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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하나님의 때, 사람의 욕망 | ||
| 분류 | 성경과 신학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0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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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때, 사람의 욕망
시편 90편 묵상 by 고명환 2024-06-28
1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한때 차량으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오전 오후로 교통 서비스를 제공해 주던 대상은 고등학생 시기의 어린 미혼모들이었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출산을 하는 바람에 학교를 떠나 어쩔 수 없이 육아를 하게 된 앳된 엄마들이다.
그 나라에는 고등학생 나이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드물지 않아서 그런지, 일찍이 엄마가 된 학생을 백안시하는 분위기는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을 돕기 위해 정부에서는 여러모로 대책을 마련하고 시행하는 걸 볼 수 있다. 아이를 낳더라도 학업을 중단하지 않도록 학교에 탁아 시설을 마련해서 공부하는 동안 육아를 책임져 주고 필요한 상담과 교육을 제공하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편의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의 출산은 정규학교를 떠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그렇다고,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청소년 미혼모들을 위한 교육의 기회는 중단되지 않는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도 본인들이 원하기만 하면 학교과정을 마칠 수 있도록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해 준다. 고등학교 검정 시험을 준비하는 무료 교육시설을 운영하고, 수업을 듣는 데 지장이 없도록 여러 면에서 도와준다. 차가 없는 미혼모들을 위해서는 스쿨버스가 운행되는데, 바로 이들이 교육시설을 오고 갈 수 있도록 하루 두 번 운전해 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들을 위해 일하면서 낯설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차 안에서 어린 나이의 소녀들이 자신들의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또 그들을 위해 주변에 있어야 하는 부모와 얽힌 소소한 사연을 재잘거리는 소리가 낯설었다.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한창 뜨는 스타 이야기 등으로 같은 또래의 여학생들이 만들어 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쉽게 익숙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에게 어떤 사연이나 변명 혹은 주장이 있을지 모르나, 통념으로 살아가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분명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른 청소년들로밖에 달리 보이지 않는다. 인생의 때를 잘 맞추지 못한 그들에게 앞으로 당겨진 미래는 값을 요구했고, 중대한 오류의 대가를 이른 나이에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힘을 길러야 할 결정적인 시기를 잃게 됨은 물론, 그 시기에 만 향유할 수 있는 경험들을 놓치게 되는 손해를 보아야 한다. 단지 본인의 삶의 궤도가 비틀어지는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부모를 비롯한 가까운 주변 사람들의 인생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정신적인 충격을 미침은 물론이고, 출산에 따른 실질적인 부담을 그들에게 떠안겨 주게 된다.
사람은 예외 없이 잘못을 범한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중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그래프에 실수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은 없다. 헌데, 실수의 상당수는 때를 맞추지 못해서 초래한 경우들이라는 사실이다. 최적의 때를 분간하지 못했거나 최악의 때를 피하지 못해 일을 그르치고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사례는 인간사에 비일비재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성패는 때를 잘 분별하여 순응하거나 활용하는 능력에 어느 정도 달려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성경도 이를 뒷받침하듯 직접적인 훈계로, 혹은 사례로, 그 중요성을 끊임없이 전한다. 거기에는 때를 기다리지 못해 인생을 송두리째 탈취당한 사람도, 나머지 인생을 후회로 채운 사람도 있다. 참고 기다리고 때에 편승해서 빛나는 인생의 시기를 보내고 아름다운 삶의 결말을 맺은 사람도 있다.
2 시편 90편은 모세의 시로 전해진다. 적어도 삼천 년 전에 지어진 시가 살아남아 이 시대에도 생생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경이감을 넘어 신비감마저 자아낸다. 더욱이, 엄청난 시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울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가히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의 위력을 실감한다.
시가 태어났을 광야의 단순한 시간은 오늘날 고도 문명의 복잡한 시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과정을 지배하며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들었지만 하나님과 인간 실존의 문제를 바꾸지는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인 것이다.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시간과 공간의 지배 아래 놓여있는 사람의 실존은 변하지 않은 채 여전히 거기에 머물고 있다. 이런 불변의 진리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귀띔을 주는 위대한 지도자의 가르침은 이 시대의 잠자는 영혼들을 일깨우는 경종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인생이 알아야 할 부동의 진리가 있다. 영원은 피조물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점이다(2절). 주님께 천년은 어제와 같고 밤의 한순간과 같다고 표현했듯이, 시간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위력을 가지지 못한다(4절). 반면, 시간의 절대적 지배 아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분량은 한 뼘이며, 영원한 시간의 선상에서는 정점에 불과하다(4-6절).
인생은 한순간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5절). 어떤 인생이라도 맹렬한 불꽃에 소개되는 한 포기 풀처럼 있던 자취마저 찰나에 사라진다(3-11절). “주님께서 하시면”(“거두어 가시면”, “노하시면”), 한 숨결과 같은 사람의 시간은 소멸하고 만다.
이런 엄연한 실존의 한가운데에서 진지한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부여한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순간과 같은 시간을 최대의 의미와 가치로 환원해 낼지의 고민이다.
모세의 기도는 이런 고민에 부합하는 적합한 기도가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12절)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14절)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15절) “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17절)
3 ‘한 포기 풀과 같은 시간을 사는’ 피조물인 사람이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때를 잘 분별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때를 알고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는 때를 분별하지 못해 실패한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만큼 쉬운 과업이 아님을 말해 준다. 시편 90편의 저자인 모세 역시 예외가 아니다. 때를 분간하지 못하고 나섰다가 낭패를 당하고 광야로 피신해야 했다. 히브리서11장에 이름을 올린 믿음의 영웅들로부터 큰 인물에 가려져 이름조차 생소한 범인들에 이르기까지 실패를 피해가지 못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모멘텀이었다.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는 가서 정착할 땅의 냉엄한 현실을 그려냈고, 그들 안에 잠재해 있던 두려움을 일깨워 확대시켰다. 패닉 상태에 빠진 백성은 통곡으로 밤을 새우며 집단체면에 걸린 군중처럼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이어, ‘우두머리를 세워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면서 조직적인 행동을 시작한다(민수기 14:1-4).
이 시점이 끝이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의 끝이었고, 그들에게 부여된 시간과 기회의 끝이었다. 그들의 시간은 광야에서 멈춰졌고, 젖과 꿀이 흐르는 미래의 땅은 몰수당하고야 말았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불신(하나님은 이를 “멸시”로 표현하신다)은 즉각적인 절멸의 위기를 불러왔다(민수기 14:11, 12). 다행히, 모세의 중재로 즉사는 면했지만 멈추어진 시간과 미래를 돌려 받지는 못한다.
종말을 선언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멈추어야 했다.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읽지 못한 우매한 백성은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 주고야 만다. 모세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음날 그들이 그렇게도 무서워했던 가나안 사람들을 치러 올라가겠다고 소리를 높였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곳으로 올라가자. 우리가 잘못했다”(민수기 14:40).
이들의 망동은 대단한 착오이자 반역이었다. 이미 다한 하나님의 시간과 호의를 다시 불러 오겠다는 교만이었고,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짓밟는 반역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 없이 발휘한 만용은 힘없이 꺾였으며,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민수기 14:44, 45).
사무엘하 16장에 등장하는 시므이는 간악한 인간의 전형을 보여 준다. 그는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피해 다급하게 달아나자 다윗의 시대는 다했다고 판단했다. 다윗의 피난행렬이 그의 마을을 지날 때 다윗과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하지 말아야 할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영영 가거라! 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야! 이 불한당 같은 자야! 네가 사울의 집안사람을 다 죽이고, 그의 나라를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주님께서 그 피 값을 모두 너에게 갚으신다. 이제는 주님께서 이 나라를 너의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 주셨다. 이런 형벌은 너와 같은 살인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재앙이다”(사무엘하 16:7-8, 새번역).
베냐민 자손이었던 시므이는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다윗의 정통성을 완전히 부정한 자였다. 하나님께서 세운 왕이었음에도, 자신의 지파에 속했던 사울 집안을 무너뜨린 뒤 왕위를 탈취한 불한당으로 간주하여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다윗의 몰락을 눈앞에 보게 된 시므이는 한동안 산비탈을 타고 따라가며 저주의 말과 함께 그 곁에서 돌을 던지고 흙을 뿌려 댔다.
헌데,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다윗의 운명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압살롬의 죽음과 함께 극적으로 회복된다. 이는 시므이에게는 사형선고와 같은 반전이었다. 다급해진 시므이는 서둘러 베냐민 사람 일천 명을 거느리고, 왕궁을 향해 다시 발길을 옮기는 다윗 왕의 행렬 앞에 나와 목숨을 구걸한다. (그를 따랐던 사람들의 숫자를 보면 시므이가 베냐민 지파 가운데 상당한 실력자였음을 보여준다.) 이때, 다윗의 충복이었던 스루야의 아들들이 그를 즉시 처형하고자 하였으나, 다윗은 오히려 그들을 말리며 시므이의 목숨을 보전해 주겠다고 약속해 준다(사무엘하 19:15-23). 피를 흘려야 하는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의 감정을 앞세워 보복을 한들 상처를 입은 이스라엘을 치유할 수는 없었다. 용서와 화해가 필요한 시기였고 다윗은 그때를 잘 분별했다.
주님께 맹세한 대로 다윗은 시므이를 그의 남은 생애 동안 해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므이의 간악한 적대 행위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맹세를 지키기 위해 처벌하지 않았을 뿐, 시므이를 평안히 눈감게 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다윗의 시간도 끝나갈 무렵,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에게 시므이의 처리를 맡긴다. “그의 백발에 피를 묻혀 스올로 보내야 한다”(열왕기상 2:9, 새번역).
선왕의 유언을 이루어 드리는 일에 솔로몬의 정치적 지혜는 발휘된다. 다윗의 맹세로부터 자유로웠던 솔로몬이었지만 직권으로 단순하게 그를 처형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윗의 집권시절 집요하게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베냐민 후손들이 잔존해 있었고, 시므이는 그중 만만치 않은 세력을 가진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런 자를 일거에 없애버리면 베냐민 사람들의 반감이 수그러들지 않을 터이고 솔로몬 집권 동안 골칫거리로 남을 여지가 있었다.
영리한 젊은 왕은 반대 세력의 정서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시므이를 제거할 방법을 고안해 낸다. 그를 왕의 영향에서 먼 지방에서 불러내 왕국의 중심인 예루살렘에 거주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는 날에는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홀로 격리되어 사는 것도 아니고 수도로 이주하여 하인들을 거느리며 넉넉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시므이는 저항없이 받아들였다(열왕기상 2:36-38).
시므이를 다윗의 유지대로 처형하는 데는 삼 년이면 충분했다. 시간이 흐르자 시므이의 긴장은 풀어졌고 그의 교만은 점점 살아나기 시작했다. 때를 분간하지 못한 채 자기의 소견을 따라 시므이는 도망간 하인들을 찾겠다고 직접 나선다. 그리고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수월하게 넘어 먼 길을 다녀오고야 말았다. 덧을 놓고 기회를 엿보던 솔로몬에게 그의 행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결국, 때를 기다리던 솔로몬에 의해 때를 헤아리지 못한 시므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열왕기상 2:46).
왕위 경쟁에서 탈락한 아도니아 역시 때를 분간하지 못하고 죽음을 자초한 젊은이었다. 서열 상 다윗을 이어 왕위를 이어받을 줄 알았던 아도니아는 솔로몬에 밀려 왕이 되지 못한다. 솔로몬이 왕이 될 것이라 밧세바에게 약속했던 다윗은 막상 후계자를 정해야 할 시점에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지 않았다. 아마 아도니아와 솔로몬을 저울질했던 것 같다. 이는 다윗의 신복들이 분열하는 빌미가 되었고 나중에 피의 숙청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열왕기상 1:5-8).
예정대로 솔로몬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자 아도니아는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형편에 처했다. 동생 솔로몬의 자비로 겨우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안전까지 보장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형은 때를 간파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을 저지른다.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를 찾아가 말년의 다윗을 수종 들었던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고 싶다는 뜻을 비친다. 밧세바는 이를 받아들여 왕의 허락을 받기 위해 솔로몬을 찾아갔다. 그리고, 아도니아에게 그녀를 주도록 요청했다. 쉽게 솔로몬이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여 아비삭을 아도니아에게 줄 것으로 예상한 밧세바에게 돌아온 아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솔로몬은 대로했고 아도니아를 대변한 어머니를 나무라는 한편, 형 아도니아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조신하게 숨죽이며 신변의 안전을 도모했어야 할 아도니아는 때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자멸했던 것이다(열왕기상 2:13-25).
4 성경은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고 알려준다(전도서 3:1-8). 사람이 계획하고 정한 때가 아니다. 하나님이 설계하고 디자인하신 때이다. 사람은 이 정한 때에 따라 기다리고, 적극 행동하며, 물러나기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내는 데 실패하거나 상실과 손해를 거두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이라는 존재는 우매해서 이러한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최선의 때와 엇박자를 만들어 낸다. 아니면, 알면서도 바른 판단력을 장애물인 양 걷어내고 고집스럽게 실패의 길로 내닫는다. 나의 인생의 구간에서는 아무런 물의가 없었으니 예외에 해당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인생의 길이 평탄한 것이 하나님의 때를 만족시키며 살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어쩌면 하나님의 기대와 때에 부응하여 살기보다 육신의 안정과 평화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았을 수 있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때를 피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에 뒤로 물러났을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사람은 때에 따라 처신하지 못하는 것일까? 물러날 때를 몰라 낭패를 당하고, 개입할 때를 놓쳐 일을 그르치고, 멈추어야 할 때를 지나쳐 나락에 떨어지고 마는가?
이유는 욕망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때와 우리의 시간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오차 없이 병행할 때 의미와 가치가 따르는 데도, 우리의 시간은 일탈하여 욕망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기를 좋아한다. 기다려야 할 미래를 끌어와 현재에 즐기고, 안주하지 말아야 할 과거에 젖어 내일을 잊는다. 그러다 아예 욕망의 포로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사람은 하나님의 시간과 때를 구속으로 여기고 욕망이 지시하는 대로 마음껏 시간과 때를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왔다. 따라서, 더 이상 하나님의 때와 시간이 지시하는 방향과 시점은 구속력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대신, 욕망이 선택하는 때와 시간이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한편, 하나님의 때와 시간을 벗어나 스스로가 때와 시간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소비하겠다는 독립심은 내재된 욕망의 구속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욕망이 선택하는 때와 시간에 인생을 담보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구속을 자유로 착각하며 욕망에게 모든 결정권을 넘겨 인생을 낭비하거나,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최선의 때를 알더라도 욕망이 끄는 힘에 굴복하여 크고 작은 실패를 반복하는 굴레를 쓰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에서, 사람은 자유인으로 아무런 구속없이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리저리 끄는 대로” 끌려다니는 존재임을 가르쳐 준다.
이를 입증하듯, 교회 안에서조차 욕망의 제물이 된 사람들의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평생을 말씀과 기도의 루틴을 지키며 성도들을 호령하던 이름난 영적 지도자들도 욕망이 끄는 대로 끌려가 돌이키지 못할 과오를 범하기 일쑤다. 절대로 자신은 세습의 대열에 서지 않겠다고 공언한 목사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갖은 편법과 변명을 동원해서 아들을 기어코 그 자리에 앉혀 놓은 일은 대수롭지 않은 소사가 되어 버렸다. 평소 순결과 절제를 강조했던 설교자들이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악마가 된 사건들은 이제는 식상한 사회 뉴스 거리 정도의 흔한 일로 받아 들여진다. 청빈의 덕을 마지막 순간까지 실천할 것처럼 보였던 성직자들이 서서히 욕망에 잠겨 거액의 은퇴 자금과 종신 사례비를 받는 관행도 업적에 대한 당연한 예우와 미덕으로 자리잡지 않았는가.
고삐가 풀려버린 욕망은 단지 굳은 결심 정도로 쉽게 떠나 보낼 수 없는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때와 시간을 역행하게 만들고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갉아먹는 좀과 같은 존재이면서 좀비처럼 살아나 한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으로 부족해 공동체를 흔드는 가공할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5 앞서간 선진들의 자취와 혼탁한 현실이 보여 주는 실상은 욕망이란 거대한 힘 앞에 우리의 방어벽은 취약해 보인다. 사실이 그렇다. 스스로 욕망을 제어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부터 욕망에게 문을 열어 길을 터 주었고 그 문을 닫을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원리가 있다. 욕망이라는 거대한 힘을 능가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과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진 욕망이라도 우리가 편승해 주지 않는 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짧은 인생이지만 참되게 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다. 복음이 단지 사후의 미래를 보장하는 희소식으로만 선포되었다면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내야 할 과업은 오롯이 그리스도인의 몫이 된다.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을 통해 선포된 차원 높은 황금률을 실천해야 하며 부정한 생각으로부터 영혼을 지켜야 한다. 이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목표가 되고 만다. 사도 바울이 죄와 법의 전쟁터에서 절규했듯, ‘죽음의 몸’에 매여 세상의 시간을 절망과 좌절로 채워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로마서 7:15-25).
복음은 죄와 죽음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동시에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다. 욕망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시간과 때로 살 수 있다고 가르쳐 준다.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고, 세상에 사나 하늘 나라의 삶은 가능하다고 일러준다. 완전한 사람이 되시어 하나님의 시간으로 사신 예수님이 증명하지 않느냐고,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이 능가하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느냐고 강조한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완벽하게 하나님의 시간과 때를 사셨다. 성경의 저자들은 이에 대해 주의 깊게 언급한다. 우리와 같이 욕망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 취약한 사람의 성정을 가지셨으나 아버지의 뜻에 역행한 적이 없으시다. 그분은 때가 되어 세상에 오셨고, 때가 되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셨다. 때를 따라 기적을 일으키시고, 때를 아시고 제자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께 돌아가셔야 할 때를 아시고 순종하여 사명을 완수하셨다. 스스로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의 뜻과 선택을 잊으시고 아버지의 시간과 때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셨다.
예수께서 떠나신 뒤, 동일한 하나님이 또 다른 보혜사로 세상에 오셨다.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이시다. 말씀처럼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보냄 받았다. 성도들 속에 살아 복음을 빛내고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시기 위해 오셨다. 새로운 창조물이 된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간을 살아 내도록 도우시기 위해 오셨다. 욕망의 쇠사슬을 끊어 내고 새로운 법을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기 위해 오셨다.
오늘날에도, 성령은 짧은 인생의 시간을 최대의 효용으로 변환하고자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삶에 일하신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 소원은 있으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없어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 그분의 능력을 믿고 지시하는 길을 묵묵히 선택하는 사람 속에 살아 계셔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거두게 하신다.
열쇠는 성령의 힘에 나의 인생의 주권을 양도하고 사느냐 아니냐 하는 여부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대로 살아가라’ 권면한다(갈라디아서 5:16).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따르지 않게 된다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욕망과 성령, 이 둘은 양립할 수 없는 적대적인 긴장 관계에 있으며, 어느 편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의지에게 달려 있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결과에 대해서도 선명하게 설명해 준다. “그런데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18-23, 새번역)
성령은 우리의 시간을 최대의 가치로 변환시킬 능력을 가졌고 이를 위해 오셨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고 그분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이다. 역사적으로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간 사람들은 말씀처럼 그분이 맺게 하시는 열매를 넉넉하게 남기는 삶을 살았다. 모두 하나님의 때와 시간을 따라 살 수 있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는 과업에 드려질 수 있었다.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때와 시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지체없이 따르며 행동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6 때를 분간하고 때에 맞춰 인생을 꾸려 나갈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인물이다. 진정 인생을 아는 사람이다.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힘을 아는 사람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삶의 크기와 설계자의 섭리와 주권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제압하기 힘든 욕망을 처리할 줄 알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광야를 살았던 위대한 지도자는 말한다. 우리의 시간은 ‘한 순간의 꿈’과 같이 짧으며 이 시간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불변의 사실을 알라고.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잃어버리거나 낭비하지 말고 그 것을 의미와 가치로 변환하라고. 때에 적절하게 대응하며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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