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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중학생도 중학생 수준의 설교를 듣지 않는다” | ||
| 분류 | 목회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0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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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도 중학생 수준의 설교를 듣지 않는다”
어느 중학생이 교회를 떠난 이유 by 이춘성2024-06-05
신학교에 입학하면, 교수님들로부터 고급 신학 수업을 듣는다. 설교학 시간에는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성경 주해의 중요성을 배우며, 교의학 시간에는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논리성을 학습한다. 실천 신학에서는 목회가 세속적 방법에 영향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성경 신학에서는 성경 언어와 각 권의 주제, 저자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성경의 고대 문화와 언어를 현대적인 해석학을 통해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현대 해석학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배운다. 그러나 졸업이 가까워지면, 교수님과 목사님들은 교회 현장으로 떠나는 졸업생들에게 설교는 중학생 수준으로 해야 청중이 이해할 수 있다고 당부한다.
설교가 현학적이고 이론에 치중해 이해하기 어렵다면, ‘설교를 중학생 수준으로 하라’는 당부는 분명 적절하다. 그만큼 쉽게 하라는 의미에서의 관용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실제로 중학생들에게 하듯 설교한다면 어떨까?
요즘 강단에서 행해지는 설교를 보면, ‘중학생 수준의 설교’를 상징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설교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들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워졌지만, 문제는 이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도 그런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학업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하며 실제 이유는 다르다. 이들이 말하기를, “목사님의 설교는 재미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유머를 적절히 활용하시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도 잘 아십니다.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이 만드는 수련회 홍보 영상은 정말 인기가 많습니다. 찬양도 좋습니다. 찬양을 인도하는 대학생과 청년들은 정말 멋집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면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일주일 동안 제 마음에 남아서 저에게 영향을 줘야 하는데, 듣고 나면 무엇을 들었는지, 성경 구절은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요즘의 중고등학생들과 초등학교 고학년생들의 과도한 선행학습에 대해서 비판한다. 입시로 인해 비정상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런 아이들에게 교회는 쉼과 회복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이들이 학원에서 선행학습으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정말 알고 있을까? 아이들은 문학과 비문학 지문을 10분 이상 집중해서 읽고, 그 내용의 주제를 빠르게 파악해서 질문의 답을 구석구석 숨겨진 지문 속에서 추론하고 찾는다. 윤리학, 철학, 과학, 의학, 사회학, 소설, 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을 미리 습득하지 못하면 시간 내에 풀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이 읽는 많은 지문의 바탕에 진화론, 진화 심리학, 진화 사회학이 깔려 있으며, 이를 심도 있게 이해해야만 문제를 풀 수 있다. 영어 공부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주제의 지문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해결할 수 있다. 심지어 한 EBS 현직 영어 강사는 최근 3월 전국 수능 모의고사 이후에, 학생들에게 영어 시험을 잘 보려면, 지문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문을 한글로 해석한 후 읽어보라는 조언을 했다. 이는 요즘 아이들이 접하고 있는 지문과 독서 수준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놀라운 사실은, 요즘 학생들이 이런 수준의 공부를 초등학교 때부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이를 단순한 선행학습으로만 여기며 비웃는다면, 우리 스스로가 생각을 바꿔야 할 때이다.
최근 플라톤 아카데미 재단에서 3명의 전문가가 책의 미래를 주제로 토론했다. 그중 한 서평 전문가는 한국 사람들이 1년에 평균 14.8권의 책을 읽는다고 주장했다. 더 놀라운 것은, 14.8권이라는 수치는 상위 20퍼센트가 끌어올린 평균이며, 나머지 80퍼센트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40대 이상에서 이 격차는 더욱 심해져, 80퍼센트가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입시 때문일지는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10대는 더 많이 책을 읽는다. 그렇기에 책조차 읽지 않는 사람들이 요즘 아이들의 문해력을 비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자녀 앞에서 1년 내내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나 때는” 하면서 이들의 문해력을 지적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교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들의 독서와 이해력은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는데, 어른들의 독서와 이해력은 오히려 뒤처지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 때 읽었던 신앙 서적, 책, 설교, 강의로 아이들보다 더 성경을 잘 이해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중학생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유치한 설교와 가벼운 웃음이 가득한 설교를 좋은 설교라고 칭찬한다. 부모들과 교회 중직자들은 설교자들에게 더 재미있는 설교를 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니 값싼 위로와 동정, 재미로만 채워진 설교는, 학교와 학원에서 배우는 지식을 통해 지적으로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고등학생들에게 신앙 안에서 아무런 갈등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이로 인해 우리의 아이들은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진 아들과 딸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어떤 거룩한 도전을 제공하고 있을까?
여러 사람을 이해시키고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강박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참선이나 탈출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최근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만남’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많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믿게 된 이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들이 믿게 된 이유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말씀하셨다. 이 ‘들을 귀’가 바로 깨달음, 즉 이해를 의미한다. 만남 자체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만남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교회를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만남은 많지만 깨달음은 드물다.
우리가 좋아하는 말인,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삶을 돌아보면, 삶을 변화시킨 것은 감동이 아니었다. 눈물 나는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하게 찾아온 깨달음이었다. 감동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고 사라지지만, 깨달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생생해진다. 계속해서 마음을 울리고, 변화와 행동을 촉구한다. 차가운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붙이려면 불쏘시개가 필요하다. 나뭇잎이나 신문지를 먼저 태워 불을 붙이고, 바람을 불어 화력을 높인다. 이렇게 지속하여 불을 공급하면,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장작에 불이 붙고, 그 불은 천천히 주변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러나 처음 불을 붙인 나뭇잎과 신문지는 모양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감동은 불쏘시개와 같다. 하지만 공간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오랫동안 천천히 타오르는 어른 팔뚝만 한 장작 덩어리이다. 장작 덩어리는 결코 쉽게 타지 않고, 쉽게 꺼지지도 않는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우리의 설교는 바로 이런 깨달음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자 선물이다. 목사는 이 일을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훈련받는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가 영적 스승이 되기보다는 엔터테이너가 되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청소년들이 이를 먼저 알아채고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사역자는 길을 제시하는 등대 같은 지도자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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