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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목 한국에서 팀 켈러를 기억하는 방식
분류 이슈
작성자 전체관리자 작성일 2024-05-27
첨부파일
한국에서 팀 켈러를 기억하는 방식
by 김선일 2024-05-27

팀 켈러, 1950.9.23. - 2023.5.19.    

팀 켈러의 책을 읽다 보면 이따금 한국을 언급하는 대목을 볼 수 있다. 한국 교회의 성장이나 영향력은 현대 기독교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소재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내가 팀 켈러의 한국 교회 언급에서 흥미롭게 보는 이유는 그의 한국 인용이 문화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적용하고 표현할 것인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적극적인 상황화에 관해 얘기하면서 한국 교회를 언급한다. 그의 스승이자 친구였고, 한국에서 선교사로도 사역했던 하비 칸(Harvie Conn, 한국명: 간하배) 교수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하비 칸은 총신과 고신에서 선교학을 가르치면서 기지촌의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했으며, 한국어로 강의와 저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문화와 언어를 깊이 이해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출신인 그는 한국의 신학교에서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강의하면서 한국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서구의 상황에서 형성된 정통 신앙고백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한국의 문화 속에서 재성찰할 것을 주문했다. 예를 들어, 장로교단에서 교리문답을 위해 늘 배우고 외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7세기 영국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한국 상황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조상이나 부모 및 조부모를 어떻게 섬길 것인지는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선교사 하비 칸이 보기에 한국 문화에서 가족에 대한 존중과 조상에 대한 태도는 서양의 기독교 문화에서는 유례를 볼 수 없는 특별하고 중요한 내용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의식할 수 없던 이 주제는 한국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원하는 이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정통 보수신학을 가르치는 미국의 선교사 하비 칸은 한국인들이 이러한 상황화 작업을 하지 않고, 권위와 가족에 대한 사회 문화적 관점을 성경적으로 깊이 성찰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실태를 지적한다고 켈러는 인용한다(센터처치, 258).

 

켈러가 한국의 사례를 들어서 강조하는 것은 진정한 복음 사역을 하려면 서구에서 만든 교리 체계와 내용을 답습만 하지 말고 자기의 문화에서 그 복음이 어떻게 해석되고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각 문화에서 제기하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새롭게 변주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서구 교회와 신학에서는 대면하지 못했던 성경의 새로운 진리들을 조명하며 복음을 더욱 풍성하게 될 것이다.

 

같은 책에서 켈러는 또 다른 한국의 사례를 든다. 그것은 한국의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던 선교사와 나눈 이야기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누구라고 밝히지 않지만, 앞선 사례를 전한 동일 인물인 하비 칸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기지촌 여성들에게 사역하면서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고뇌했던 사실을 헤아릴 때 그렇다. 켈러는 이렇게 전한다. 

 

나는 몇 년 전 한국에서 윤락녀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던 한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그 사회 여성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생각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자기혐오는 매우 심각했다. 선교사가 아무리 많이 예수님의 용서 이야기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구절들을 가르쳐도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그 장로교 선교사는 혁신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그들 비기독교인 아시아 윤락녀들에게 예정 교리를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센터처치, 267-268)

 

이 사례는 문화 속에서 복음을 변증하는 구체적인 전략을 제안하면서 거론됐다. 팀 켈러는 ‘ A-B 교리’와 ‘A-B 신념’의 구도를 변증 방법으로 제시한다. A 교리와 B 교리는 정통 기독교 교리이다. A 신념과 B 신념은 A 교리와 B 교리에 상응하는 문화적 신념이다. A 교리와 A 신념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 반면 B 교리와 B 신념은 서로 대립한다. 하지만 B 교리는 A 교리로부터 도출되고, B 신념은 A 신념으로부터 도출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문화적 신념의 일부와는 조화를 이루지만, 또 다른 일부와는 대립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독교가 특정 문화의 모든 면과 조화를 이루거나, 특정 문화의 모든 면과 대립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과 문화적 신념 사이에 공유되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타락한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기독교 신앙과 대립하는 측면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효과적인 기독교 변증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해서, 한편으로는 문화와 공감(조화)을 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에 반박(대립)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을 찾는 아덴 사람들의 종교성(A 신념)을 존중하며,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A 교리)을 전했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거나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신(B 신념)이 아니라, 만민과 만물을 친히 주관하시는 분(B 교리)이었다. 그러면서 아덴 사람들의 우상숭배를 질책하며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B 교리). 

 

켈러는 이러한 A-B 교리와 신념을 한국의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사례로 설명한 것이다. 선교사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A 교리로 전하고자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인생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는 자책감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경험과 의식에서는 A 교리에 상응하는 A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 선교사는 A 교리를 바꾸는 전략을 취한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A 교리로 전한 것이다. 이 A 교리는 20세기 중반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문화에 익숙한 여성들에게 인간의 인생과 운명을 이끄는 더 큰 힘이 있다는 A 신념과 공명할 수 있었다. 켈러는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는 더 큰 존재에 대한 신념은 자율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서구인들에게는 A 신념은커녕, B 신념이나 C 신념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이 여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양육을 받지 못하거나 버림받았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들의 ‘팔자’로 여겼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운명이 더 크신 분의 손 안에 있다는 A 교리는 그들로 하여금 인생의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보게 한다. 자신들의 돌이킬 수 없는 허물과 죄(B 신념)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B 교리)을 통해 해결된 것이다. 

 

내가 위의 두 사례를 인용하는 것은 팀 켈러의 상황화와 변증 전략에 관한 통찰을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후 1년이 지난 이 시점에 그를 기억하는 많은 이야기 가운데 우리가 이 땅에서 그와 복음 사역의 동반자가 되는 진정한 방향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기 원하기 때문이다. 

 

켈러는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보수신앙의 목회자다. 많은 이들이 그의 복음 신학과 복음 부흥론에 열광한다. 종교와 복음을 예리하게 구분하며, 복음과 복음의 결과에 대한 그의 논리적 해명이 명쾌한 각성을 준다고도 한다. 켈러가 탁월하고 명료하게 복음을 설명하고 신앙의 중요한 핵심을 일깨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팀 켈러의 말과 글에만 몰두하여, ‘팀 켈러 가라사대’에 머문다면 정작 그가 제기한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문화에서 복음을 깊이 있게 접목하여 질문하고 씨름하는 대화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른바 ‘팀 켈러 사대주의’를 안일하게 즐기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팀 켈러에게 사유의 큰 빚을 지고 있기에, 종종 ‘팀 켈러 가라사대’가 튀어나온다. 하지만 켈러는 우리에게 복음이 문화와 만나는 넓은 지평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동역자이지, 우리를 대신해서 한국 문화에 대한 복음적 해답을 발굴해 주는 역할을 떠안지 않았다. 그가 우리에게 원한 것은 서구 정통신학의 교리 진술을 외우고 그들의 사역 모델을 복제하기보다 우리만의 질문을 발견하고 우리의 길을 찾는 것이었다. 그것이 한국에서 팀 켈러를 기억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