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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목 다른 길, 다른 풍경
분류 그리스도인의 삶
작성자 전체관리자 작성일 202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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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길, 다른 풍경
by 양혜원 2024-07-16

얼마 전 이사를 했다. 원래 살던 곳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동네이니 그리 멀리 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교통 루트에는 차이가 있어서 평소와는 다른 버스를 타고 출근을 시도해 보았다. 도심을 뚫고 가던 평소의 길과 달리 한강 변을 따라 달리니 그 기분이 새로웠다. 같은 출근지이건만 어쩐지 다른 데로 가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길이 달라지니 보이는 게 달랐다. 

 

한국어로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라고 번역된 Great Divorce의 서문에서 저자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어느 길로 가든 돌고 돌다 보면 결국 다 같은 곳에서 만나진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자신이 보기에 길이란 언제나 포크처럼 갈라지고 거기에서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점점 더 벌어져서 결국은 만날 수 없다고. 나는 이 책의 내용보다도 오히려 이 문장 하나가 더 깊이 뇌리에 박혔고, 훗날 공부하게 된 여성학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도 아주 적절한 유비가 되었다. 

 

왜냐하면 여성학과 기독교 또한 어딘가에서는 만나게 되는 길이 아니라, 서로 포크처럼 갈라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와 여성학이 천국과 지옥처럼 갈라진다는 말은 아니다. 이 유비는 어디까지나 길이 갈린다는 그 현상에 대한 것일 뿐, 한쪽은 천국으로 향하고 다른 한쪽은 지옥으로 향한다는 그런 뜻은 아님을 밝혀둔다. 

 

여성학의 길을 처음 밟아본 것은 약 25년 전이다. 여성학 석사 과정이 그 시작이었는데, 그 당시의 필요를 따라 시작한 공부였지만, 그때부터 선택의 갈림길이 있으리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러니까, 여성학의 토대인 여성주의의 신념과 기독교의 신념은 서로 다른 길이라는 직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었으며, 그 선구자들을 중심으로 무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일단 그 무리의 끄트머리에 서서 관찰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를 완전히 수긍하지 못한 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석사 과정은 수료만 하고 끝을 내었다. 

 

그리고 한참 후, 또 다른 계기로 종교여성학이라는 분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기독교와 여성학의 길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 연구를 통해 내가 처음 가졌던 직감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여성주의의 길과 기독교의 길은 포크처럼 갈라지는 길이지 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길이 아니었다. 

 

참고로 종교여성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간략히 말하면, 여성학의 방법론으로 종교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 시작은 여성주의로 기독교를 뒤집으려는 일군의 학자들이었는데, 앞에서 말한 선구자들이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흐름이 바뀌었다. 종교 전통과 가치를 그대로 존중하면서 여성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비중 있게 자리 잡았고, 그러면서 여성주의로 종교를 뒤집으려는 사람과 자신의 종교 전통 안에서 여성 문제를 다루려는 사람들의 노선이 갈리게 되었다. 박사 과정 동안 이러한 흐름을 연구하면서 기독교의 가치와 전통 안에서 여성주의를 논하는 것과 여성주의로 기독교를 뒤집으려는 의도로 여성주의를 논하는 것의 차이를 제대로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공부를 마칠 무렵, 석사 과정을 시작할 때 가졌던 직감은 확신으로 자리 잡았고, 이처럼 체계적 연구와 학술적 근거로 뒷받침된 나의 여정이 마침 여성주의 논쟁에 휩쓸린 교회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나의 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가다, 그리고 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에 실린 나의 글  “‘패스메이커’ 세대, 여성을 말하다”를 참조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아주 크게 빗나갔다. 세상에서야 그렇다 쳐도, 교회에서도 사람들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나를 남자 편에 서 있는 반여성주의자로 몰았다. 이미 여성주의는 따라야 할 대전제가 되었고, 깨어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그 대전제에 따라 교회와 성경을 끼워 맞추기에 바빴다. 그리고 거기에 함께 몸을 실어 노를 젓지 않는 사람은 쉽게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내가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교회는 시대와 대세에 저항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시대와 대세를 따르지 못한다고, 교회가 교회를 나무라는 형국이 되었을까? 낯선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과 한목소리가 되어 교회를 때리지 않고 교회를 옹호한다고 교회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으니, 혼란도 이런 혼란이 있을까. 지금 내가 보는 이것이 무엇인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기를 3년여. 그동안 나는 여성학 연구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한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에서 연구교수로 일하면서 종교여성학 관점에서 여러 논문을 발표했고, 그 임기를 다할 무렵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에서 국제적으로 인지도 있는 여성학 영문 학술지를 편집하는 특임교수 자리를 제안받아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이처럼 나의 연구를 바탕으로 여성학 배경의 연구소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역으로 교회에서는 그렇게 시끄럽던 여성주의 이야기가 서해안에 바닷물 빠지듯이 쑥 들어가 버렸다. 그때 노 젓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신념으로 노를 젓고 있을까? 그때 그들을 움직인 동력과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혹 여성주의의 길과 기독교의 길이 포크처럼 갈라진다면서 어떻게 여성학과 관련된 일을 내가 계속하고 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마치 그리스도인은 과학을 할 수 없다거나, 그리스도인이 과학을 한다면 창조론을 해야 한다는 식의 환원론과 비슷하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과학도, 철학도, 그리고 여성학도 할 수 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친숙한 사람들로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그러한 과학자이고, 철학에서는 니콜라스 월터스토프가 있다. 이들은 기독교의 길에 서서 과학과 철학을 제대로 탐문했다. 

 

나아가 월터스토프는 기독교의 길에 선 것 자체가 하나의 입장이고 그것에 대해서 굳이 변호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철학을 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다른 과학자나 철학자는 자신이 어떤 입장에서 학문을 하는지 구구절절 변명하거나 설명할 필요 없이 하는데,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격 없는 사람에게 네가 어떻게 그런 것을 하느냐며 설명을 요구하는 격이다. 마치 어느 옛날에 여성을 향해 “당신은 여자인데 어떻게…”라며 설명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성학에서는 이것을 힘의 불균형에 의한 현상으로 보는데, 그리스도인 스스로 그런 열등감을 자처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어떻게든 기독교를 과학이나 여성학과 같은 학문에 끼워 맞추려 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기독교에 대한 우월감으로 과학도 여성학도 다 무시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길이 다르다는 것은 그 둘이 대화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길에서 과학이나 여성학을 할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나아가 과학이나 여성학의 학문적 발전이 사회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면 그 혜택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미친다. 그러나, 어느 길에 섰느냐에 따라서 갈림길이 올 때마다 선택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성학과 기독교의 예를 들어보면, 일반적으로 이혼과 동성애 등의 문제에서 이 두 길이 가장 첨예하고 갈린다고 생각하고, 이에 반대하는 기독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즉 여성을 억압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놓치는 중요한 질문은 왜 여성주의가 이혼과 동성애를 지지하느냐이다. 이혼과 동성애 자체는 우리 삶의 현실이고 현상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혼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동성애자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허용과 비허용과 같은 당위의 문제가 될 때는 그렇게 만드는 근거, 즉 각자의 길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궁극적 지향 혹은 목적이 있다. 

 

여기에서 길게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간단히 설명하면, 여성주의는 이 세상 문제의 근원이 가부장제에 있다고 진단한다. 쉽게 말해, 이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 하고 질문할 때, 가장 핵심적으로 나오는 답이 가부장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부장제란 (생물학적 남성이고 이성애자인) 아버지가 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제도이다. 이 제도가 차별과 폭력으로 여성을 억압했고, 나아가 세상의 모든 약자를 억압하고 있다고 여성주의는 진단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정치적 행동으로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여성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은 정치이고,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이 세상 문제의 근원이 죄에 있다고 진단한다. 죄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이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 하는 질문에 대한 기독교의 답변은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정치 이상의 힘, 즉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본다.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할 때 기독교가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이유는 궁극적 해결의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고, 인간의 가장 중요한 실천으로 사랑을 제시한다. 물론 정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가 전부는 아니며, 인간의 정치는 늘 인간의 한계에 도달한다고 기독교는 믿는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 중에 별별 이상하고 나쁜 인간이 다 있어도, 기독교의 이 기본 신념과 원칙은 변하지 않고 2천 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찌어찌 돌고 돌아 여성주의의 길이 기독교의 길과 만난다는 주장은 그냥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앞뒤가 영 맞지 않는다. 현상적으로 비슷해 보이는 면이 있겠지만, 각자가 선 길은 분명히 다르다. 물론, 다른 세상 학문이 인간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처럼, 여성학도 인간 이해, 특히 남녀의 불평등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하지만 갈림길은 오게 되어 있다.

 

무엇이 그 갈림길이 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박사 과정을 시작할 때 나는 여성주의의 길을 계속 갈 가능성을 열어두었었다. 그러나 연구를 하면서 인간과 사회의 문제에 대응하는 데에 있어서 여성주의의 자원은 기독교의 자원에 비해 매우 제한적임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합리적인 근거에 따라 기독교의 길에 서기로 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리 복잡한 문제도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을 사랑하라고 했지, 신뢰하라고 하지 않았다.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신뢰는 오직 하나님께 있을 뿐. 그러나 여성학을 포함하여 세상 모든 학문과 정치는 인간을 지극히 신뢰한다. 교회의 많은 문제도 인간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데서 비롯되지 않을까. 하지만 신뢰하지 않고 사랑하기란 참 힘들다. 기독교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이유도 바로 그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랑은 아무나 보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신념도 이념도 없이 믿을 것은 통장 잔고밖에 없고, 누구나 바짝 벌어 신나게 쓰는 것이 꿈이 되어 버린 시대에, 이런 사랑은 참 허무맹랑하다. 만약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면, 그 이유는 다른 것도 아닌, 바로 이 허무맹랑함 때문이 아닐까. 바울이 말한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위 때문인지, 시절 때문인지, 가만히 있어도 맥 빠지기 쉬운 요즘, 이 십자가의 은총을 나와 이웃에게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