이 대답하였다. ‘내 경험으로는 매일 먹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족하지 않기 위해서 단지 조금씩만 먹는 것이 좋다’”(Benedicta Ward, ed., The Sayings of the Desert Fathers, 144). 교부들은 음식을 전혀 먹지 않는 금식보다는 평소보다 음식의 양을 줄여서 조금씩만 먹는 금욕적인 금식이나 어떤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부분 금식을 하였다. 

 

현대 사회에서 금식은 더 넓은 의미에서 이해되고 실천할 수 있다. 금식은 단지 음식을 먹지 않는 것뿐 아니라 그 밖의 다른 것까지도 모두 절제하는 의미에서 금식을 실천할 수 있다. 절제란 인생의 즐거움을 모두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달라스 윌라드가 지적했듯이, “우리가 세상적인 것을 즐거워하고 그것에 빠져 있으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만큼이나 그 즐거움을 피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Dallas Willard, The Spirit of the Discipline, 180). 절제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올바르게 즐기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대신 자연의 소리를 듣거나 침묵을 지키는 것도 현대적인 의미에서 금식의 형태가 될 수 있다. 또한 육체의 건강에 열중하며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이 밖에도 이 기간에는 옷을 사는 것을 절제하는 ‘옷 금식’도 실천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절제를 통해서 금식은 다양하게 실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금식의 중요한 목적이 금식을 통해 절약한 물질을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함이었다는 점이다. 초대 교회와 교부들의 금식은 거룩한 삶을 위한 실천이었을 뿐 아니라 이웃 사랑을 위한 것이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를 위해 헌금할 형편이 안 되면, 금식을 통해 절약한 양식을 헌물로 드려 이웃 사랑을 실천하였다. 로마 사회에서 기독교 부흥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려고 애썼던 율리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자기들뿐만 아니라 우리까지도 도와주는 것을 볼 때 참 부끄럽다”라고 할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열심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약자를 돌보고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우리의 모습은 많은 우리 반대자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브랜드다”라고 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36에서 인용). 

 

금식은 교회 공동체의 매우 중요한 영적 실천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금식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금식의 실천이 약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금식은 물만 먹고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물만 먹고 하는 금식은 모든 성도가 참여하기 어렵고, 특히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 부담을 느낄 수 있지만, 부분 금식은 모든 성도가 참여할 수 있다. 성경과 교회 역사에서 실천되었던 부분 금식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교회력에 따라 부분 금식을 통한 물질 나눔과 이웃 사랑 실천은 절기의 정신을 실천하는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에 적게는 1주, 많게는 4주 정도 부분 금식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문화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절기별 금식을 실천할 때, 성도들의 부분 금식이 시작되기 전에 구체적인 실천 계획, 방법, 목적을 제시해야 한다. 이때 교회는 금식해서는 안 되는 상황 가운데 있는 성도는 금식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한다. 부분 금식 기간에는 평소 음식 비용의 절반 정도를 절약하는 데 목표를 둔다. 예를 들면, 부분 금식 기간에는 고기와 기호 식품을 먹지 않거나 평소 먹던 것의 반절만 먹으며 하는 것이 좋을 수 있다. 금식을 통해 절약한 돈을 교회의 일반 재정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교회는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성도들의 추천을 받아, 명단은 익명으로 작성하고, 익명으로 작성된 명단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상황을 간략하게 작성하여 부분 금식이 시작되기 전에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다. 성도들이 부분 금식 기간에 익명으로 작성된 명단과 도움이 필요한 내용을 보며 부분 금식에 참여하도록 하면 좋다. 부분 금식 기간이 끝나면 성도들이 금식하면서 돕고 싶거나 사랑을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 사람의 익명을 헌금 봉투에 써서 절약한 돈과 함께 절기별 주일에 헌금함에 넣도록 한다. 이때 돕고 싶은 대상 후보를 세 명 정도 쓰도록 하여 교회는 한 사람에게만 도움이 집중되지 않도록 분배하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 좋다. 또는 부분 금식하면서 직접 대면하여 사랑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는 절약한 돈으로 식사를 직접 대접하며 절약한 금액을 직접 전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식사를 대접할 때는 대접을 받는 당사자만 알도록 조용히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고난주간의 부분 금식은 의미 있는 실천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와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 고난받고 죽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실천적인 방법으로 부분 금식을 하고, 그 금식을 통해 절약한 물질을 교회 안팎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중요하다. 교회 공동체가 교회력에 따라 이렇게 부분 금식과 함께 사랑을 실천하면 더욱더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많은 유익과 기쁨을 얻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추수감사절도 부분 금식을 하며 지키면 더 의미 있는 절기가 될 수 있다. 추수감사절에 감사에 대한 설교와 헌금, 과일과 곡식을 드리는 것으로 마치는 교회가 많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역사적 의미와 목적은 과거를 기억하고(신 16:12),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모든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는(신 16:11)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축제의 절기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생각하며 감사하고(신 16:10), 성경에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녀를 위한 실물 교육의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드려서 그 물질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함께 나누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신 16:11). 

 

교회가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가르침과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감사절 설교와 헌금만을 드리는 절기로 지키기보다는 실천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추수감사절도 부분 금식과 함께 실천하면 뜻깊은 절기가 될 수 있다. 성도들이 추수감사절 약 두 주 전에 부분 금식을 시작하여 절약한 물질을 헌금으로 드려서, 그 헌금을 특별히 가난한 이웃과 과부와 고아와 함께 나누면 더 의미 깊은 성경적 절기가 될 수 있다. 특히 물질적으로 자립한 교회가 추수감사절 헌금을 일반 재정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추수감사절 헌금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성도와 이웃을 위한 축제를 위해 쓰는 것이 더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