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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목 메타모더니즘 이해하기
분류 예술과 문화
작성자 전체관리자 작성일 202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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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모더니즘 이해하기
by Brett McCracken 2024-07-03

영화, 음악, TV, 캠퍼스 시위, 밈 문화, 그리고 틱톡과 같은 현대 대중 문화를 볼 때 “일관성 없음”이라는 말이 자주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왜 그토록 많은 것이 무작위적이고, 단절되고, 모순되게 보일까? 왜 하나같이 목적과 일관성 있는 논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공허하게만 느껴질까? 

 

그 답을 소셜 미디어에서 하나 찾을 수 있다. 소셜 미디어 고유의 변성된 무작위성이 정신분열적 문화 의식을 강력하게 형성했다. 우리는 스크롤을 통해 제공되는 소식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무작위로 하나씩, 일시적이며 빠르게 잊어버리는 이야기, 가벼운 즐거움과 가끔은 울림을 제공하지만, 거기에 결코 지속적 만족을 제공하는 고정된 내러티브는 없다. 한병철이 서사의 위기에서 말했듯이, 디지털 플랫폼은 “서사가 아닌 정보 미디어를 제공한다. … 사건으로부터 의미를 파생시키는 일관성은 이제 무의미한 나란히side-by-side와 연속의 연속one-after-the-other으로 바뀌었다.”

 

찰스 테일러의 “교차 압력” 개념도 이런 상황 설명에 도움을 준다. 현대인은 정보, 아이디어, 경험, 친밀감, 영적 탐구에 의해서 사방에서 포격을 받고 있으며, 이 모두가 그들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당연히, 교차 압력을 받는 삶의 경험(그리고 그로 인한 예술적 표현)은 어지럽고, 갈등하고, 일관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학자, 예술가, 비평가는 현재 진행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메타모더니즘metamodern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특히 교회 지도자라면, 이 용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특히 대중문화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를 아는 게 사명 완수에 도움을 줄 것이다. 

 

메타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메타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나온 것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이후에 나온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반응하며 해체한다면, 메타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반응하며, 그것들이 가진 측면을 긍정하는 동시에 비판한다. 메타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진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식의 양분적 성격을 반대한다. 메타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경우에) 성실함/확실함/희망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에) 아이러니/해체주의/허무주의 사이에서의 선택도 거부한다. 메타모더니즘은 모두를, 즉 통합을 중시한다. 비록 결국에는 비논리적이고 일관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메타모더니즘이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엄격한 논리가 아니다. 대신 분위기와 느낌(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내가 공감하는 게 무엇인지)이다. 그렇기에 일관성 없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게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소리”로 들린다면, 당신은 지금 거의 요점에 근접했다. 인터넷(무수한 “진리”로 구성된 구조적 다중우주)이 제공하는 끝없이 수준의 ‘네가 원하는 것을 가져’라는 지평을 따라서 형성된 메타모더니즘은 스마트폰만큼이나 활짝 열려 있고 소비자 친화적인 세계관이다. 원하면 들어오고 아니면 나가면 된다. 팔로우하거나 팔로우를 취소하면 된다.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화면을 맘대로 바꾸면 된다. 여기는 당신만의 iWorld이다. 그러니까 더 맘에 드는 iWorld를 만들면 된다.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아이디어 사이를 마구 전환하는 메타모더니즘의 초소비주의자, 이를 가리키는 학문적 용어는 “진폭oscillation”이다. 메타모던적 전망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양극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그 결과 메타모던의 진짜 위치는 결코 고정되지 않고, 궁극적으로 초개인주의적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주어진 순간에 해체와 구성, 진실과 상대주의 사이를 여러 번 오갈 수 있다. 어느 한 방향으로의 ‘올인’을 피하겠다는 조심성과 뒤섞인 막연한 느낌에의 의존이라는 게, 그나마 메타모더니즘의 성격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다. 

 

여기 메타모더니즘을 설명한 이 하나 있다. 

 

메타모더니즘에 따르면 우리 시대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두 측면 사이의 진폭을 특징으로 한다. 메타모더니즘은 일종의 정보에 입각한 순진함, 실용적 이상주의, 온건한 광신주의, 그리고 진실함과 아이러니, 해체와 구성, 무관심과 감정 사이를 오가며 일종의 초월적인 위치를 얻으려는 시도로 자신을 드러낸다. 마치 그 모든 게 우리 손안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메타모더니즘 세대는 아이러니하면서도 동시에 진실할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한다. 하나가 반드시 다른 하나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아이러니와 진실함 사이를 오가는 마지막 진폭은 현대 대중문화를 살펴볼 때 특히 두드러진다. 

 

영화 속 메타모더니즘

 

영화 속 메타모더니즘에 대해 내가 본 최고의 분석은 미디어 평론가 토마스 플라이트가 등장하는 비디오 에세이이다. 40분 분량으로 꽤 길지만, 메타모더니즘의 인식적 개념이 현대 영화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배우고 싶다면 시간을 낼 가치가 충분하다. 

 

플라이트는 Top Gun: Maverick을 최근 “모더니스트” 영화의 예로 강조하고, (펄프 픽션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포스트모더니즘” 영화의 일련의 예로 제시한다. “메타모던” 영화의 예로는 오스카상을 수상한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 쿠엔틴 타란티노의 Once Upon a Time in Hollywood(2019), 스티븐 스필버그의 The Fabelmans(2022) 및 웨스 앤더슨의 영화 대부분을 들고 있다. 이 영화들은 포스트모던적 성찰성(영화적 기교에 대한 자기인식을 강조한 영화)과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감정적 만남에 대한 진심 어린 고찰, 내러티브 낙관주의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의심, 그리고 “할리우드적 결말” 가능성에 대한 노골적인 열망을 특징으로 한다. 

 

세 개의 최근 영화 사례

 

메타모더니즘을 이해하면 영화와 TV 어디에서나 만난다. 다음은 작년에 나온 “메타모던 영화”의 몇 가지 예이다. 

 

1. The Fall Guy (2024)

 

라이언 고슬링이 주연한 이 액션 블록버스터는 메타모더니즘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화 속 영화’라는 줄거리는 호주 영화 세트장에서 스턴트맨(고슬링)이 현실의 위험과 현실의 로맨스에 얽히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상대역은 에밀리 블런트인데, 그녀는 이 영화의 감독을 맡았다). 이 영화는 포스트모던적인 성찰과 헐리우드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지시적 농담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다보니 할리우드의 기교를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중심 로맨스는 달콤하고 진실하다. 따라서 진지하고 솔직한 사랑에 대한 관객의 향수와 갈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스포일러 주의) 해피엔딩에서 고슬링은 “우리가 얻은 것은 영화보다 훨씬 낫다”고 말한다. 결말은 진지하면서도 아이러니하며, “할리우드식 결말”의 유치함을 장난스럽게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관객으로 하여금 그러한 결말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갈망하도록 만든다. 

 

2. Love at First Sight (2023)

 

이 넷플릭스 로맨틱 코미디는 지난 가을 큰 인기를 끌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진실한 로맨스에 대한 메타모던적인 접근 방식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런던행 비행기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젊은 여성과 청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TV 영화 수준의 줄거리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식상하지만, 누구나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 그게 핵심이기도 하다. 

 

이제는 러브 스토리가 너무 순진하다고 생각하는 메타현대적 관객의 입맛에도 맞을 만큼 이 영화는 자기 인식에서 뛰어나다. 누구나 아는 영화적 포스트모던 신조는 특정 캐릭터가 정기적으로 카메라를 보면서 관객에게 윙크하는 방식으로 직접 말을 걸 때에 더욱 강화된다. 하지만 이런 아이러니한 초연함 속에서도 진심이 가득하고 감정적 감동이 느껴지는 실제 순간이 산재해 있다. “현실에서 이런 사랑 이야기는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다”라고 영화는 전달한다. “그러나 그런 사랑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일어나길 바라는 건 기분 좋고 옳은 일이다.” 

 

3. Barbie (2023)

 

그레타 거윅의 기록적인 블록버스터는 “일관성이 없어도 괜찮다”는 메타모더니즘의 특성을 보여준다. 영화는 냉담하고 아이러니한 자기 인식(“그렇습니다. 우리는 플라스틱 인형에 관한 영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과 의미 있는 성찰을 위한 진지한 시도(“바비와 켄의 실존적 수수께끼 속에서 우리 자신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사이를 끊임없이 널뛰기 한다.

 

내가 지난 여름에 썼듯이, 바비는 방향 감각 상실과 관계없이 “모순 속에서도 편안하게” 지낸다. 성별에 관한 질문의 경우에, “도랑도 치고 가재도 잡겠다”는 일관되지 않은 접근 방식 때문에 영화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청중은 대부분 그런 데에 신경 쓰지 않는다. 실제로 바비가 보여준 박스오피스 지배력은 메타모더니즘이 이제는 확실한 주류가 되었으며, 따라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가장 분명한 신호탄이 되었다. 

 

메타모더니즘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

 

메타모더니즘이 문화와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많은 글이 필요하다. 후속 글에서 이 질문을 다시 다루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명백한 인식적 개념과 관련해서,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라는 질문에 대한 두 가지 간략한 설명만을 다루겠다. 하나는 우려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면이다. 

 

1. 논리에 대한 혐오와 ‘일관성 없음에 적응하기’

 

닐 포스트먼은 1985년에 낸 Amusing Ourselves to Death에서 텔레비전이 우리의 논리적 능력을 잠식하는 방식을 묘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관성 없음에 적응할 것이다”라는 말을 썼다. 그 표현이 오랫동안 나를 떠나지 않았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메타모더니즘이 실제로 반영하는 포인트이다. 

 

메타모더니스트들은 일관성 없음에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일관성 있고 없고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부 모순으로 가득 찬 예술, 정치, 철학, 행동주의를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최근 대학 캠퍼스에서 널리 퍼져 있는 “깨어난 지하드”라는 비논리적인 현상을 설명한다. 카피예를 입은 힙스터들은 가부장제를 비난하고 LGBT+ 평등을 장려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가부장적이고 가장 반LGBT인 이슬람 테러리스트들과 연대를 선언한다.

 

이것은 모순된 사상들 사이를 오가는 메타모더니즘의 진동에서 비롯된 우리의 불일치에 적응한 문화가 드러내는 수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절대적인 진리와 상대주의를 정말로 동시에 믿을 수 있는가?).

 

여기서 만나는 가장 큰 과제는 많은 메타모던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비논리적인 견해가 지적되어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순된 입장이 내포하는 내부 불일치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기독교 목회자, 교회 지도자, 복음 전도자, 변증가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기한다.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모순 속에서 점점 더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으로 넘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일관되고 논리적이며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그들을 제자화할 수 있을까? 

 

2. 의미와 확실성에 대한 진정한 욕구

 

메타모더니즘은 근본적으로 주관적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주관성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상대주의는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한다. 나 자신과 기분에 따라 흔들리는 감정,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바로 거기에 모더니즘의 확실성과 낙관주의가 주는 매력이 있다. 메타모던주의 사람들은 포스트모던적 해체가 가져다준 지속불가능성을 보았고, 재건을 갈망한다. 그들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고 발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한다. 이론적으로는 절대 진리를 의심하면서도 그들의 실존적 현실은 그 진리를 욕망하게 만든다. 결국, 무엇이든 제대로 세우려면 기초가 있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 메타모던주의 구도자들과 함께 희망적인 진로를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우리의 신앙이 견고한 기초를 제공하고 해체의 세계에서 지속적인 건설을 보여주는 한, 결과적으로 신앙이 자연스러운 매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교회는 지금 포스트모더니티의 여운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그들을 진리와 성장, 목적 있는 선교로 무장된, 오랜 세월에 걸쳐 검증된 공동체로 초대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을 맞이하고 있다. 

 

출처: Understanding the Metamodern M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