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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나의 진리로 살리라: 개인화된 신앙 시대의 복음 | ||
| 분류 | 그리스도인의 삶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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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리로 살리라: 개인화된 신앙 시대의 복음
by Trevin Wax 2024-07-04
영적인 주제를 다루는 대화를 어쩌다 들을 때면 “나한테는/내 생각에는(For me)”이라는 두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 두 단어는 대화가 진실과 거짓에 관한 주장으로 바뀔 때는 곧장 등장한다. 예를 들어서, “나한테는, 아무래도 하나님을 믿는 게 옳은 거 같아서 말이야.” “내 경험에 비춰볼 때,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은 예수님이야.” 이 두 단어는 말하는 내용을 개인화시키고 상대화시킨다.
어떤 문제를 개인화하고 상대화하는 게 반드시 잘못은 아니다. 회의실에서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어떤 길로 갈지 따위의 질문에 “내가 생각하기에”라고 말하는 것은 주관적 의견의 공유를 의미한다. 상황에 따라서 당연히 허용될 수 있다.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되더라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이다.
그러나 대화가 하나님의 존재, 그리스도의 주장, 또는 복음의 진리로 옮겨갈 때 “나한테는, 내생각에는”을 덧붙인다면 문제가 된다. 진리와 거짓, 정통과 이단, 죄와 의의 영역에 관해서 우리는 단순히 내가 생각하기에 참된 주장을 펼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무언가 진짜를 말하고 있다. 잘못된 시점에 잘못된 방식으로 나오는 이 두 단어는 진리라는 주장을 약화한다. 진리 여부의 문제를 단지 사적 믿음의 문제로 만든다.
당연히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나의 진리를 “말하고” 또 그 진리에 입각하여 “사는 건” 매우 중요하다. 누군가가 “나의 진리를 말하겠습니다”라고 할 때, 그건 “내가 경험한 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하겠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종교와 영성에 관한 문제에서, “진리”라는 단어를 “나의” 또는 “너의”와 같은 형용사로 묶고 표현함으로 진정한 진리 주장을 회피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라는 성경의 명령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복음을 객관적이고 공개적으로 가닿을 수 있는 진리로 선포하라고 명한다. 우리가 복음을 나의 진리로 바꿀 때 복음은 여러 가지 가능한 선택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암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나는 이런 식의 사고 변화가 어떻게 발생했고 또 그것이 서구 기독교 선교에 어떤 도전을 주는지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복음을 전할 때, 오늘날 사람들이 대부분 느끼는 건 같은 취미 활동을 하자는 식의 초대 정도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 정도의 차원에서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은 언제나 개인화된 신앙 차원에서 그친다. 나는 단지 “나의” 진리를 말하거나 “나에게” 효과가 있는 종교적 정체성에 관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전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결코 개인의 취향이나 영성으로 축소될 수 없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택을 놓고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대결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그 선택은 언제나 복음을 나누는 데에 있어서 어려움을 안긴다.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나: 계몽주의의 영향
우리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보려면 계몽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계몽주의라는 철학적 전통은 인간의 이성을 역사의 정점으로 본다.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앞당기는 수단으로 과학과 기술의 구현을 꼽는다. 자주 인용되는 다음 구절에서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계몽주의 프로젝트를 정의한다.
계몽은 인간이 스스로 부과한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미성숙 상태 말이다. … 스스로 알려고 시도하라!(Sapere aude). 그러므로 “자신의 이해력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라”가 계몽의 모토이다.[1]
칸트에 따르면 인류의 문제는 의존적 무지, 즉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해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해결책은 독립적인 사고이다. 그 점에 주목하자. “자신의 이해력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라.” 의존적 무지의 길은 비겁하다. 대신 독립된 사고방식은 용감하다.
우리 사회에 미친 계몽주의의 영향을 이 글 하나에서 완전히 다룬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계몽주의로 인한 지식 추구가 가져다준 많은 이점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말 그대로 좋고 나쁜 게 뒤섞인 가방이다. 계몽주의 사고의 세 가지 측면이 우리 사회에 끼친 심오한 영향이 무엇인지, 나아가 복음 전파라는 사명을 수행하는 방식에까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 보자.
1. 인간 이성이 보편적 도덕의 기초로서 계시를 대체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모색한 것은 개인이 현 세계 너머, 초월적 현실에 의존하지 않는 채 도덕적 삶을 선택하고 장려하는 방법이었다. 하나님의 계시와 별개로 이성에 기초해서 도덕적 사회를 건설하는 게 가능할까? 그리고 그것이 문명 전반의 기초가 될 수 있을까?
1948년, 유엔이 발표한 세계인권선언은 사실상 계몽주의 사상의 결실이다. 인권의 기초로서 인류의 본질적인 존엄성을 선언한 서문과 조항마다 모든 문명에 대한 규범으로 제시된 도덕적 비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전은 하나님 또는 더 높은 차원의 힘에 호소하지 않는다. 이는 계몽주의 사상의 훌륭한 사례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자율적인 인간 이성(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이성)에 기초한 보편적 도덕 표준만을 열정적으로 추구한다. 누가 하나님이 필요한가?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성공하고, 도덕적이고, 행복하고, 성취하고, 덕이 있고, 또 …(원하는 것은 여기 빈칸에 다 넣으면 된다.)
2. 종교는 지식 성장의 장애물로 치부되었다.
하나님의 계시와 별개로 도덕성과 지식을 확립하려는 순간, 전통적인 종교적 신념은 외면의 대상이 된다. 기독교의 일부 도덕적 가르침에 대해서는 여전히 좋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교활한 미신과 신화로 치부되어 재조명된 종교에 의존하는 사회를 향해서는 도전해야만 한다. 계몽주의 학자 피터 게이(Peter Gay)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신화는 완전히 정복된 다음에야 공감을 주는 내용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정복 과정에서 신화는 적으로 간주되어야만 했다. … 계몽주의는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종교를 미신과 오류로 취급해야만 했다.[2]
오늘날 세속적인 환경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생각은 우리가 인간 지식의 더 높은 차원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종교와 초자연적 계시에 대한 모든 의존에서 돌아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의 쇠퇴가 계몽주의의 진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다.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세속성이 종교적 신앙의 꾸준한 침식의 결과로 도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신에 신앙이 더 이상 공리가 아닌, 즉 증명 없이도 참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아닌 것으로 세속성을 정의한다.[3] 세상이 변한 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광범위한 사람들이 불신앙을 합법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믿음이 더 이상 공리적이지 않게 되면, 이성과 과학은 종종 모든 종류의 논쟁에서 객관적인 심판관으로 달려들어 사실과 가치 사이의 분열을 초래한다. 가치는 주관적이며 도덕은 발명품이 된다. 한편, 과학은 객관적이며 팩트는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사적 신념과 가치로 축소되고, 개인적 신앙이 중요한 사람들만을 위한 일종의 하위문화로만 번성하게 된다. 대신에 인간 삶의 다른 영역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는 말할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종교는 이제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 그리고 친밀하고 중요한 문제로 축소된다. 결코 공공 광장에서 선포하는 무엇이 될 수 없다. 나에게 의미와 목적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종교가 여전히 “진리”일 수 있다. “내게는 진리”다. 그러나 객관적인 의미에서, 즉 우리 세계에 대한 진리라는 면에서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3. 유용성과 숙달이 인류의 새로운 목적이 되었다.
계몽주의 사상의 세 번째 특징은 도덕 이론의 기초에서 발견되는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인류에게서 텔로스 즉 공동의 목적이나 목표를 제거한 것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자연에 목적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더 많은 연구는 과학 법칙뿐만 아니라 도덕 법칙까지 발견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과학 실험이라는 의미에서, 도덕성이 ‘증명’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사회는 목적의식을 잃었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 미신, 종교, 시대에 뒤떨어진 도덕적 가르침, 공동체 형성, 그리고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하지만 우리는 왜 자유로운 걸까? 이렇게 살다가 뭐가 될 건데? 명확한 대답이 없다.
인류의 목적에 대한 감각을 잃은 사회에서 종교에는 무슨 일이 생길까? 사람들은 믿음을 전체적인 진리성 측면이 아니라 실행 가능성 내지 삶에 미치는 영향의 측면에서 보기 시작한다. 그래서 종교의 목적이 세상에 대한 진리의 파악이 아니라 단지 내 삶의 개선이라면, 당신은 이제 단지 유용성을 기준으로 종교를 판단해도 된다.
유용성에 대한 생각은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을 “통제 가능”하게 만들려는 현대 사회의 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통제 가능성은 독일의 철학자 하르트무트 로사(Hartmut Rosa)가 사용한 단어이다. 그는 세상을 통제하고자 하는 희망과 열망이야말로 현대 생활을 “주도하는 문화적 힘”이라고 믿는다. 세상을 통제하에 두기 위해 우리는 특별한 길을 따른다.
1. 세상을 가시화시킨다. 즉 알 수 있게 만들고,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지식을 확장한다.
2. 세상을 물리적으로 접근 가능하게 만든다.
3. 세상을 관리 가능하게 만든다.
4. 세상을 유용하게 만들고 활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4]
로사가 보는 것처럼, 일단 모든 수준에서 세상을 통제 가능하게(접근 가능, 관리 가능, 유용하게) 만드려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세상이 이해되고, 획득되고, 정복되고, 남용되는 일련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세상을 통제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세상의 경이로움을 죽여버린다. 우리는 막스 베버(Max Weber)가 “주술(disenchantment)”이라고 일컬은 경험으로 이끌려 들어간다.[5] 살아있음을 느끼는 경험, 진정으로 세상을 만나는 경험(로사가 공명이라고 불렀던 대상)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우리가 작업하는 세상은 이제 죽고 사라지며, 그 세상은 더 이상 우리를 불러내어 경이로움과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 아니다.
지배와 통제 가능성을 향한 경향은 세상을 보는 방식뿐만 아니라 종교적 신앙을 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종교를 유용성에 따라서 판단한다. 즉, 내 목적 달성에 종교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여부로 보는 것이다.
사유화된 종교가 주는 도전 검토하기
이 모든 사실이 오늘날 교회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환경 전반을 조사하면 우리의 사명과 전도에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요소를 인식할 수 있다.
1.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진짜 만남을 제시해야 한다.
주술에 빠진 세상에 대한 답이 주술에 빠진 교회가 될 수는 없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19세기와 20세기 신학적 자유주의의 접근방식이었다. 자유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의 신적 계시보다 낮은 것으로 축소했다. 성경을 하나님을 경험한 인간의 단순한 기록으로 축소함으로써 교회의 능력을 박탈했다.
그 결과를 요약한 리처드 니버의 말은 유명하다.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이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죄 없는 사람들을 심판 없는 왕국으로 데려가셨다.”[6]
우리가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교회가 신학적 자유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지난 세기에 걸쳐서 수많은 보수 복음주의자들이 실용주의로 전환했다는 사실이다. 그러자 초자연적 역사가 경시되고, 대신에 가장 실용적인 가르침이 자리를 잡았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이제 나의 가장 깊은 갈망을 충족시키는, 관리가 가능하고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 신으로 전락했다. 종종 초월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하는 모든 노력을 항상 축복하는 분이라는 점이다. 어떤 경우에는 복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도구화되기도 했다.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에 대한 정통 가르침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교회들조차도 우파를 위한 문화 전사이거나 좌파를 위한 심부름꾼 등 사회 활동을 위한 자발적인 연합에 지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접근방식과 반대로 나아가야 한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내세우는 것은 결코 더 나은 삶을 위한 프로그램도, 재정적 이득을 위한 좋은 조언도, 자녀 양육에 대한 건전한 접근방식도, 자녀 양육에 대한 도덕적 닻도,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거나 불의 근절을 위한 사회적 프로그램의 제시도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노력과 그 이상에 참여할 수 있지만, 결코 타협할 수 없는 한 가지 요소를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주어야 할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진짜 만남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목적은 내게 효과가 있는 뭔가를 나누는 게 아니다. 유일하고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세상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진짜이기 때문에, 강력한 개인적 체험으로 나타나며,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에 나라는 존재를 잃어버린다.
나의 욕망을 항상 인정하며 나의 모든 행동을 다 받아주는 신은 예배할 가치가 없다. 그런 신은 아첨하고 환심을 사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는, 실질적인 가치가 없는 비열한 지인과 같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직접 들어오셔서 우리와 진정한 관계를 맺으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 제시해야 할 하나님이다.
크리스토퍼 왓킨(Christopher Watkin)은 신화가 없다고 생각하는 신화가 바로 현대성의 신화라고 말했다. 주술 자체가 매혹일 수 있다. 그러므로 줄술을 경험한 세상이 필요로 하는 교회는 쇠퇴하는 문화의 목사가 아닌 선지자가 있는 교회이다. 하나님이 실재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확신으로 가득 찬 교회이다. 초월적 근원 대신 오로지 내재적 근원에서만 충만함을 찾으려는 교활한 시도를 폭로하는 교회이다. 그런 교회는 성경과 교리에 우선순위를 둔다. 왜냐하면 우리가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을 올바르게 예배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핵심 목표는 성능(workability)이 아니라 예배이다.
2. ‘효과가 있는 것’이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가 “참”인지 여부가 아니라 “효과가 있는지”를 물어온다면, 또는 느낌이 “좋은지” 물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놀라지 말아야 한다. 80년 전, C. S. 루이스는 실용주의를 향한 변화를 이렇게 말했다.
대중 강의에서 반복해서 깨달은 것이 있다. 기독교의 주장이 객관적으로 사실이기에 기독교를 추천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진실과 거짓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은 단지 위로가 될지, “영감을 줄지” 또는 사회적으로 유용한지를 알고 싶을 뿐이다.[7]
루이스 시대에도 사실이었던 것이 지금은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무엇이 효과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우리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선교 지역 토양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비그리스도인과의 초기 대화 대부분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아니다. 주로 그들의 삶이 어떤지,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고가 실행 가능한지, 또는 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전반적인 영향이 결코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 등이 주된 토론 내용이다.
하지만 이 출발점이 우리의 최종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루이스가 주장했듯이, 기독교에 대한 소개가 “효과 여부”의 측면에서 그치고 “진리”라는 질문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하나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게 된다. 단지 도덕적 삶을 위한 “좋은 조언”의 영역으로 전락시킨다. 그는 이렇게 썼다.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청중의 마음속에 진리에 대한 질문을 심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당신이 기독교를 권하는 이유를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토론을 하다 보면 그들은 매 순간 진리라는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것이다. … 따라서 당신은 계속해서 그들을 진짜 중요한 지점으로 되돌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 기독교가 거짓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고, 진리라면 무한한 중요성을 지닌 진술임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결코 기독교와 어울리지 않는 진술이 하나 있다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적당히 중요한 뭔가라는 점을 그들이 똑똑히 보도록 해야 한다.[8]
물론 루이스는 기독교가 단지 진리로 그치지 않는다고 단언할 것이다. 기독교는 좋고, 아름답고, 또 “효과가 있다.” 그는 영적인 이해를 하는 사람들과는 어디서든 만나서 기쁘게 대화했을 것이다. 만약에 서두에 꺼낸 기독교의 아름다움이나 선함에 대한 논의가 가장 의미가 있다면, 꼭 그 대화를 계속해서 나눠야 한다. 일단 효과가 있는 것부터 시작하라. 그러나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얼마든지 삶의 방식으로서의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가 사회와 문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논의하고 그 유산을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미루는 것은 현실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효과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진리이거나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때가 되면 명확하고 절실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3. 전도를 용감한 전복 행위로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
모험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를 갖고 대화를 시작했더라도,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도록 초대해야 한다.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사탄과 결별하고 자신의 모든 악행을 버리도록 호소해야 한다. 그러나 종교를 가치와 선호의 영역으로 격하시킨 오늘날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그런 대화는 거의 양심을 저버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한 전도가 대담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진정한 복음 선포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감히 말한다. 그리스도의 주장을 논할 때 우리는 나의 진리와 당신의 진리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전혀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 적용되는 공개 선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선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우상을 향해서 던지는 도끼이기에 강력하게 전복적이다. 어떤 우상인가?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내 개인의 주님이자 구원자, 우리 마음의 왕, 또는 우리를 돕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단 그분의 주권이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 모든 장소, 그리고 모든 시대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은 금지시킨다. 이 점에서 세상의 가치는 다원적이다. 세상이 우리가 주장하는 주인으로서의 예수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나를 위해”라는 그럴듯한 서문으로 전도 내용을 제한하려는 유혹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둘째, 강력한 형태의 전도는 또 다른 공격적인 주장을 내세우기 때문에 대담하다. 즉, 당신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살해에 연루되어 있고, 우리의 죄가 기록되어 있으며,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죄와 수치의 감옥에서 해방해 주실 열쇠를 쥐고 계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이다(롬 3:23). 모든 사람이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선포하는 현실에 직면하는 것은 전복적인 일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전도의 전복성을 다시 포착하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단지 나의 진리와 당신의 진리라는 영역에 있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에는 뭔가 모험적인 요소가 있다. 예수님은 만왕의 정당한 왕이시며 성경은 세상에 대한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
교회의 임무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사랑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관심을 놀라운 표현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의 선포 속에 담긴 부담스러운 특성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용기를 주셨다.
하나님은 내 장인처럼 소련 시대를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물리적 힘이나 사회적 배척의 위협 속에서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셨다. 지금도 그분은 아랍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닥칠지라도 증언할 수 있는 탄력성을 주신다. 2018년 12월에 체포되어 현재도 감옥에 있는 중국 가정교회 목사 왕이(Wang Yi)는 교회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과연 복음에 미쳤는지 스스로 시험해 보라. 복음을 위해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 당신은 정말로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실직 위험에 직면했을 때 당신이 지금까지 실제로 누구를 위해 일했는지 알 수 있다. 복음을 위해 재산과 지위를 잃을 때, 내가 돈에 미쳤는지 아니면 복음에 미쳤는지 알 수 있다.[9]
서구에 박해가 임박했다는 위협은 없지만, 증언에는 항상 비용이 따른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십자가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는 우리의 신실함이 십자가 모양을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고 싶다고 말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손과 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불꽃, 마찰, 불협화음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반대 앞에서도 우리는 그분이 자신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용기를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복음의 공적 진리를 포기한 채, 개인화되고 사유화된 신앙의 다원적 한계에 안주한다면, 우리는 결국 복음전도가 주는 모험과 기독교의 핵심을 잃을 것이다. 이제는 나의 진리로 사는 세상이라고? 아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 선포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제발 회개하고 좋은 소식을 믿으라.”
1. Kant, “What is Enlightenment?,” in Gay, Enlightenment Anthology (Simon & Schuster, 1973), 384.
2. Gay, Peter, The Enlightenment: An Interpretation: The Rise of Modern Paganism (Alfred A. Knopf, 1966), 37.
3. See Taylor’s essay, “Disenchantment-Reenchantment,” in Charles Taylor, Dilemmas and Connections: Selected Essays (Harvard University Press, 2011), 287-302.
4. Hartmut Rosa, The Uncontrollability of the World (Polity, 2020).
5. Max Weber, “Science as a vocation,” in From Max Weber: Essays in Sociology, ed. and trans. H. H. Gerth and C. Wright Mills (Routledge, 2009), 129.
6. H. Richard Niebuhr, The Kingdom of God in America (Wesleyan University Press, 1988), 193.
7. C. S. Lewis, “Modern Man and His Categories of Thought” (1946).
8. C. S. Lewis, “Christian Apologetics” (1945).
9. Wang Yi, “Twenty Ways Persecution is God’s Way to Shepherd Us,” Faithful Disobedience: Writings on Church and State from a Chinese House Movement, edited by Hannah Nation and J. D. Tseng, (InterVarsity Press, 2022), 176.
출처: ‘Live My Truth’: The Gospel in an Age of Privatized Fai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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