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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번역의 사명 | ||
| 분류 | 그리스도인의 삶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0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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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사명
by 양혜원 2024-06-19
육아, 살림, 번역으로 외출이 힘들던 때 잠시 페이스북으로 사회생활을 했더랬다. 그때 놀랐던 것이 수없이 들어오는 친구 신청이었다. 너무 신기해서 어떻게 나를 알고 친구 신청을 했냐고 메시지로 물으면 하나같이 내 번역서를 읽었다고 했다. 저자의 자리 옆에 없어도 그만인 것처럼 작은 폰트로 올라가는 이름이라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기억되고 있었구나, 하며 잠시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번역이라는 일의 특이함은 잘하면 잘할수록 그 일이 오히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메시지> 성경 번역으로 유명한 유진 피터슨은, 폴 트루니에의 강연에 참석했을 때 프랑스어-영어 통역으로 진행되는 강연이었지만 통역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강연을 들었던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통역가의 미덕으로 칭송했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좀 힘들다. 번역이나 통역의 존재를 못 느낄 만큼 일하는 것이 그 일의 탁월성의 기준이라면 그 기준에 따른 보상이나 대우가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보이지 않는 일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혹은 쉽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원어만 알면 누구나 쉽게 덤빌 수 있는 일이 번역이라고 생각하는지, 15년 동안은 전업으로 그리고 그 후로도 틈틈이 이 일을 해오고 있는 내게 이리저리 훈수를 두는 사람을 한 번씩 만나게 된다. 물론 내가 실수를 하지 않는다거나 흠 없는 수준으로 일을 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일이 번역가의 전문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한 고려 없이 치고 들어오는 말들이 좀 그렇다고 해야 하나. 학술 영역에서 내가 발표하는 논문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쉽게 못 하면서 왜 번역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도 운 좋게도 나는 비판보다는 감사의 말을 더 많이 들었고, 제법 저명한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번역서 같지 않고 마치 한글로 쓴 책처럼 읽힌다는 칭찬도 들었다. 감사 인사와 함께 보너스를 준 출판사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누렸던 이러한 대우는 상당 부분 기독교라는 환경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번역의 종교라 할만하다. 성경 하나만 있으면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이 개신교의 기본 신념인 만큼, 누구나 자기 언어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의 존재는 중요했고, 그것은 곧 번역을 의미했다. 하지만 번역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개입을 의미하기도 해서, 직접적 계시의 성격을 약화시키기도 한다. 이슬람 종교의 경우, 꾸란의 언어는 곧 신의 언어이고 따라서 번역된 꾸란은 온전한 꾸란으로 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는 번역된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공인된 번역 이외의 번역에 대해서는 인색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어권의 경우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Bible)만을 성경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국에서는 개역 성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이 성경들도 원래는 그 시대의 입말로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이루어진 번역이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은 고풍스러움 때문에 더 권위 있게 느껴지는 그 말들이 그 당시에는 현대어였던 셈이다.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할 때도 일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묵상할 수 있는 성경을 내놓는 것이 목적이었고, 한글 성경도, 당시에 식자들은 번역 없이도 한자어 성경을 읽을 수 있었기에 한글 번역이 오히려 성경의 권위를 침해한다고 반대하였지만, 일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이 필요했기에 한글 번역이 이루어졌다.
결국 성경 번역의 핵심은 모두에게 가 닿아야 한다는 것, 모두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이 <메시지> 성경의 번역에 착수했을 때도 같은 목적이었다. 말씀대로 살려면 먼저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시대가 달라지면 번역도 달라져야 한다. 영어권에서는 이미 2차 대전 무렵부터 몇백 년간 영어권의 개신교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었던 킹 제임스 성경이 성경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현장의 소리가 쌓이고 있었다. 전쟁의 힘든 시기에 성경을 통해 힘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려면 먼저 영어 해독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 후로 영어권에서는 여러 번역본이 등장했는데, 피터슨도 교회의 무기력함의 원인을 성경 언어와 현실 언어의 간극에서 찾았고, 갈라디아서를 필두로 신약 성경 번역을 먼저 낸 뒤 그로부터 약 10년에 걸쳐 구약까지 다 번역하였다.
킹 제임스 성경과 메시지 성경은 50여 명의 번역가가 참여한 공인된 번역(일명 흠정역)과 한 목사의 개인적 번역(일명 사번역)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둘 다 누군가의 의뢰(commission)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같다. 킹 제임스 성경은 영국의 제임스 1세의 의뢰로 이루어졌고, <메시지> 성경은 미국 네비게이토 출판사의 의뢰로 이루어졌다. 처음에 피터슨이 번역한 갈라디아서는 교회 내에서 성경 공부용으로 쓰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읽게 된 네비게이토 출판사 편집자가 그에게 성경 번역을 의뢰하면서 <메시지> 성경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실 성경 번역을 포함하여 모든 번역은 누군가의 의뢰로 이루어진다. 개인이 공부나 취미 삼아 할 수도 있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에게 읽히지 않는 번역은 번역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기 힘들다. 내가 이미 다 알아듣는 언어의 책을 번역하는 이유는 누군가의 의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어떠한 이유에서건 번역이 필요한 클라이언트가 일을 의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을 의뢰받은 사람은 의뢰한 사람의 요청에 따라 일을 한다는 것이 번역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당연히 클라이언트의 의뢰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다.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을 의뢰한 제임스 1세는 당시에 갈라져 있던 교회가 이 번역을 통해 화합되기를 바랐다. 즉, 번역으로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자신이 기대한 사회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메시지> 성경을 의뢰한 네비게이토 출판사는 미국 해병대 군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을 보급하기를 바랐고, <메시지> 성경 영어의 특징은 바로 이 독자를 염두에 둔 데서 비롯된다. 이처럼 번역은 단지 글을 글로 옮기는 일이 아니라, 의뢰자의 의도, 의뢰자가 염두에 둔 독자,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선 번역가의 줄다리기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줄다리기인 이유는 세 그룹이 각각 자기 나름의 이해관계를 가지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클라이언트는 독자들을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번역을 의뢰하기도 하지만, 독자가 이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감지하고 번역을 의뢰할 수도 있다. 그리고 독자는 출판된 번역을 읽거나 읽지 않는 선택으로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고 영향을 미친다. 그 사이에서 번역가는 자기 나름의 사명 의식 혹은 직업윤리를 발전시키는데, 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번역가의 임무(task)나 번역가의 윤리에 대한 논의는, 번역이 단지 출판 시장이나 의뢰인의 요구에 휘둘리는 일이 아니라, 글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지향해야 하는 더 큰 목적, 더 큰 그림이 있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클라이언트가 의뢰하지 않으면 번역이 존재하지 않고, 독자가 읽지 않으면 번역은 의미가 없기에, 번역가의 줄타기는 계속된다.
그런데 기독교 번역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클라이언트, 번역가, 독자 이 세 집단이 사실은 하나의 사명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성경 번역의 핵심은 결국 모두에게 가닿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래야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큰 전제는 같다. 그리고 내가 오랜 세월 번역해 온 기독교 서적의 목적도 같다. 성경을 보조하는 책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돕는 것이 기독교 서적의 역할이다.
그런데 국내에 출판되는 기독교 서적의 태반이 영어의 번역본이고, 그 영어 번역본이 매우 난해하다는 것이 내가 번역을 시작하게 된 계기이다. 원서로는 너무 쉽게 읽히는 책이 왜 한국어로 오면 이렇게 어려워지는 것일까. 내 나름대로 분석한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에 또 쓸 기회가 있겠지만, 피터슨이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성경을 현대 미국어로 번역했다면,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영미권의 기독교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아마도 그래서 번역서 같지 않게 읽힌다는 칭찬도 들은 것이리라.
하지만 번역의 표가 날 수밖에 없는 게 번역의 숙명이다. 시간, 공간, 문화, 언어, 역사 등을 넘어온 글에서 그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부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번역 투라는 말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번역서가 번역서 특유의 문체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번역서를 많이 읽은 사람은 이 번역 투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어투가 되어 마치 제3의 언어를 익힌 것처럼 난해한 번역도 소화하는 것을 보았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게 이런 것일까.
아니, 그것은 아마도 간절함의 힘일 것이다. 알고 싶다는 간절함. 답을 얻고 싶다는 간절함. 기독교 번역이 다른 번역과는 다른 사명이 있다면, 이 간절함에 가닿는 번역이 아닐까.
사실 무엇이 잘된 번역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번역 비평가의 눈에 비친 내 번역은 탐탁지 않은 번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난해해서야 오히려 복음 앞에 절망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번역이다. 나의 클라이언트도 독자도 모두 이 복음의 사명 때문에 책을 만들고 책을 읽는다. 예수님 앞에 몰려든 많은 사람의 간절함과 같은 간절함으로, 예수님 대신 책으로 남은 복된 소리를 듣기 위해 읽는다. 그러니 기독교 번역의 남다른 사명을 찾는다면 이 무리의 간절함에서 찾는 게 맞을 것 같다.
참고한 문헌
Burke, David G. Introduction to Translation That Openeth the Window: Reflections on the History and Legacy of the King James Bible. Edited by David G. Burke.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09.
Norton, David. Chapter 7 “Reputation and future.” In The King James Bible : A Short History From Tyndale to Toda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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