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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나, 여성, 정체성 찾기 | ||
| 분류 | 그리스도인의 삶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0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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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성, 정체성 찾기
여성과 남성이 함께 보면 좋을 영화 세 편 by 서나영 2024-06-17
태어나보니 여자였다. 부모와 두 자매도 내가 택한 사람은 없었으며, 생김새는 물론 가정의 경제 수준과 태어나서 자란 작은 동네도 그저 주어진 것이었다. 널찍한 곳을 찾아 뒹굴며 햇볕을 쬐기 위해 태어난 바다사자처럼,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처럼, 나는 한 사람으로 태어나 각기 다른 사람들 속에서 성장했다. 보수적인 교단의 목사 딸로, 자신의 꿈을 펼칠 것을 교육받으며, 아름답고 사랑받는 여성으로 믿음의 가정을 이룰 것으로 기대함을 먹고 자랐다.
가파른 사상 변화를 겪었던 한국에서 여성으로 성장한 삶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과 그리 큰 상관 없이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성경 통독을 시작했던 어린 시절부터 여러 질문을 써 놓았던 것이 기억난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여자가 아기를 낳았을 때 성별에 따라 정결하게 되는 기간에 차이가 있는 것일까? 왜 하나님께서는 흠 많고 많은 첩들을 거느리는 사사를 세우셨을까? 왜 하나님의 백성이 불량배들에게 자기 딸이나 첩을 내주는 것을 방관했는가? 등의 시시콜콜한 물음들 말이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타협하지 않으며 말씀 전체가 말하는 진리의 신비의 물결에 몸을 담그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남주 장편소설 제목처럼 82년생 김지영 시대를 지나 양성평등의 시대를 거쳐 다채로운 색깔의 페미니즘을 만나고 제3의 성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점점 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경의 진리와는 멀어지고 있었다. 게이 커플의 입양아를 위한 여성 대체용 보드라운 천 가죽 소파를 만드는 것을 과제로 내는 네덜란드의 한 아트스쿨, 점점 더 탁월해지는 명품 브랜드의 유니섹스 패션 디테일, 젠더 뉴트럴을 향해 가는 화장품 산업, 성 소수자 인권을 위한 내용 삽입이 필수가 되어 버린 공영 드라마와 TV 쇼들, 오늘을 사는 시간은 유독 기독교에게 잔혹하다.
돌이켜보니 세상 속의 많은 불편한 사상들은 오히려 교회를 살찌우는 먹거리였다. 한 명의 적이 있으면 비판으로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흔한 소녀들의 모임처럼, 세상과 틈이 벌어질수록 기독교는 더 견고한 정체성 가르쳤다. 나 또한 어린 시절, 페미니즘을 외치며 남자와 대항하는 드센 여성들을 보며 그들이 주님을 만나고 올바른 성경관을 갖도록 긍휼히 여기며 기도했고, 문신을 하거나 피어싱으로 몸을 해치는 장식을 한 여성들을 보며 나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은밀히 확인했었다. 그들과 나의 건널 수 없는 차이점에 안심하면서, 오직 나는 깨어지고 하나님만을 말하며 계시록에 마지막 승리의 찬양을 돌리는 군중 속에 내가 있기를 소망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순종적인, 말 없는 여성으로 사는 것에 위안받으며, 정체성이 분명해지기만을 기다렸었다.
여성으로 태어나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의 가르침에 감사로 순응하며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하는 ‘출산하는 일 외에’ 쓰임 받은 여성들을 기억한다. 뛰어난 미모로 민족 구원에 쓰임받은 에스더처럼 되기를, 혼란의 시대에 사사 드보라처럼 능력의 리더로 쓰임받기를, 보아스를 만난 룻처럼 가련한 운명이 바뀌기를, 남편보다 이름이 앞서서 소개되는 헌신의 아이콘 브리스길라가 되기를 꿈꿔보기도 한다.
사실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젊은 세대일수록 성경의 문화적 코드를 현실과 연결하지 않으며 사회적 여성 차별에 아파하고 자주 분노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만난 젊은 여성들이 포기하지 않는 우선적 정체성은 ‘사회가 주는 직업’이다. 아이를 키우며 일어날 경력 단절을 가장 두려워하고, 직접 키울 수 없는 아이의 정서 불안정을 걱정하다가 아예 아기를 낳지 않겠다고 결단하기도 한다. 남자와 차이 나는 직급과 봉급에 분노하며 평등에 목말라하던 움직임의 결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비혼주의와 낙태, 저출산, 자살 등 수많은 생명 문제는 여성들의 반란과 많은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을 지키며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심한 가치관의 분열 과정을 겪을 뿐이다. 이 이슈는 신앙의 깊이와는 상관이 없다. 대한민국 남성이 군 복무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현대를 사는 여성은 피해 갈 수 없는 아픈 결단의 시간을 반드시 마주한다.
시대를 가장 먼저 투영하는 예술의 세계에서는, 페미니즘과 평등을 위해 탁월한 작품들을 쏟아져나왔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강렬한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여성으로서 그녀가 당한 상처와 아픔이 어떤 것인지 공감하게 된다. 아이들의 성장 교과서와도 같은 디즈니도 “겨울왕국”이라는 영화를 통해 ‘여성이 남성의 도움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대서사를 그렸다. 우리 눈을 들어 보는 모든 곳에 순수미술과 음악은 물론, 문학, 공연예술, 건축, 패브릭아트, 디자인, 영상예술을 통틀어 이 시대를 고발하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수많은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직 기독교 세계관으로 여성에게 용기를 주고 성경적으로 여성성을 설득할 수 있는 의도된 탁월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적들의 반격을 먹고 사는 개신교의 조심스러운 행보는 여성을 위한 용기를 낼 동기가 없을 것이다. 나는 오늘 그리스도인 여성으로서 용기를 내어 여성과 남성이 함께 보면 좋을 영화 세 편을 나의 감상평과 함께 소개하려 한다.
첫 번째 영화는 에이드리엔 셀리(Adrienne Shelly)라는 여성 감독의 영화, ‘웨이트리스’(2007)이다. 폭력적 남편에게 갈취당하며 파이 가게에서 웨이트리스로 살아가는 한 여인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꿈과 사랑을 깨닫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원하지 않던 남편의 아이였지만, 주인공은 새 생명을 맞이한 기쁨으로 삶의 방향을 다시 결단하고 사랑의 삶으로의 전환에 성공한다.
나에게도 아기를 출산한 일은 기적의 사건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느꼈는데, 하나님은 진실로 생명이셨다.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의 에너지는 허공을 떠다니는 공상이나 실체가 없는 망상이 아니라, 눈코입과 귀가 달리고 보드라운 피부와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는 실제 사람으로 내 앞에 실현되었다. 그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그토록 소중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하찮은 자리에 거할지라도 ‘인간은 인간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에너지와 사랑으로 우리는 각자 그렇게 위대하게 탄생했다는 것을, 직접 출산을 하고 젖을 물려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사랑이 실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닌 그토록 소중한 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작품을 통해 생명의 신비와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두 번째 영화는 안소니 파비안(Anthony Fabian) 감독의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2022)라는 작품이다. 1957년 런던에서 파출부로 일하며 참전한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한 여인이 어느새 할머니가 되었다. 뒤늦게 남편의 죽음을 통보받고 인생의 목표를 잃을 즈음, 가정부로 일하던 집 주인의 아름다운 명품 드레스를 보게 된다. 꿈과 목표를 정하고 돈을 모아 파리에 가서 아름다운 드레스를 얻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무시당하고 청소와 재봉 일을 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늙은 여성의 스토리이다.
오늘날 비혼주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공통적 특징이 있는데, 헌신과 희생에 대한 마음의 준비조차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더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고 돕는 일은 하찮아 보일 뿐 아니라 실제로도 자괴감이 오는 노동일 수 있다. 출산과 육아를 포함해 반복해서 오랫동안 해도 티 나지 않는 집안일의 고충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며, 몸이 망가져 가도 위로해 주는 이 없고, 수익이 있는 일도 아니며, 고단한 하루에 관심을 가지고 안부를 묻는 사람이 없어 외롭다. 가사 노동은 대부분 노예에게 시켜 온 세계의 역사는 가정일의 하찮음을 확인시켜 준다.
누구나 좋은 옷을 입고 높은 자리에서 섬김을 받고 싶어 한다. 어쩌면 그 삶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쓰나미와 같은 흐름에 올라타 경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섬겨본 사람은 안다. 섬김을 받는 사람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타성에 젖어 인격 회생이 불가할 수도 있다는 것을, 교만으로 성령의 음성을 절대로 듣지 못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노동자 출신 고대 스토아 철학자 클레안테스(Cleanthes, B.C. 330?-230?)는 “하인이야말로 철학자에게 완벽한 직업”이라고 말했다. 스토아학파가 목숨처럼 지키던 덕과 신의는 섬김의 자리에서만 터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섬기는 자리가 복되다. 여성이 ‘돕는 배필’로 지어졌다면 나는 분명코 더 복된 자리라고 확신한다. 낮은 자리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은혜가 얼마나 달콤한지는 경험하지 않으면 모른다. 이 영화는 ‘인자는 섬기기 위해서 왔다’(마 20:28)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꿈꾸는 영화라고 하기에는 더 깊은 메시지가 있는데, 섬김의 자세의 아름다움이다. 섬김과 희생이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한 유일한 길임을(마 23:11) 가상으로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은 예술뿐이다.
마지막 작품은 에이슬링 월시(Aisling Walsh) 감독의 ‘내사랑 모드’(2016)이다. 이 작품은 캐나다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국민 화가 모드 루이스(Maud Kathleen Lewis, 1903-1970)의 생애를 기록한 책을 각본으로 엮어 만든 작품이다. 류마티스성관절염을 심하게 앓아 평생 거동이 불편했던 한 여자가, 괴팍하고 외로웠던 에버렛이라는 남자를 만나며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화가로의 꿈을 이뤄간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실화를 담았다.
부부의 본질은 우정을 바탕으로 한 친밀함이며 사랑이다. ‘친구’란 같은 주제의 관심사로 끊임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딱히 목적이 없어도 만나고, 그저 대화와 함께 있는 시간을 목적으로 교제한다. 유일하게 친구를 위해 아프고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관계이며, 이해관계가 아닌 자연스러운 관계다. 실용적일 필요도 거래할 필요도 없으며, 무엇인가를 원하거나 그 관계로 인해 아무런 이득이 없어도 함께하는 것이 친구다.
나는 모드와 에버렛의 서투른 우정 쌓기 과정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이 있기까지 겪은 많은 내적 갈등과 실수와 어려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도하고 예배해도 때로는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시고, 나를 보호해 주지 않을 때도 있으셨다. 때로는 힘들어 신음하는 나에게 위로가 아니라 따끔한 일침을 주기도 하셨으며, 너무 내 마음을 몰라주실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나와 함께해 주셨고 친구가 되어 주셨다. 나 또한 하나님과 같은 관심사로 대화하기 위해 어렵고 아픈 이들을 위해 중보하기 시작했고, 모든 희망이 사라져 절망뿐인 날도 하나님과 함께라는 것만은 붙잡고 싶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만 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여성과 남성, 낮은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외치고 싶은 단 한 가지는 이것이다. 그리스도인 여성이라는 거대 무리에 자신을 숨기지 말고, 개신교 교인이라는 틀에 숨어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선 고귀한 인간으로 그의 영과 교제하는 것만이 인간이 누구인지 아는 방법이다.
나와 친구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이름으로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나를 지으신 이와 매일 나누는 대화를 최우선으로 사모해 보는 것은 어떨까? 각자 있는 모든 자리에서 구원의 감격을 잃지 않을 방법이 무엇일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최선을 줄 수 있는지, 그래서 그 삶이 한 뼘이라도 풍성해지도록 힘을 줄 수 있는지, 그런 질문에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떨까? 고통의 자리든 기쁨의 자리든 중요하지 않다. 나를 지으신 이과 함께 진짜로 사는 꿈을 꾸자. Soli Deo gl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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